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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 보인다 - 46화

화진포

by 조성현

걸으면 보인다 / 화진포


20일 차(4월 25일)

간성향교~거진~화진포~초도항~대진항 20km / 누적 465km


몇 년 전 홀로 울릉도 여행하며 해안 일주도로를 걸을 때였다. 도동의 독도 전망대 근처에서 충청도 말씨를 쓰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하얀 바지에 빨간 셔츠를 입은 배 나온 초로의 사내가 침을 튀겨가며 울릉도 여행에 불만을 내뱉었다. 다시는 울릉도에 오고 싶지 않다고. 이유인즉슨 비용 대비 볼 게 적다는 것이다. 울릉도 여행을 하려면 동해안까지 육로 교통비와 울릉도 뱃삯까지 왕복 교통비가 만만치 않다. 여행사가 운영하는 관광은 주로 2박 3일 일정이므로 길과 바다에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남은 시간에 관광버스(주로 미니버스) 타고 다니며 몇 군데만 보는 수박 겉핥기 여행이다. 그 사내는 “이 돈이면 다른 데 가서 잘 먹고 잘 논다”라고 소리친다. 사내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울릉은 걷는 이에게 제 속을 내어준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울릉도 자유 여행을 권한다. 전체 일정을 도보로 다니지 않아도 좋다. 일주 버스가 계속 다니므로 내려서 걸으며 보고 느끼다 또 버스 타고 이동하면 된다.


어찌 울릉도뿐이랴. 걸으면 바람의 숨결을 느끼고 흙냄새를 맡는다. 누가 씨를 뿌리고 가꾸지 않았지만, 오가는 차량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밟혀도 꿋꿋하게 자라는 길가 들풀에서 생명력을 느낀다. 산자락 경사면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아기 폭포가 만들어내는 물길의 신선함에 마음이 맑아진다. 파란 하늘빛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평온하다.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물이 다시 모여 물줄기가 되고 도도히 흘러간다. 하늘하늘 내리는 꽃비를 맞으면 나도 꽃이 된다.


지나는 자동차에 아무 관심 없던 견공이 내가 지나가면 마구 짖어댄다. 반기는 이 하나 없는 타지에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개에게 나도 인사를 건넨다. 하천에서 두둥실 떠 있다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수면 위를 나르는 물오리에 내 눈길이 따라간다.

동네 어귀에 마실 나온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면 환하게 웃으며 반기신다. 밭에서 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농부에게 이야기를 걸면 말벗도 되어주신다. 늙어서도 생산적인 일을 하는 이 땅의 농부들에게서 참삶을 배운다. 비탈진 밭 곳곳에 널려 있는 돌을 보며 이토록 척박한 땅에서도 생명을 유지케 하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부들에게 감사한다. 걸으면 허기가 빨리 찾아온다. 밥의 소중함을 느낀다.


걸으면 보이고, 걸으면 느끼고, 걸으면 배운다. 걸으면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자연과 사람의 관계가 보이고, 걸으면 결국 사람이 보인다.

<오늘의 이모저모>


어제까지는 19일 동안 산속으로 또는 산을 끼고 오르고 내렸다. 오늘부터는 해파랑길을 따라 파란 바다를 보며 걷는다. 갯내는 없으나 탁 트인 바다는 에메랄드빛이다. 산과는 또 다른 신선함이다.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 별장, 이승만 별장 구경은 별미였다. 이곳 화진포는 육이오전쟁 전에 북측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지은 외국인 휴양소가 김일성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에 붙어 있는 기념관에는 그분의 업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미화시킴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였다.


거진항으로 들어오는 초입부터 해안 철책을 끼고 걷는다. 철책을 통해 바다를 본다. 제대로 보일 리 없다. 기암괴석 바로 앞을 철책이 가로막았다. 철조망에 내가 갇힌 것인지 저 바위가 갇힌 것인지 모르겠다. 바닷가 절경도 철책에 가려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또다시 분단의 현실이 내 몸과 마음을 옥죈다. 화진포에서 부분적으로 개방되어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화진포는 동해안 최대 석호다. 둘레만 16km에 달한다. 다른 몇몇 석호는 개발 삽질로 훼손되었지만, 다행히도 화진포는 보전이 잘 되고 있다. 낚시도 엄격히 금지한다. 너른 호수라 그런지 세찬 바람 때문인지 가슴이 뻥 뚫린다.


초도항 해변 길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가는 중년의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도 도보 여행자다. 그는 3일 일정으로 해안을 따라 걷고 있었다. 배낭이 워낙 커서 물어보니 텐트를 치고 밥도 지어 먹느라 배낭 무게가 20kg에 달한단다. 10kg도 버거운데 내 배낭의 두 배를 짊어지고 걷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모르는 이와의 대화는 늘 신선하다.

내일은 1, 2차에 걸쳐 걸어온 남해 땅끝마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830km 국토종단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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