그어, 말어? 지저분한 책이라는 금기
어느 날, 독서에 몰두하던 막내 동생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 진짜. 누나!"
웃음기와 원망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사이가 나쁘진 않지만 평소 나를 찾는 일이 드문 동생이라 의아했다.
"왜?"
동생은 한 권의 책을 들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원조 필기 장인이셨다. 영어 손글씨는 반드시 필기체로 쓰셨고, 한글 손글씨 역시 가볍지만 멋들어진 '어른 글씨'의 표본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아버지를 무척 동경했다. 책의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치시는 모습이 특히 멋있었다. 아버지는 밑줄을 직선으로 긋지 않으셨다. 물결 모양으로 그었는데, 모양이 일정해서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어깨너머로 훔쳐보면, 난해한 내용에 밑줄을 그어두신 것이 보였다. 어린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이렇게 하면 똑똑해 보이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책에 밑줄 긋기를 따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난관에 봉착했다. 책에 밑줄을 긋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중요한 내용이라 표시해 두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막상 밑줄을 치려니 어디에 그어야 할지 난감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주로 판타지 소설을 읽었기에 특히나 밑줄을 그어가며 읽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적으로 보이는 독서를 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읽던 소설책을 한번 분석해 보기로 했다.
'아로와 완전한 세계'라는 아동용 판타지 소설이었다. 여러 번 읽었기에 내용을 꿰고 있어 그럴듯한 메모를 남기기에 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알고 있는 유일한 독서 분석 지식을 적용했다.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우는 그것.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개념과 등장인물에 대한 해석이었다. 초등학생이 얼마나 끈기 있게 할 수 있었겠는가. 첫 장도 채 끝내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냥 읽는 것이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책 보다 인터넷이 재밌어지기 시작했고, 밑줄을 긋느니 마느니 했던 것도 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막냇동생이 그 책을 들고 나를 부른 것이다. 책을 보자마자 이유를 알아챘다. 어떤 기억은 잊어버렸다가도 그렇게 폭탄처럼 떠오르는 법이다.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들어 바라본 막내의 뒤에서는 어머니와 둘째 동생이 히죽히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아, 망했다.
"아니 앞부분부터 이런 낙서를 하면 어떡해."
어린이였던 나는 겁도 없이 네임펜으로 거침없이 책에 메모를 해버린 것이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과거의 나여, 왜 그랬느냐. 밑줄은 손에 힘이 없어 비뚤비뚤했고 멋져 보이려고 썼던 코멘트 또한 누가 봐도 아이의 글씨였다. 화룡점정은 책의 후반부에나 밝혀지는 악당의 이름에 네모칸을 쳐두고 쓴 각주였다.
'악. 당'
악당의 행동 옆에는 친절하게도 '복선'이라고 쓰여 있었다. 과거의 나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통해 배운 복선이라는 개념이 인상 깊었나 보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악당'을 포함해 책에 남긴 코멘트를 모조리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주여… 원망을 하던지 비웃던지 하나만 해라, 하나만.
그 후 책에 밑줄을 치거나 메모하는 행위를 꺼리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섭섭할 것이다. 놀림감이 되어버린 내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생각해 보자. 책은 깨끗하게 읽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지저분하게 읽는 것이 좋을까? 한겨레신문의 칼럼을 잠시 살펴보겠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습심리학자들은 밑줄 긋기가 여러 면에서 아주 유용한 읽기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보가 뇌 속에서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연구하곤 하는데, 밑줄을 그으면서 읽을 때 우리의 뇌가 훨씬 잘 반응하여 정보를 오래 기억하게 된다고 말한다."
<뇌의 반응 돕는 ‘밑줄 긋기’>
인상 깊었던 구절을 표시해 두거나 자신의 생각을 적으면서 읽으면 내용을 더 자세히 보게 된다. 눈으로만 읽는 독서에 비해 놓치는 내용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어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또한 시각으로만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추가되기 때문에 두뇌의 연결이 더 강화된다.
다른 장점도 있다. 과거의 나와 대화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이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하면서 이전의 나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12세 때 읽은 책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는다면 어떨까? 어렸을 때는 그저 재미있게 보았던 이야기인데 커서 보면 유치하기도 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책이 명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장에 메모를 남겨 두면, 익숙한 듯 낯선 생각들을 마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조건 밑줄 치면서 읽어야 하는 것일까? 글쎄, 단점도 있다. 일단 시간이 오래 걸린다. 책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안 그래도 어려운데 다 읽기까지 시간이 걸려 금방 지루해질 것이다. 게다가 책이 손상되기 때문에 어디에 팔 수도 없다. 안 읽는 책은 중고서점에 팔거나 기부하면서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데, 한 번 책에 흔적을 남기면 그러기 어렵다. 또한 빌린 도서라면 낙서를 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결론은, 하기 나름이다. 밑줄이 싫다면 포스트잇이나 노트를 사용해 그때그때 메모하면서 보면 된다. 반대로 책에 마구 흔적을 남기면 독서의 부담이 줄어들고 내용을 더 꼼꼼히 볼 수 있다.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
한때 마구 놀림을 당해 무조건 깨끗한 책을 고수하는 나였지만 지금은 편하게 메모도 쓰고 인상 깊은 구절에 표시하기도 한다. 깨끗하게 남기고 싶을 땐 포스트잇을 사용한다. 독서는 정답이 없다. 밑줄 그을지 말지 고민이라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쪽으로 고르도록 하자.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마무리로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팁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깨끗한 책을 원한다면 포스트잇 활용
: 요즘은 문구점에 밑줄 효과를 낼 수 있는 긴 인덱스나 포스트잇을 판매한다. 책을 훼손하는 것이 싫다면 이러한 아이템을 사용해 보자.
2. 직선이 어렵다면 물결 모양 사용
: 예쁜 일직선을 그리기가 어렵다면 자연스럽게 물결 모양으로 그려보자. 의외로 깔끔하다. 감성적인 효과는 덤이다.
3. 표시는 인상 깊은 구절에만
: 모든 내용에 표시하면 나중에 다시 읽기 어려워진다. 인상 깊은 내용이나 핵심 내용에만 밑줄을 긋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