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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현 Dec 16. 2024

홀로 걸은 국토 4천리 (5)

얼뚱한 상상 / 전남 강진

엉뚱한 상상 강진    

 

2일 차(4월 3)


해남 북일면~강진 다산초당~백련사~강진군(영랑생가, 사의재) 30km / 누적 60km     


밤새 우당탕거리는 비바람 소리에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단층의 허름한 민박집이라 바닥을 때리는 세찬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른 새벽에 잠이 달아나 창을 반쯤 열었다. 바람 소리에 놀란 개가 깨갱대며 비명을 지른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스친다. 아침에 비가 그쳤지만 구름이 잔뜩 끼었다. 오늘같이 해도 나지 않고 비도 안 오는 날이 걷기에는 좋다. 어제 걸은 30km는 도보여행 초반에 무리였지만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강진까지 간다. 인구 삼만여 명의 작은 고을 강진, 먼저 다산 정약용이 떠오른다.       

   

해남에서 강진으로 향하며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가려고 빠른 길을 버리고 도암면에서 오른쪽 길을 택했다. 도암에서 다산초당 방면 길은 지나는 자동차가 드물어 한적하고 길도 좁아 걷기에는 그만이다.     

 

도암면 이르기 전 넓마을 입구 도로변에 ‘학동 茶山 先生 따님 묘소’라 새겨진 입석이 눈에 띄었다. 다산은 경기도 남양주 마재에서 열여덟 살 외동딸을 불러들여 자신의 귀양살이에 결정적 도움을 준 해남 윤 씨 친구의 아들이자 제자와 혼인시킨 것이다. ‘귀양살이하는 죄인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무뿌리가 엉켜있는 비탈을 따라 십여 년 만에 다산초당에 올랐다. 원래의 다산초당은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고, 후에 그 자리에 기와집으로 중건한 것이 우리가 보는 다산초당이다.     


사실 나는 다산초당보다 유배 초기 다산이 4년간 머물던 강진 시내 주막에 더 관심이 끌렸다. 대역죄인인 다산에게 누가 도움 줄 생각을 했겠는가마는 그에게 거처와 밥을 내준 이는 주막집 주모였다. 명문 양반가 지식인이자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전직 고위 관료와 주로 하층민에게 밥과 술과 거처를 팔던 주모 사이에 반상의 격차는 컸다. 하지만 그녀는 밥과 방이 있었고 다산은 밥과 몸을 뉠 곳이 필요했다. 현실 앞에서 양반이라는 허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주막 골방에 들어앉은 다산은 한동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겠지만,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밥벌이를 하며 『경세유표』 등 여러 저서를 탄생시켰다. 먹물답게 골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도 지었다. 말, 생각, 행동, 용모 등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가 있는 방이란 뜻이다. 역시 다산답다.  

   

십 년 넘게 해배 소식이 없자 지친 탓일까, 정약용은 여인을 들인다. 주모의 딸이라는 설도 있고, 다산초당에 심부름하던 이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최고의 학자로 알려진 정약용. 후세에 가장 이성적인 인물로 인식된 그도 한 사람의 남성이었나 보다. 여인과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딸을 귀히 여겨 해배 후 고향 마재로 데려왔으나 부인 홍 씨가 강진으로 돌려보냈다.      


엉뚱하게도 나는 18세기 다산에서 20세기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겹쳐 보였다. 두 사람 모두 학자이자 저술가이고 제자를 둔 스승이었다. 물론 학문의 영역에서 조선 최고의 지성인 다산을 신영복 교수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다섯 가지 유사점과 여러 다른 점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그들은 나라의 녹을 먹었다. 다산은 1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며 정3품 병조참의까지 올랐다. 신영복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 석사학위 취득 후 장교로 임관, 3년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수로 활동하였다.  

    

두 사람 모두 사상범이어서 장기간 격리된 생활을 하였다. 한 사람은 왕조시대에서, 다른 한 사람은 1968년 군사정권에서 살이 무너지고 뼈가 깎이는 고문을 당했다.      


다산의 유배는 18년이고, 신영복의 징역은 20년이다.      


다산은 74세에 신 교수는 75세에 사망하였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비슷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유배와 징역 생활은 상당히 달랐다. 나는 다산초당에서 동백숲을 따라 백련사로 걸어갔다. 쾌적한 길이다. 다산은 답답할 때면 종종 백련사로 건너가 가까이 지낸 혜장법사나 초의선사와 차를 마시며 세월을 논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막 사의재와 다산초당에서는 자유롭게 책을 읽고, 가르치고, 글 쓰는 학문의 자유를 누렸다. 물론 글 쓸 종이도 여유가 있었다. 유배 생활 중에 그는 학자로 살았다.      


게다가 고향인 남양주에서 자식을 불러 가족같이 가까운 해남 윤씨 일가와 소풍도 갔었다. 의식주와 추위 등 생활 속에서 오는 원초적 고통도 겪지 않았다. 초당 앞에 연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렀다. 가운데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이름 붙이고 연못가를 거닐며 시를 짓기도 했다.  

   

유배된 죄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웬만한 양반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십팔 년 유배 생활에서 그는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왕의 사후 정쟁에 휘말려 조정에 출사(出仕)하지 못한 한스러움과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빼면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반면 신영복 교수는 육사 경제학 교수 재직 중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복역 후 가석방 출소하였다.      


그의 수감 생활은 당시 여느 수인과 마찬가지로 열악하였다. 좁은 감방에서 여러 명이 촘촘하게 지냈다. 난방이 안 되는 겨울에는 잠잘 때 감방 동료들의 체온이 있어서 지낼 만했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옆 수인의 체온으로 찜통이 되었고, 감방 동료에게 적대감을 느꼈다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그는 말한다.   

   

모든 책과 서신은 사전 검열을 받았다. 감방 안에서 세 권의 책만 지닐 수 있어서 부친에게 책 여러 권을 한 권으로 제본해 달라고 요청도 하였다. 종이와 펜도 매우 제한되어 저술 활동은 원천 불가능했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의 사유를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엽서였다. 그 작은 엽서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위리안치(圍籬安置)까지는 아니어도 그의 수형 생활은 기본적인 자유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만약 다산이 신영복과 같은 수형 생활을 했다면 학문 활동과 방대한 저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상적 지향점은 달랐다. 실학자인 다산은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백성의 참혹함을 목격하여 왕에게 지방 수령의 수탈을 보고하였고, 목민관 시절 피폐한 민생 해결에 노력하였다.    

  

그는 실사구시로 국가의 제도적 개혁을 통해 백성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그에게 백성은 다스림을 받는 대상 즉 목민(牧民)이었을지언정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산은 양반 지배층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위민(爲民) 의식 정도는 품고 있었다.      


반면 신영복 교수에게 민중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는 옥에서 여느 지식인 수형자들과 달리 먹물로서 삶의 태도를 버렸다. 기술을 익혔고, 일반 수인들과 격의 없이 동고동락하며 감옥을 ‘인간학 교실’, ‘사회학 교실’로 만들었다.  

    

그의 삶과 여러 저서 곳곳에는 여민(與民) 즉 ‘백성과 더불어’ 의식이 깔려 있다. 여민은 평등 개념에 가깝다. 한글 붓글씨 ‘신영복체’는 민중 지향적이며 서민의 정취가 녹아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소주병에 인쇄된 ‘처음처럼’은 그의 서체다. 그는 제의를 받고 “서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대중적 술 소주에 내 글이 들어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라며 수락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님의 장편 소설 《한강》 표지도 그의 서체다.     


다산이 실학자이지만 그에게 여민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 계몽 군주, 개혁 군주라는 별칭을 무색하게 한 정조의 문체반정에 다산은 적극적으로 앞장선 강경론자였다. 정조의 개혁은 철저하게 성리학적인 지배체제 내에서 사회적 모순의 일부를 변화시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정조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고문(古文)만을 사용토록 강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과거제도의 문란과 함께 양반층의 몰락 즉 계급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고, 경영형 부농과 상인 자본 투자, 인구의 도시 집중 등 근대화의 요소를 갖춰가며 봉건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소설류나 수필류 등 패관소품(稗官小品)이 가세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그 대표적 작품이다. 다산도 신분질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성리학자였다.      


신분질서가 공고한 왕조시대에 백성과 어깨동무를 주장했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천주교 탄압은 기독교 교리인 제사 금지와 만인 평등사상이 사대부 양반에 의한 유교적 계급 질서와 그들의 지배력을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관광지가 된 청와대. 예전 비서동 간판이 정권에 따라 여민관과 위민관으로 몇 번 바뀌었다. 위민이든 여민이든 뭐가 대수랴. 백성들이 나라 걱정 없이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 아닌가. 두 지성을 두고 감히 이러쿵저러쿵 비교하는 무례를 범했다.


길가에 핀 동백꽃
아스팔트 사이에사도 생명은 움트고...
도로변에 세워진 "다산 선생 따님 묘소 " 안내석 - 다산의 딸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나도 처음 알았다.
한적한 도로
정비중인 다산초당
다산 초당 앞 연니석가산 - 웬만한 양반보다 나은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이 정자에서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된 형 정약전을 드리곤 했단다
다산은 초의선사와 다담을 나누고 싶을 때 이 길을 걸어 백련사로 걸어 갔다
백련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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