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러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가서는, 무거운 마음으로 쉽사리 극장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날이 아직 생생하다. 나는 예술로 돈을 버는 프로 예술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창작을 나의 삶의 숙명으로 여긴다.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고, 또 아직 실력이 부족하지만 그림도 그린다. 누군가 나에게 왜 나의 시간을 창작에 할애하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이것이 나의 방어기제라고 답할 것이다. 삶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특히 부정적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것이 나의 기쁨이라고 할 것이다. 하는 그 과정자체가 재미있고, 완성이 되었을 때 뿌듯하다고. 그런데 사실 늘 기쁘지만은 않다. 부정적 감정을 승화하려고 한다고는 하지만, 그러기는 커녕 지지부진한 진행이나 실망스러운 완성도에 도리어 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창작을 하는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상위 1%가 아니라 하더라도, 꼭 프로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게 늘 나에게 행복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세상엔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있다. 대답하는 동기들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은 말로 다 설명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본인 스스로 정확히 어떤 동기인지, 어떤 마음인지 이를 언어의 차원으로 끌고 오기 버거울 때가 있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룩백>이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인 설명은 아니다. 누군가는 마치 필연인 듯이 사업을 한다. 누군가는 마치 필연인 듯이 과학에 빠져든다. 그렇듯 누군가는 마치 필연인 듯이 예술과 창작에 빠져든다. 어쩌면 그게 다다. 사실 후지노가 만화를 그리는 것에는 별 거창한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성 좋고 인기도 많고, 다양한 재능을 가진 그녀이지만, 정작 자신의 재능의 의심스러운 면을 포착해도 그림 그리는 펜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잠시 놓았다가도 결국 다시 잡는다.
쿄모토 역시 마찬가지이다. 둘은 만화에서 타고난 재능의 영역도 다르고,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창작에 대해 느끼는 마음만큼은 공유한다. 쿄모토는 후지노와는 달리 미술 외 영역에서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고, 특히 사회성에 있어서는 난항을 겪는 인물이다. 하지만 작화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삶은 자신과 세상의 다른 부분들이 온통 울퉁불퉁하게 느껴지더라도, 그림을 그리는 것과 소중한 관계(이는 다음 리뷰에서 다루겠다)만으로도 꽤 지탱할만한 것이 된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윌의 대사가 생각이 난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피아노를 보면 치고 싶을 것이고, 음악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수학문제에서는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쿄모토는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고, 후지노는 힘든 시간을 보낸 이후에도 다시 만화를 그린다. 사실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지나면 예술에서 손을 떼는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창작은 우리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이고, 다른 가치들을 만끽하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생의 한 부분을 창작에 몰두해 본 사람들은 <룩백>에서 보여지는 예술에 대한 애증, 그럼에도 놓지 못하게 하는 숙명 같은 느낌을 느껴봤으리라 생각한다. 때론 어떤 논리적인 설명보다도 ‘그냥’이라는 대답이 가장 진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