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자자한 키건의 소설들은 내가 다니는 도서관에선 빌리려 할 때마다 대출 중이어서 늘 아쉬웠는데, 어느 날 이 책이 서가에 아직 꽂혀있는 것을 봤다. 냅다 꺼내 빌려서 서울 다녀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다 읽고 나서 곧바로 다시 처음부터 또 읽고 싶어지는 소설은 처음이었다. 소설은 1980년대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아일랜드 사람인 작가는 아일랜드 정부와 교회의 부끄러운 역사를 이 소설에 담았다. 소설 속 따뜻하고도 복잡한 내면을 가진 한 인물의 시선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다른 이를 타자화 하지 않는 마음이 진정한 연대와 변화를 가져온다는 메시지가 깊이 와닿는다.
기독교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를 직시하게 하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서, 그날 밤 이 사건에 대해 여러 기사들과 논문들을 찾아봤다. 쉽게 잠들 수 없는 기분이었다. 왜인지 얼마 전 서울 시내에서 있었던 대규모 집회가 있던 날 우울한 마음에 잠이 안 오던 밤도 떠올랐다. 예수님은 ‘네 몸을 내 몸 같이’, 즉 다름보다는 같음을 말했는데, 어떨 때 보면 교회는 ‘다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구분하기, 경계선 짓기, 울타리 치기 하느라 바쁜 그 마음 뒤에 무엇이 있는가 생각하다 보면 자못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높은 담을 쌓고, 그 위에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꽂아, 세월에 따라 더 강력해진 권력으로 ‘이곳을 벗어나지 마’, 그리고 ‘이 안에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지 마’라고 서슬 퍼렇게 외치는 소설 속 수녀원의 풍경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누군가는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 없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모른 척 하기, 권위에 편승하기, 침묵하기, 이런 수법은 나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모르게 약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의 잠 못 이루는 이런 감상은, 다른 이에 대한 비판 이전에 나를 이루는 일면에 대한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더 크다. 아직도 마음의 습관처럼, 나는 얼마나 다른 이들과 나를 구분해서 생각하는지. 나는 저 사람과 달라, 우리 아이들은 저 아이들 같지 않지, (그래서 다행이지) 이런 나와 내 가족만 아끼는 부끄러운 마음이 스스로 느껴질 때가 얼마나 잦았는지 모른다. 다만 내 말투에서 그것이 드러나지 않길, 내 심중이 표정이나 태도, 어떤 한 마디로 들켜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저 사람의 일이 ‘내 일일 수 있었다’라는 마음으로 줄곧 우울해하고, 괴로워한다. 자신과 자신의 딸들의 안위는 또 다른 이의 이유 없는 작고 사소한 친절로 인해 얻어진, 아주 희귀하고 값진 결과라는 감각이 내내 생생하다.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도 있다는 거 알잖아” 하는 아내의 말에 침울해지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과 내 아이들이 엮이는 거 너무 싫어!라는 이 정서는 오늘날 기독교의 성윤리 그 자체 아닐까.) 모르겠다, 나는 내 주변의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 내가 사는 세상에서 가끔 느껴지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어떤 불의에 대해, 그냥 감각을 뭉뚱 그리고, 일부러 정확하게 알려하지 않는다. 때론 한번 더 물어보는 것이 일을 키우는 것 같아 귀찮아하기도 잘한다. 누군가에 대해 알면, 그것에 대한 책임이 생기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하룻밤에 훌쩍 읽은 소설 한 권이 다 표현하지도 않은 채 담아낸 아픔이 너무 크고, 그것이 오늘의 나를 너무 찔러서 아프다. 이 ‘타자화 하는 마음’이란 것은 얼마나 질긴 것인지 현실이 그대로 보여준다. 소설의 배경이 된 ‘막달레나 수녀회’는 다시 반성매매단체로 이름만 바꾸어 오랜 시간 여전히 존재한다. 이름과 역할만 시대에 따라 바뀔 뿐, 사회 구성원 중 일부를 딱지 붙여 분리시키고 그들을 교화 내지 변화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불운에는 알 수 있거나 알 수 없는 이유가 있고, 그것이 ‘내 일일수도 있었다면,’ 우리는 그냥 손 잡아 줄 수는 없을까. 소설은 ‘구원’이란 용기 내어 경계를 지우고 다른 이의 손을 잡음으로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과정이라고 그린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키건은 컴컴한 현실에 아슬아슬한 소망처럼, 현실에도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결말을 맺는다. 책을 다 읽고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보면서,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짧은 소설로 세상에 큰 울림을 주는 키건도, 수녀회에 소속되어 이 세탁소로 발령 났지만 이 현실을 지옥처럼 느끼고 빠져나와 그 현실을 연극으로 만든 사람도, 영화로 만들어 세간의 이목을 끌고 교황청과 맞선 사람도, 어린 시절 이 수녀회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지만 음악으로 세상의 불의와 편견에 저항하며 많은 사람들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던 사람도 그런 사람이다. 말과 행동들, 그 이전에 너무나도 사소한 망설임과 미약한 호의와 친절, 대로 말고 샛길로 들어설 수 있는 용기도 강할 수 있다.
키건의 훌륭한 스토리 텔링에 경외감과 존경심이 드는 책이었다. 아픈 지난 역사를, 그리고 어쩌면 현재에도 건재한 실체가 존재함에도 자신의 가치 있다 믿는 바를 꾹꾹 눌러 담은 용기에도. 책 말미에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소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이 독서의 참 소중한 지점이다. 작가는 소설을 왜 쓰는지, 그리고 소설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한 수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