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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물건을 보내며

모든 과정을 겪어보았지만 

by 잊드라 Dec 05. 2024

그가 놀랍도록 가뿐하게 뛰어올랐을 때, 그리고 볼을 반짝이며 해사하게 웃었을 때,

나는 단번에 사랑에 빠졌다. 

'노래 들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어리고 잘생겼네.'

라고 그보다 훨씬 어린 내가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부터 그는 나의 첫사랑이자, 수해동안 가장 오랜 시간 설렘을 준 사람이었다. 

사랑 호르몬이 멈추고 또 나의 현실 사랑이 찾아오고 

가슴 벅찬 팬심과 사랑이 점차 의리로 변해갈 때에도, 

그가 굵은 웨이브 머리에 짙은 인상의 여인과 결혼한다는 기사를 보며 가슴이 철렁할 때에도 

그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다. 

좋은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었지만 진심으로 응원했다. 


내게 그의 음악 테이프를 선물해 줬던 같은 반 남자아이, 

선의의 경쟁자이자 덕메였던 친한 친구,

그의 흉을 봐서 2년 내내 그리고 그 이후로도 미워했던 재훈이, 

너도 좋아해? 나도! 공통점을 찾았던 영혼의 단짝,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하자 자신도 좋아한다며 콘서트를 예매해 줬던, 내가 오빠! 오빠! 소리 질러도 같이 웃어주던 첫 남자친구. 

나에게 있어 그는 내 청소년기의 대부분이었고 내 10대였고 내 청춘이었다. 


매해 그의 앨범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발매일이 되면 시내의 레코드점에 달려가서 귀한 보물을 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번은 집에 오는 동안에 음반 케이스가 살짝 금이 갔는데 그게 속상하고 마에 걸려 다시 가서 음반 하나를 더 구입했다. 

덕질하기에는 용돈이 부족해서 한 푼 두 푼 가까스로 모은 비자금으로. 


몇 날 며칠을 앨범을 듣고 또 들으며 전곡의 가사를 외우는 것이 나의 낙이자 의무였다. 

그의 팬미팅에 가기 위해 두근거리며 무통장 입금을 했으나 덕메는 붙고 나는 뚝 떨어졌던 날, 방구석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꺼이꺼이 오열하던 기억, 

데뷔 1000일을 맞이하여 친구들에게 간식을 돌리고 필름지에 축하 메시지를 인쇄해 학교 곳곳에 붙이던 기억. 

엄마한테 독서실에 간다며 집을 나서서는 새벽부터 팬클럽 대절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열리는 팬미팅에 찾아갔던 기억. (그때 너무 멋있어 보였던 우리 지역 대학생 팬클럽 회장 언니)

콘서트 직전에 화장실에 가다가 하얀 수트를 입고 씩씩하게 걸어오는 그를 멀리서 훔쳐보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순간.  


그는 공연 마지막에는 커다란 공연장에서 무반주 무마이크로 데뷔곡을 불렀다.

수많은 팬들은 숨을 죽이며 그의 쌩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지금 생각하면 목을 너무 혹사시키는) 무마이크 쌩목노래를 매 콘서트마다 반복했고 그의 청아한 목소리가 고요한 콘서트장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 부분에서 항상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가슴에 닿는 느낌이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내 인생에서 손꼽도록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를 했다. 

엄마한테 "네가 가수 따라다닌다고 싸돌아 다니느라 성적이 이 모양이잖아!" 하는 말을 안 들으려고 기를 쓰고 공부했기에 성적이 잘 나왔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궁리하며 내 미래를 그의 동선과 연결하여 세부적으로 그려 나갔다. 

내가 서울에 오게 된 많은 요인 중 하나에 그도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엄마 몰래 장롱을 뒤져 주머니 속 현금을 빼냈고 대부분을 팬클럽이나 콘서트, 앨범 구입 등에 사용했다. 

나보다 착실하고 돈을 안 쓰던 동생에게 "나 돈 좀 빌려주라. 내가 꼭 갚을게. 나중에 돈 벌어서 많이 갚을게." 공수표를 날리며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몇 해 전 마흔을 넘긴 그를 보았다. 

여전히 볼이 빛나고 있었고 관리를 잘해서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아무런 사고 없이 건재하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서 여전히 빛나는 외모를 소유하고 

무엇보다 꾸준히 공연을 하고 노래를 하고 콘서트를 하고 활동을 해줘서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얼마 전 그의 영상을 보았을 때도 여전히 그는 빛났고 환하게 웃었고 하하하 유쾌했다. 

그가 앞으로도 그렇게 웃기를, 계속 건강하게 활동하기를 

계속 응원할 것이다. 








첫 덕질이 끝이 날 무렵 나도 모르게 결심을 했다. 

다시는 덕질을 하지 말자. 


나는 이미 빛나는 별을 사랑해 봤고 사랑과 열정이 사그라드는 순간과 끝을 알고 있고 

그를 사랑하며 소유했던 모든 물건들이 (반지, 카드, 사진, 잡지, CD, 티셔츠, 야광봉, 테이프, 수건 등) 어떻게 짐이 되어 가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사춘기 소녀가 아니었다. 

삶 가득 공부, 친구와 우상만 있던 멋모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빼어난 연예인이 있어도 '빠져들지 말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덕통사고를 당했다. 

내 결심과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입덕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해봤고 사그라들었고 끝을 알고 모든 물건이 짐이 되는 경험을 해보았으나 

그리고 사춘기 소녀도 아니었으나

속수무책으로 매력적인 별에게 빠져들었다. 


첫사랑의 앨범을 정리하기로 했다. 

몇 번의 이사와 정리에도 끝끝내 버리지 못했던 그의 앨범을 정리하며 마음 한편이 찌르르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내 10대를 버리는 것 같은 가슴 긁히는 허전함 때문에 여지껏 간직하고 있었던 물건들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런 마음을 나눌 덕메1, 덕메2와 여전히 연락을 하는 친구 사이라는 것. 

쟁쟁한 아이돌과 빽빽한 팬덤들 틈에서 발라드 가수를 사랑했던 너와 너는 

역시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이라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 곁에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앨범을 버릴 수는 없어. 

라며 당근에 올렸다. 

적은 액수라 하더라도 그의 앨범을 돈을 지불할 만큼 값지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다. 

안 팔리면 찌르르 아파오는 마음을 핑계 삼아 다시 상자에 넣을 작정이었다. 


오늘 그 사람을 만난다. 

구매하겠다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왜 구매하시는 거죠?"라고 묻는 판매자에게 진지하게 답변해 주었던 그 사람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란다. 








당근으로 만난 그 사람은 인상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 남자였다. 

연신 고맙다고 했다. 

미소를 편하게 짓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 같아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거래 후에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한참을 형님 노래 들으면서 이 가을을 즐겨야겠습니다.

다시 한번 잘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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