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자는 아이
나한테 ‘역마살’이란 것이 있을까? 태어나고 결혼하기까지 꽤 번잡한 곳에서 살았고, 결혼을 하고 어느 지방에서 6년, 그리고 2년 전, 큰 딸 5살, 작은 아들 3살에 ○○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이사를 올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착 장난감을 모조리 가져왔다. 아이들에게 전에 살던 곳과 비슷한 환경을 마련해 주어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큰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 “엄마, 여기도 우리 집 맞아?”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새로운 도시, 낯선 환경에 차츰 적응해 나갔다.
몇 개월 후, 나는 전보다 건강해지고 아이들과 함께 제법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들은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구체적인 의사 표현을 못 하는 아들의 생각과 마음을 도무지 알 리가 없어 답답했다.
며칠이 지나도 아들의 밤 울음은 매일 반복이 되었다.
“도영(가명)아, 어제 무서운 꿈을 꿔서 잠이 들면 무서운 거야? 어제 꿈에 누가 나타났어?”
아들은 온갖 사나운 맹수들을 짧은 단어로 나열해 말하였다. 나는 그저 꿈일 뿐이라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아들을 달래 주었다. 보통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무서운 꿈을 꾸면서 그렇게 한 뼘씩 성장하는 거라고, 큰 아이의 경험을 빌어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들의 밤 울음은 밤 12시가 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그럴 때 남편은, 다음 날 출근 걱정에 아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나는 남편에게 아이가 무언가 두려움과 불안감에 울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화를 내는 남편을 말렸다.
이런 날들이 계속되자, 결국 나는 택시를 타고 아들과 함께 심리 상담 센터에 찾아갔다. 상담을 해보니
지금 아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경험을 밤에 자는 것으로 간접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공포’라고 하셨다. 그럴수록 아이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지금은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달래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남의 말은 옳다구나 듣고 내 말을 듣지 않는 남편에게는 어떻게 할까요?라는 말에 상담하시는 분은 친절하게 자신의 소견을 음성으로 남겨 주셨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다행히 안정을 찾은 아들은 밤에 울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들은 밤이 되면 더 말똥 해진 눈으로 실컷 놀기 시작해 엄마와 책 읽기를 끝으로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들었다. 아들이 그럴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보살이 되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들에게 빽빽 소리를 지르며 강퍅하게 굴기도 했다. 아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날이면, 아들한테 못된 엄마가 된 것 같아 자괴감에 빠져 괴로웠다.
결혼식 때, 당시 5살이었던 조카가 풀 메이크업을 하고 드레스를 입은 나를 보며 공주님 같다고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헝클어져 기름진 머리, 항상 졸린 듯 퀭한 눈을 하고 늘 피곤한 일상에 찌들어 있는 공주는커녕 시녀, 무수리쯤 보이는 한 여자가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생활이 더는 반복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동네에 있는 아동 센터에 찾아갔다. 아들이 밤에 잠을 못 자는 건, 보통의 남자아이들과 다른 기질에서 이유가 있었다. 하긴 아들은 처음 입을 떼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 아빠, 누나 이후 말을 한 것이 ‘꽃’이었다.
4월, 벚꽃이 흐드러지게 흩날리던 날에 태어난 아들은 따듯한 봄 햇살을 품고 나에게 왔다.
유독 꽃을 좋아하여 길을 가다가도 활짝 핀 꽃을 한참을 보기도 했던 아들이었다. 또한 감성이 풍부한 탓에 창문 너머 새 한 마리가 가로등에 있는 것을 보고는 “엄마, 저기 새는 친구가 없어서 슬프겠다.”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또 한 번은 아들이 좋아하는 상어를 보러 아쿠아리움에 간 적이 있었다. 엄마 이름은 몰라도 상어 이름을 줄줄 외우는 아들이었다. 그렇게 상어를 한참 보고 좋아할 줄 알았던 아들은
“상어야, 미안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깊은 바다에 살아야 할 상어가 우리 때문에 밖으로 나와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또 어떤 날은 ‘애국가’를 듣고 슬프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아들을 보며 나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독거려 주었다.
센터 원장님께서는 또래 남자아이들에 비해 활동량이 많이 적은 감성적인 아이의 기질 때문에 에너지 소진이 안 되어 잠을 못 자는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얌전한 아들을 기질을 인정하며 신체적으로 놀아 주는 것보다, 그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주었을 뿐인데... 늘 기운이 없고, 피곤함에 찌든 힘든 일상에 그것밖에 못 해주는 못난 엄마가 된 것 같은 자책감에 후회가 밀려왔다.
그 이후 아들은 센터에 다니면서 놀이치료를 하며 신체적인 활동량을 늘려갔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 키즈카페에서도 소꿉놀이만 했던 아들은 제법 대범해져서 몸을 구르며 신나게 놀았다. 그렇지만 밤에 신나게 놀고 지쳐 새벽에 자는 것은 여전했다. 잠을 재우려 밤에 불을 다 꺼 놓거나, 내가 먼저 잠자리에 누울 때면 아들은 깜깜한 밤을 무서워하며 울기 시작하여 평소보다 더 늦게 자곤 했다.
시간은 흘러 겨울이 되었다. 큰애는 재롱잔치 연습을 한다고 몸을 펭귄처럼 뒤뚱뒤뚱 움직이며 율동을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도영이는 똑바로 서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였다. 재롱잔치 하루 전에도 계속 서 있기만 한다고... 순간, 나는 마음속에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어린 아들을 이해하려 해도 아이의 실패가 나를 주저앉게 만드는 것 같은, 절망 같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다음 날, 나는 아들의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하였다. 항상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이를, 재롱잔치에서 마저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는 그 아이를 차마 볼 수가 없으니, 무대에 오르지 않게 해달라고...
그 당시에 나는 나약하고 나를 지탱하는 자존감마저 바닥난 엄마였다. 좀 지나서 어린이집 원장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 시기에 아이들은 무대 경험이 중요하다며 다 함께 하는 행사에 도영이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충분히 알아듣고 수긍하였다.
<나팔꽃을 들고 있는, 아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의 재롱잔치 날이다. 나는 긴장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를 지켜보았다. 작년에 허수아비처럼 꼿꼿하게 서 있었던 아들은 제법 신나는 노래에 몸을 흔들며 동작을 제법 잘 따라 하며 흥겹게 춤을 추며 즐기는 아들을 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발표회가 끝나고 나는 아들을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어린이집 원장선생님, 아들의 담임 선생님께
고생했다고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새벽이다. 아들보다 먼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아들은 나에게 다가와 입을 맞춘다.
아들은 상어 장난감과 놀고 나서 나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말한다.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떠 책을 펼친다.
아들과 잠들기 전, 잠자리에 누울 때면 가끔 아들에게 툭 던지는 말이 있다.
“도영아, 이 담에 크면 엄마 집 사줘야 해. 알았지?”라는 농담에 아들은 “응. 사줄게”
짧은 그 한마디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나는 아들과 함께 눈을 감고 잠이 든다.
요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티쉬바인 〈안느 폴린 뒤포르-페랑스와 그녀의 아들 장 마르 알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