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항에서 고속도로처럼 뻥 뚫린 7번 국도 동해대로를 버리고 해안을 따라 금강산로에 들어섰다. 금강산콘도와 마차진을 지나 북으로 향했다. 2008년 금강산 여행객 피살 사건으로 금강산 여행이 전면 중단되기 전까지 금강산콘도와 마차진은 북으로 가는 1차 관문이었다.
2006년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금강산으로 단체여행을 떠났다. 금강산콘도에서 방북증 교부를 시작으로 남측 출입국사무소에서 수속을 마치고 특수 번호판을 단 버스에 올라 북으로 향했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갈 때였다. 남측 병사들은 잘 먹어 살이 오른 게 보기 좋았다. 북으로 넘어가자 사병들은 키가 작고 말라 보여 안쓰러웠다. 국경 검문소 군관은 깡말랐어도 눈매는 날카로웠다. 미국과 소련이 나라를 두 동강 내어 비록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다른 나라가 되었어도 키 작고 마른 북한 병사는 내 형제 아닌가. 일행은 금강산 해수 온천욕 한다고 몰려갔는데, 나는 혼자 이곳저곳을 구경 다니다가 철조망 너머 북한군이 소리 지르며 다른 데로 가라 하여 자리를 떴다. 수십 미터 앞에서 고참 병사가 부하들에게 벌주는 장면도 보았으니 북한 구경을 제대로 한 셈이다.
이번 국토종단 종착지는 통일전망대이지만 제진검문소부터는 도보가 허용되지 않는다. 출입신고소에서 통행증을 발급받아 자기 자동차로 이동해야 한다. 한비야 님의 국토종단기를 보면 오지 여행가로서 유명세 덕분에 부대장의 배려로 통일전망대까지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었다. 나는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부인과 딸과 함께 여행 온 중년의 남성께 동행을 부탁했다.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났지만 도보 여행자라 하니 흔쾌히 승낙하였다.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여기서 바라본 북한 땅까지는 걸어서 두어 시간 거리다.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현실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내 아버지 고향은 원산에서 평안도에 가까운 함경남도 고원군 산곡면이다. 이 길 따라 며칠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다. 체력은 충분했다. 어느 원로 수필가의 고향은 경기도 휴전선 북방한계선 안쪽이다. 고향의 기억이 생생한데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남과 북 위정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하니 갈수록 고향은 멀어지고 있다.
자동차로 돌아오며 구 제진검문소 앞에서 태워주신 분께 인사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여기부터 출입신고소까지 5km를 걸어야 이천 리 국토종단이 완료된다. 제진검문소에서 1km여 떨어진 명파리는 경기도 민통선 안 파주 대성동마을을 제외하면 북한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명파해수욕장도 물론 최북단이다. 여기서도 철책이 벽이 되어 모래사장과 바다가 격리되었고 철책 위에는 이중 삼중 가시철조망이 사람의 접근을 불허했다. 마을을 벗어나 마차진으로 향했다. 도로는 물론 하천에도 전차 저지용 구조물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서울 북부에도 저런 구조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철 지난 시멘트 덩어리가 흉물로 보인다.
야트막한 쑥고개 마루에 고성군수 명의의 ‘고성 부역 혐의 희생 사건 희생지’라는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국군은 이 지역에서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은 민간인 수십 명을 집단 학살하였다. 이곳은 집단 희생자 유해 매장 추정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군수의 고지도 덧붙였다. 이 지역은 전쟁 전에 엄연히 북한의 영토였다. 남과 북은 1948년에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두 개의 나라가 된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이곳 주민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이 되었고, 국가의 지시를 받아서 일했을 뿐이다. 이곳이 전쟁이 끝나 남한 영토가 된 것은 실지를 수복한 것이 아니라 남한의 영토확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부역죄를 씌울 수는 없다.
명파리에는 식당과 잡화점, 민박도 두어 곳이 영업 중이었으나 마차진까지 오는 도중에 본 가게 대부분은 문을 닫았다. 금강산 여행이 중단되며 이곳은 폭격을 맞았다.
<이제 모두 마쳤다. >
그해 4월 1일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출발하여 강진 장흥 보성 화순 곡성 순창 임실 진안 무주 영동군 황간을 지나 경북 상주 모동면에서 다리 부상으로 14일 만에 360km를 끝으로 국토종단을 중단해야만 했다.
일 년 지나 4월 6일에 다시 시작했다. 상주, 문경새재를 넘어 제천, 영월, 정선, 진부, 운두령을 넘고 홍천 내면을 지나 인제군 상남, 기린(현리), 인제, 용대리, 진부령을 넘어 고성, 거진을 거쳐 통일전망대까지 470km를 걸었다.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한 번에 완주하려 했으나 두 번에 나눠 830km 국토 종주를 모두 마쳤다. 완주했다고 해서 들뜬 기분이 들지 않았다. 두 번에 나눠 걸었기 때문도 아니고, 도전과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땅을 걷는 게 좋아서였다. 내년에는 국토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횡단을 해 볼까 싶다.
속초로 돌아와 그동안 수고한 나 자신을 위해 하루 휴가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럴싸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그런 휴가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슨 잘 난 일을 했기에 호사를 누리려 하는가, 남들은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건이 되지 않아서 국토종단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조용히 마치자.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십 여일 집을 비워 사업장 일에 매진하랴, 집안 일하랴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일상으로 복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