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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025년 다이어리

순간 예찬 일기

by 황태


다이어리를 매년 산다. 하지만 끝까지 다이어리를 써본 적은 잘 없다. 그래도 2024년은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면서 다이어리를 잘 썼어서 꼭 사고 싶었다. 다이어리를 쓰면서 일하면 왠지 알차게 하루를 보내는 느낌이 든다.

사실 회사에서 주는 다이어리를 사용하면 되지만 귀여움도 없고 정도 없는 무뚝뚝한 종이에 다이어리를 쓰기는 싫었다. 까다롭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쓰고 싶지 않아 진다. 소비의 이유는 다양하다.


2024년에 쓴 다이어리

점심시간에 영풍문고로 다이어리를 구경하러 갔다. 각양각색의 다이어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가가 올라서인지 아니면 다이어리 수요가 많은 연말이어서인지 가격이 무시무시했다. 이렇게까지 비싸게 주고 사고 싶지는 않았다. 비싸게 산다고 해서 소중히 다뤄지는 것은 아니다.

영풍문고에서 나와 다이소로 갔다. 다이소 다이어리는 마음에 꼭 드는 게 없고 종이의 질감이나 구성이 별로였다. 2025년을 마음에 들지 않는 다이어리로 살아내기 싫었다.


일보 후퇴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퇴근하기 30분 전쯤 업무를 마무리하고 핸드폰을 보다가 문득 테무에서 다이어리를 사면 싸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테무 앱에서는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가 4천 원가량으로 저렴했다. 다이어리를 담은 김에 최소주문금액을 맞출 겸 이것저것 둘러보다 보니 다이어리 말고도 필요한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난장판인 화장대를 정리할 화장대 정리함, 멀티탭에 꽂힌 충전기 등으로 어지러운 침대 선반을 정리할 전선 정리함, 요즘 유행이고 따뜻해 보이는 회색 타이즈. 정신 차리고 나니 장바구니에 4만 원가량이 담겨있었다. 비싸지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가계부에 4만 원의 지출을 작성할 생각을 하니 너무 싫었다. 연말이고 생일이라 지출이 컸었는데, 또 하나의 지출을 적어야 한다니. 가계부는 지출이 많으면 재미가 없어지는 법이다. 이미 용돈이 동났다면 지출내역을 추가로 적어봤자가 아닌가. 그래서 과감히 테무 앱을 삭제했다. 깨끗하게 살아갈 생각에 신났던 나여서 조금 상심했지만 그대로 퇴근했다.

(놀랍게도 원래 사려했던 2025년 다이어리는 까맣게 잊은 채 어떻게 깨끗하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소비의 굴레란 이런 법인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작은 방은 손님용 침대, 침대 하단의 큰 서랍장, 화장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 안 쓰는 방이어서 침대 밑 서랍장에 이것저것 다 때려 넣었다. 예를 들어 버리기 아까운 화장품 견본품들, 언젠가 쓸지 모를 삼각대, 튜브 등 다양했다.

일단 화장대 서랍과 침대 밑 서랍을 열었다. 모아만 놓고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견본품들을 싹 버렸고, 혹시 쓸모 있을까 모아놓은 더스트 백, 상자 등도 버렸다. 던지듯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편지들도 싹 모아서 한 군데 정리했다. 그동안 사용하지 못하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이 상당했다. 다 버리고 나니 종량제봉투 20L 2개가 꽉 찼다. 물건이 많은 만큼 손이 많이 간다. 나를 위해 사는 것들인데 내가 힘이 든다.


서랍 안을 싹 비우고 갓 이사 온 듯한 처음의 상태로 만들어 두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그리고 이 사태를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리를 하며 3단 하얀색 서랍장과 라탄 정리함이 나왔다.

필요했던 하얀색 화장품 정리함과, 침대 위 전선들을 정리할 라탄 정리함이 나온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동안 집을 치우겠다고 선언할 때마다 사들인 정리함이 서랍 안에 묵혀있었다니.


나는 미니멀리스트는 절대 아니다. 내 옷장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는 게 어떤 기분일지는 살짝 체험했다. 미련 없이 버리고 비웠더니 그만큼 나를 얽매는 구속이 사라졌다. 치우고 관리해야 할 책임감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이 모든 사건이 2025 다이어리를 사려다가 일어난 일이라는 게 우습지만 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2025년 다이어리가 내게 준 신년 목표는 비움이다. 가볍게 살아가 봐야지. 내일은 옷장을 정리해 볼까.


미련 없이 버리고 비웠더니
그만큼 나를 얽매는 구속이 사라졌다.


어제 이 작은 소동 끝에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필사했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상황에 맞는 문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울림으로 다가왔다. 중국의 시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있었다. 지금 내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을 더하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내 모습과 겹쳐졌다.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지금 내 상황에 만족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을 더 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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