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993

0K의 문

by 임월

체온을 진공 상태로 비운 공간. 거리와 거리 사이로 흐르는 불빛들이 유리를 녹이고, 강철을 부식시킨다. 십 년간 이 도시의 벽과 벽 사이를 채우는 것은 공허다.


가로등 아래 쌓이는 먼지. 녹슨 파이프가 뱉어버린 물방울. 지하철 레일을 따라 흐르는 진동이 이 도시의 뼈대를 흔든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은 우리가 잃어버린 순간들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흐르는 전류 속에서 누군가의 심장이 깨어난다. 수도관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벽을 울리고, 그 울림이 귓속을 채운다. 모든 소리는 결정이 되어 공기 중에 부유한다.


마지막 지하철이 남긴 진동이 아직도 철로를 따라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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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이제 준비됐어?”


목소리가 공중에서 결정화된다. 웃음소리가 유리구슬이 되어 사방으로 굴러간다. 방 안의 온도는 영하와 영상을 오간다. 손가락 마디는 얼음이 되고, 혈관 속 피는 동결점을 지나 새로운 물질이 된다.


도시의 체온이 증발하는 동안 벽에 기대선 형체가 투명해진다. 거리의 색채가 윤곽을 지워내고, 건물 숲을 스치는 빛이 존재를 부정한다. 체온이 머물던 자리에 진공이 생겨난다.


열도 냉기도 없는 절대 영도의 공간이 흔적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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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우리는 시간을 잃었다. 시간이 우리를 포기했다. 벽시계는 열두 바퀴를 돌았지만 태양은 여전히 지평선에 걸려있다. 십 년의 황혼이 이어진다.


수천 번의 일몰이 한순간에 중첩된다. 그림자는 지평선을 뚫고 우주로 뻗어나간다. 하늘에서는 빛이 피가 되어 흐른다. 누군가의 상처가 된 석양이 거리를 덮는다.


모든 창문이 피부가 되어 들이쉬고 내쉰다. 유리와 강철로 만들어진 표피는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우리를 삼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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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변화가 시작될 거야.”


말은 수은이 되어 흘러내린다. 천 번, 만 번 들어온 말이다. 의미를 잃은 소리의 나열. 중력을 거스른 물방울들이 천장으로 기어오르고, 시곗바늘은 역회전을 시작한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비가 아니다. 천 개의 심장이 각자의 박자로 뛰는 소리다. 불협화음의 교향곡이 도시를 채우고, 유리창 너머로는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것들이 움직인다.


걸어가지만 제자리에 멈춰있고, 말하지만 영원한 침묵 속에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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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에서 방향을 잃었다. 좌표도, 거리도, 의미도 사라진 미로다. 지도는 스스로를 지우고, 거리의 이름은 증발하며, 건물의 숫자는 녹아내린다. 표지판은 검게 부식된다.


영원한 가능성을 믿는다 했다. 발걸음은 완벽한 원을 그린다. 행성의 궤도다. 무한하고 무의미한 원. 우리는 이 원을 따라 걸으며 시간을 소비한다.


시간이 우리를 소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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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변형된다. 콘크리트가 세포분열을 시작하고, 균열은 자라나 신경이 된다. 땅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간판이 명멸할 때마다 시간의 결정이 떨어진다.


부서진 시계의 부품들이 거리를 덮는다. 우리는 이 파편을 밟으며 걷는다. 발바닥이 베어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상처는 있으되 고통은 없다.


감각은 남았으나 느낌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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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가 있을까?”


답은 불필요하다. 이곳에는 순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어떤 순간도 실재하지 않는다. 시계는 움직이나 시간은 멈췄다.


우리는 존재와 부재의 경계에 서있다. 실체 없는 그림자가 되어 벽을 기어오른다. 끝을 모르는 벽을 오르다 보면 시간의 외부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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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공은 도시를 흡수한다. 빛과 어둠이 와류를 만든다. 시간이 해체되는 소리가 귓속을 채운다. 금속성 진동이 뼈를 울린다.


모든 것이 투명해진다. 의미를 찾으려던 시도는 허공으로 증발한다. 존재하지 않는 목적지를 찾아 헤매는 뒷모습이 가려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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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음절이 공기를 절단한다. 망설임이 공간을 채운다. 절벽 끝의 균형. 발걸음이 틀어진다.


존재가 어둠과 하나가 된다. 거리는 침묵한다. 유리 파편이 도시의 불빛을 반사한다. 일시적인 별들이 생성되고 소멸한다.


시간의 흐름과 정지가 구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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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리에서 도시의 소리를 듣는다. 체온을 잃어가는 존재의 울음이다. 기억을 지우는 바람이 분다. 깨달음이 찾아온다.


변화는 선물이 아니다. 스스로 새기는 흔적이다. 어디도 아닌 곳에서 또 다른 어디도 아닌 곳으로. 그것이 우리의 궤도라면, 그 궤도 위에 각자의 흔적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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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는다. 기억 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눈을 떠. 이제 준비됐어?”


눈을 뜬다. 도시는 여전히 어둡다. 어둠은 이제 다른 색이다. 당신의 체온이 묻어있는 색.


첫걸음을 내딛는다. 방향은 중요하지 않다.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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