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경력이라면 경력이지

시간을 뜨며 이어온 날들

by 헤레이스

중학교 2학년 때, 실기 평가로 뜨개 필통을 만들던 기억이 난다. 바늘과 실을 쥐고 한 코 한 코 잡아가던 그 시간. 손끝에서 나오는 색색의 실들이 괜히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완성된 필통은 그 시절 나에게 작지만 분명한 기쁨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실을 처음 만난 건 그때가 아니었다. 어릴 적, 엄마는 뜨개옷을 많이 만들어주셨다. 다양한 뜨개실들과 항상 가지고 있던 싸디싼 대바늘.

그 중에 보리 무늬가 들어간 노란색 스웨터 하나가 아직도 기억난다. 쨍하고 예쁜 노란색이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이거 정말 예쁘다” 하시며 작아지면 딸 입히고 싶다며 농담처럼 달라고 하셨고, 엄마는 졸업할 때 정말 그 스웨터를 드렸다. 아끼던 옷이었지만 그만큼 자랑하고 싶었던 옷이었다. 엄마의 손끝에서 나온 옷을 입고 자란 나는 아마 그때부터 이미 실과 함께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른이 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어느 날 자연스레 뜨개를 하는 동네 언니를 만났다.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어서 그 때 생겼던 네이버 뜨개 카페에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처음엔 눈팅만 하다가 용기 내어 댓글 하나를 남기고, 사진 하나를 올리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건넸다.


그러다 ‘함뜨’(함께 뜨개)를 했다. 각자 다른 집에서 같은 도안을 보며 같은 코를 잡고 같은 블랭킷을 떠나갔다. 누군가는 아이를 재워놓고 밤에 떴고, 누군가는 출근 전 아침 시간에 떴고, 나는 내 자리에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코를 늘려갔다. 화면 속 이름뿐이던 사람들이 점점 익숙해졌다. 사진 속 블랭킷이 자라나는 만큼 우리의 인연도 자라났다.

한 장 한 장 모티브가 이어지듯 대화가 이어지고, 격려가 이어지고, 일상이 이어졌다. 그 블랭킷 함뜨를 시작으로 언니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뜨개를 다시 만나면서부터 그 시간은 나에게 분명한 힐링타임이 되었다. 누군가를 돌보는 시간도, 해야 할 일도 잠시 내려두고 오롯이 나의 손과 마음만 남는 시간.





억지스러워도 내 손뜨개 경력은 내 마음대로 30년이다. 지금은 옷, 블랭킷, 인형, 모자, 가방… 실과 바늘만 있다면 어렵지 않다. 어릴 적 사진 속에서 내가 입고 있던 뜨개옷을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입히고 있다. 엄마의 손에서 시작된 실, 아니 시간을 내가 다시 이어가고 있다면, 그렇다면. 이것도 경력이라면 경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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