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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도니뇨 Nov 07. 2024

혼란('23.08)

대학을 졸업하며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의 한 도시에서 20년을 살았던 이에게 서울의 겨울은 낯설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바라고 또 바라던 상경이었기에 이 정도 추위는 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창원에서부터 챙겨 온 짐들을 앞으로 머물 곳에 정리합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부모님은 학교를 한번 가보자고 하십니다. 아들 녀석이 다닐 학교를 한번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서울의 많은 학교들은 논술고사나 대학 탐방을 이유로 가 본 적이 있지만 이 학교는 처음이라 낯설었습니다. 정문의 위치도 모르고 제가 다닐 과의 위치도 잘 모릅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찾아갑니다. 또 크게 한 바퀴 둘러보며 학교가 전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구경해 봅니다. 개강을 아직 하지 않았기에 학생들은 거의 없습니다. 2016년 2월 마지막 주 우리 가족은 그렇게 처음 한양대학교 교정을 걸으며 앞으로의 제 서울 생활이 순탄하길 기원했습니다.

 7년 6개월이 지났습니다. 여름은 남부 지방이고 중부 지방이고 가리지 않고 무덥습니다. 행여나 너무 더운 날씨에 부모님께서 고생하실까 봐 졸업식을 꼭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먼 길 오셔서 무더위에서 고생하시면 어쩌나 하는 나름의 효심입니다. 하지만 한 번뿐인 졸업식이고, 더 먼 미래에 부모님께 안 오셔도 된다고 한 그 순간을 후회할까 봐 오겠다고 하십니다. 먼 미래에 제가 후회를 할 수도 있다는 말씀에 더 이상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역시 열 자식 한 부모 섬기기 어렵습니다. 한 수 앞을 내다 봄에 뿌듯해하는 자식이지만 열 수 앞을 내다보시는 부모님이십니다. 그렇게 부모님과 저는 오랜만에 함께 학교를 향했습니다. 잠시 학위복과 학사모를 받으러 간 사이에 꽃다발도 사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만류할 것을 아시기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 오십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것을 뭐 하러 사셨냐고 안 사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좋은 날인만큼 웃으며 감사하다고 합니다.

 졸업할 때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되려 속 편할 것 같았습니다. 친한 동기들은 이미 졸업하고 한껏 여유를 부리다 하는 느지막한 졸업이기 때문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정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졸업식을 하는 동안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대학 과정은 끊임없는 적응기였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쓰던 언어들은 수능 과목에 국한된 것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많이 까먹었지만 당시 제 머릿속의 단어들은 수능을 위한 언어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경제학을 만나게 되었고 한 번도 공부해 본 적이 없는 과목이라 참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마치 축구 선수들이 이적을 통해 다른 리그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데 적응을 하지 못해서 어려워하는 모습과 유사했습니다. 경제학에서 쓰는 용어들은 낯설었고 이질적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적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상경을 이루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다는 이유로 겉돌았습니다. 경제학에 영 흥미를 붙이지 못하였고 서울의 양지(陽地)만 생각했던 제게 음지(陰地)는 저로 하여금 커다란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어둠이 있기에 빛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자의 방황은 공허했고 어지러웠으며 외로웠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학교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였던 시기도 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뒤 이제는 정말 열심히 잘 해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즈음 글 나누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때의 편지를 보면 잘 해보려고 하는 의지도 있지만 어려워하고 고민하는 제가 있습니다. 진로를 정하기 위해 다양한 공부를 하였고 또 다양한 경험도 했습니다.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외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휴학도 했습니다. 학원비를 위해 야간 아르바이트도 해보았고 의류 매장에서 다양한 손님들을 응대해 보았습니다. 수험생활도 해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는 일을 다니며 마지막 학기를 다녔습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던 대학 생활. 처절한 고민의 장소였고 푸르른 낭만의 광장이었습니다. 스쳐가는 기억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렇게 졸업했습니다.

 

 지난 몇 달간 새로운 세상을 나가고자 하는데 ‘줄탁동시’가 잘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1월부터 실습생으로,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회사의 공채에 합격하여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안도와 감사, 다행 그리고 아쉬움과 같은 감정들이 찾아옵니다. 그중에는 걱정도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바로 출근하게 되었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이제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졸업이나 방학 없이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 대학에 갔을 때 느꼈던 어려움과 혼란스러움을 직장을 시작하고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들여다본다면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고 약간 다른 종류의 일을 하게 된 것도 이런 감정들의 원인입니다. 물에 빠진 녀석 건져 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던 옛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했었는데 이제는 기왕이면 희망하는 직무의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욕심부리는 것이 사실 조금은 부끄럽지만 역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새로운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기 위해 열심입니다. 알려주시는 것들을 잘 흡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들을 보다 구체화하고 몰랐던 것들은 새로 배우며 낯선 언어들에 적응하고 있습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당장 앞에 놓인 것들을 등한시할 만큼 책임감이 없는 녀석은 아니라 참 다행입니다. 그거 조금 신경 썼다고 저녁이 되니 기진맥진합니다. 피곤하고 지친 저녁, 원래라면 체육관을 갈 시간입니다. 그러다 문득 오늘 하루 운동을 제끼고(?) 친구와 ‘치맥’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힘든 하루에 힘든 운동도 의미 있지만 좋아하는 친구와 좋아하는 치맥이라면 호(好)와 호(好)가 만나 호호하며 웃는 저녁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걸음에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라틴화된 일상, 철저한 계획의 이행을 미덕으로 삼는 자의 일탈은 약간은 두려우나 호호 웃을 순간을 상상합니다. 딱 기분 좋은 맥주 두 잔의 기운을 머금고 택시를 탑니다. 눈앞의 택시에는 ‘빈차’ 등이 꺼져 있습니다. 크게 좌회전하는 택시를 타고 출발합니다. “저 차 왜 안 탔어요?” 당황했습니다. 제가 가는 목적지가 기사님이 가시고 싶었던 방향이 아니었나 보다 하며 말씀드립니다. “‘빈 차’등이 꺼져 있더라고요.” 사실 전달을 통해 제 의지가 아니었음을 피력합니다. “그래요? 이게 참 인연이라는 것은 억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저희가 만날 인연이었나 봐요.” 뜻밖의 말씀에 당황했습니다. “아, 기사님 말씀은 제가 앞에 있던 택시를 안 탄 것이 저희가 만날 인연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이런 것은 억지로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예상치 못한 답변의 연속입니다. 저의 탑승이 만족스럽지 않으신 줄 알았는데 오늘의 탑승이 우리가 인연이라고 하시니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의 놀람을 아셨는지 덧붙이십니다. “그러니 억지로 무언가 하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어요. 그저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되게 놀랐습니다. 가끔 유명한 분들의 인터뷰 등에서 그들이 한창 무언가를 고민할 때 천사처럼 누군가 나타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주고 갔다는 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고민을 하는 줄 알고 그것에 대한 답변을 준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방송에서 거짓말을 하면 어떡하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사님께서는 제가 요즘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홀린 듯 제 고민을 간단하게 말씀드려 봅니다. 젊은 청년의 고민이 안타까운 듯 말씀하십니다. “괜찮아요. 첫 술에 배부르겠어요? 지금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해 봐요. 그럼 분명 또 다른 기회가 올 거예요.” 눈을 껌뻑이며 경청합니다. “물론 지금은 아쉽고 속상할 수 있죠. 그렇지만 또 모르죠? 그 일이 너무 잘 맞을 수도 있잖아요.” 아주 몰랐던 이야기는 아닙니다. 매 순간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와는 맞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 너무 잘 맞을 수도 있고 정말 저에게 딱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잘 알면서 당장 성에 차지 않아 아쉬워하고 고민하고 기뻐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문을 닫으며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 기사님께 너무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네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혼란을 겪고 싶지 않다는 진심을 누군가 들었던 것일까요? 방황한 제21살을 누군가 가엾이 여겼던 것일까요? 고민이 많아 보이는 젊은이의 표정을 읽으신 걸까요? 먹구름 잔뜩 낀 하늘에 이따금씩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있습니다. 좁은 틈을 비집고 헤어 나오는 햇빛에서 희망을 봅니다. 먹구름이 물러가고 맑은 하늘이 올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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