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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도 걱정이 없을 때 할 수 있다

걱정이 많으니 덕질도 어렵다

by 잊드라 Dec 12. 2024

처음에는 그랬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아무랑도 말도 안 섞고 싶고 그 누구도 나에게 연락을 안 하면 좋겠고 여행가기도 싫고

오직 이준호만 하고 싶은 시기가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꽃이 피고 져도

무더위가 지속되고 맑은 가을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까짓 계절 변화가 무슨 상관이냐.

인생사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이준호만 보면 된다.


잠시라도 이준호를 안 볼 수가 없어서 여행을 가서도 화장실 가는 짬에 준호 얼굴 한 번 보고

샤워하는 동안에도 샤워부스 너머로 이준호 영상 틀어놓고 비누칠을 할 때마다 뿌연 창 건너에 있는 준호 얼굴을 보려고 부스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곤 했다.

일하는 중간중간 준호 짤을 보며 피로해진 심신을 달랬다.


와 나 너무 심각하다, 미쳤나 보다!

했는데, 그 미친 시기는 지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무료함, 외로움, 불만을 오직 이준호 하나로 날려 보낼 수 있었던 시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히죽히죽 웃으며 준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하루 사이에 근심걱정 두근두근 우울함이 생겨서 온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덕질도 맘 편할 때 할 수 있는 거구나.

덕질할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이었다.

어덕행덕이 아니라 (어덕행덕 = '어차피 덕질할 거 행복하게 덕질하자'의 준말)

덕질이 가능한 삶이 행복한 삶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게 된 첫 번째 사건은 가족의 입원이었다.

입원실이 없어 깜깜이 대기를 하다 특실에 간신히 들어간 날이었다.

담당 교수님의 무시무시한 발언에 인터넷 창을 켜고 해당 질병명을 검색하며 의학용어에 부들부들 떨었다.

수술이 오늘 잡힐지 내일 잡힐지 채혈 후 혈액 수치를 확인해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가족 중 누군가는 입원하는 분의 곁을 하루 종일 지켜야 했다.

진행상황을 보며 여러 번 수술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퇴원이 언제쯤 일지 주치의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 체한 기분이 며칠 째 지속되었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마음 편히 준호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입덕 초반 제대로 미친 시기의 나를 멱살 잡고 현실로 끌어낸 것은 가족의 건강 이상이었다.

그 후 가족이 여러 번의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한 이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준호만 보이는 미친 덕후에서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얌전한 덕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2025 이준호 FAN-CON 〈Midnight Sun〉 in INCHEON 창을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포도알 분포가 바뀐다. (포도알 = 인터파크 티켓에서 남은 좌석. 예매 가능 좌석은 보라색으로, 이미 예매된 좌석은 흰색으로 보인다.)

내가 방심하는 사이, 좋은 자리 취소표가 뜰까 봐 불안한 상황이다.

사랑하는 가수의 팬콘 티켓팅,

덕후로서 이렇게 매우 중요한 시기에 나라가 시끌시끌하니 혹시나 모를 국가적 위기 사건이 또 생길까 봐 몹시도 불안하다.

국제적인 수치심과 줄줄 흘러내리다 못해 박살 나고 있는 내 주식계좌는 또 어떻고.

시시각각 새로운 속보와 기자회견이 뜬다.

포도알 새로고침을 하다가도 강제로 현실 세계에 끌려 나온다.   

취켓팅하기에도(취켓팅 = 취소표 예매) 모자란 시간들이 나라 걱정으로 흩어지고 있다.


어휴.

마음 편히 덕질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나라일 걱정으로 덕질에 지장을 받을 줄이야!

다시 깨닫는다.

덕질도 걱정이 없을 때 할 수 있구나.

덕질할 수 있는 삶이 행복한 삶이었구나.




덕후는 덕질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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