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결된 진심의 지도
거리에 내린 첫눈은 더러운 것들을 덮는다. 발자국도, 쓰레기도, 사과하지 않은 말들도. 덮는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얼었던 말들도 녹아내릴 것이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돌아간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것이 변하는 건 아니다. 낡은 시계의 문자판처럼 바래가는 것들.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잘못을 사과하는 마음. 용서를 구하는 겸손함. 당연했던 것들이 희귀해졌다.
어제는 누군가 내 발을 밟았다. 아팠지만 사과는 없었다. 황급히 사라지는 뒷모습만 남았다. 모른 척도 익숙해졌다. 불편함도 이제는 일상이다. 사과의 빈자리가 커질수록 거리는 좁아진다. 서로 스치지만 만나지 않는 삶.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잠깐만요." 낯선 목소리에 돌아봤다. 모르는 사람이 내 지갑을 들고 있었다. 떨어뜨린 것도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이상했다. 그의 친절함보다 내 당혹감이 더 컸다. 당연한 것들이 특별해진 세상. 작은 호의에도 의심부터 든다. 진짜 친절함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지.
사람들은 점점 두꺼운 외투를 입는다. 추위를 막기 위해서라지만, 어쩌면 서로를 막기 위해서 인지도 모른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과하지 않기 위해 입는 보호색. 모두가 완벽한 척 단단해진다.
어릴 때의 사과는 쉬웠다. 친구의 크레파스를 부러뜨리면 "미안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용서도 빨랐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이미 함께 뛰어놀았다. 언제부터 사과가 어려워졌을까. 성장은 단순함의 상실이었나. 복잡해진 관계만큼 사과의 무게도 커졌다.
정치인의 고개 숙임을 봤다. 텔레비전 속에서 "송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진심은 보이지 않았다. 말은 있지만 책임은 없는 사과. 진실은 없고 연기만 남은 사과. 그런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과도 기술이 되었다. 최소한의 양보로 최대한의 용서를 얻기 위한 전략.
오늘 아침, 거울 속 내 모습이 변했다. 투명해진 피부 너머로 다른 세계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게 원래대로였다.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세계. 사과가 미덕인 세계. 거울에 손을 뻗었지만 차가운 표면만 느껴졌다. 저쪽으로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시의 골목에 사과 수집가가 산다는 소문이 있다. 말하지 못한 사과들, 듣지 못한 사과들, 거절된 사과들을 모아 유리병에 보관한다고 한다. 밤이면 그 병들이 별처럼 빛난다는 이야기. 누구도 그를 본 적 없지만 모두가 그 존재를 믿는다. 이 차가운 세상에 누군가는 우리의 사과를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집단적 소망.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 어딘가로 향한다. 출발과 도착 사이에 수많은 만남과 이별, 실수와 사과, 상처와 용서가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 녹지 않을 것 같은 얼음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가 겹치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다. 기억은 끊임없이 현재를 침범한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과거의 그림자가 내 앞에 쌓인다. 말하지 못한 사과들이 눈처럼 쌓여 길을 만든다. 그 길 위에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겨울이 끝나도 마음속 겨울은 끝나지 않는다.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얼음이 있다. 시간은 흐르는데 우리는 제자리에 멈춰 있다. 말하지 못한 사과들이 얼음처럼 단단해진다. 이 얼음을 깨는 방법은 없을까. 말 한마디가 빙하를 녹이는 순간이 올까.
당연한 것들의 겨울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계절은 돌아오게 되어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눈이 마주칠 것이다. 잠시 멈춰 서서, 상대의 눈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입을 열 것이다. "미안합니다." 그 한마디가 다시 당연해지는 날까지, 우리는 각자의 겨울을 견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