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독재, 바로크의 눈물
CEO를 위한 주역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들어가 뉴스피드를 살피는데,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이 하나 뜬다. 16~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 전시를 알리는 그림이다. 고풍스러운 유화의 한 부분이다.
전시 제목을 확인하니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이다. 페이스북에 뜬 ‘얼굴’은 바로크의 거장 카라바조의 〈도마뱀에 물린 소년〉의 얼굴이다. 카라바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동급으로 쳐주는 화가다.
뉴스피드를 내리던 손동작을 멈추고, 도마뱀의 입질에 과도하리만큼 놀란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크가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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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어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찌그러진 진주’가 등장한다. ‘바로크’는 그중 ‘찌그러진’이란 형용사다. 바로크가 르네상스 이후 한 시대를 석권하고, 대표 주자인 카라바조는 르네상스의 거장인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동급인데, 어째서 시대에 대한 형용은 ‘찌그러진’일까.
악의가 느껴진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의도가 숨었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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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독재’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용어까지 만들어 가며 예술사를 판단할 건 아니지만, 바로크에 대한 악의와 불쌍하게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학창 시절에 우리는 모두 외웠다.
중세는 암흑, 르네상스는 빛이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다. 어떻게 한 시대가 ‘빛’이 되고, 한 시대는 ‘암흑’이 되나. 그건 고대 그리스·로마에 대한 ‘묻지 마 찬양’과 그리스·로마를 절대선으로 치던 르네상스(또는 르네상스를 추앙한 예술사가들)의 오만으로만 설명되는 시대구분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
르네상스가 업그레이드된 ‘절대선’으로 거듭나는 순간, 르네상스의 전과 후는 다 후진 시절이 됐다. 그렇게, 르네상스를 앞선 중세는 ‘암흑’이, 르네상스를 이은 바로크는 ‘찌그러진’ 시대가 됐다.
그런데 르네상스는 과연 절대선일까.
르네상스의 합리적이고 반듯하며 안정된 색감의 회화와 바로크의 격정적이고 불분명한 윤곽과 거친 색감의 회화는 우열을 가릴 대상들이 아니라, 경쟁의 주체들이다.
너무 진지해졌다.
예술사가는 아니지만 이 정도 얘기쯤은 양해해 주시기를, 너그러이 넘겨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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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장르를 훌쩍 넘어, 요즘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자. ‘르네상스’는 역사의 한 시대일 뿐이었는데, 어느 순간 지존의 시절로 등극하면서 다른 시대들을 뭉개고 말았다.
우리 곁에선 혹시 그런 일이 없을까.
아무도 기원을 모르는 ‘절대 기준’이 우리가 속한 조직을 망치고 있진 않을까. 그 기준에 따라, ‘역량 없는 인재’들과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과 ‘효율 떨어지는 관리 방식’이 분류되고 배제돼 사무실 한 구석에서 잠잠한 건 아닐까.
르네상스의 독재 탓에 중세가 암흑으로 전락하고, 바로크가 찌그러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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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르네상스와 바로크 얘기를 하다 보니, 먼 옛날 동아시아의 《주역》 얘기가 사족처럼 느껴지게 되고 말았는데, 짧게 몇 마디 붙이고 끝내야겠다.
주역엔 절대 기준 같은 게 없다.
주역의 64개 기호, 384개의 메시지는 저마다 자유롭게, 제 자리에서 제 할 말을 한다. 인간의 합리에 대한 자신감으로 충만한 나머지, 자신과 다른 건 무엇이든 인정하지 않고 자르거나 늘리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주역엔 없다.
르네상스의 독재도, 바로크의 우울도 주역 체계엔 없다.
흘러가는 세월을 관망하듯, 주역이 품은 수많은 메시지를 관조하고 있으면, 부당한 이유로 구석에 내몰린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로부터 새로운 에너지가 신생한다.
강렬한 생명력으로 르네상스를 압도하는 카라바조의 그림들처럼…….
한가한 날 하루 골라,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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