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이 허물어진 자리에서
CEO를 위한 주역
사랑을 분류할 수 있을까. 에바 일루즈라는 프랑스 사회학자가 사랑을, 그것도 ‘낭만적 사랑’을 학문적으로 분석한단 얘기를 듣고 놀랐다.
그게 돼?
온라인 서점에서 그의 책을 하나 주문해 놓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에바 일루즈를 다룬 짧은 아티클을 하나 찾아 읽었다. 에바 일루즈 외에, 앤소니 기든스,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읽으면서 놀랐다.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안 될 것 같던 그게, 되고 있었다.
사랑이 막, 분석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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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과 섹스와 결혼을 삼위일체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원래부터 그렇진 않았단다. 우리 머릿속에서 세 가지가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선 나름의 기나긴 ‘역사’가 있었다. 주로 유럽을 기준으로 ‘사랑의 역사’ 또는 '사랑의 진화'를 나열하면 이렇게 된다.
.. 동반자적 사랑 | 17세기 영국, 사랑과 결혼의 통합이 이뤄졌다.
.. 열정적 사랑 | 18세기 파리, 에로틱한 사랑을 지향했다. 사랑과 섹스의 결합.
.. 낭만적 사랑 | 18세기 이후 유럽, 연인의 정신적 유대를 중시했다.
사랑과 섹스와 결혼이 하나란 생각은 그러니까, 우발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사랑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안 그럴 때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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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해서 나눠질 것 같지 않던 ‘사랑’도 이렇게 인수분해되고 만다. 마음 아프지만, 사랑의 ‘해체’를 보면서 무언가 분류하는 일의 위대함을 생각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분류의 역사다.
종속과목강문계, 화성암/퇴적암/변성암, 종자식물/선태식물/양치식물/포자식물, 포유류/파충류/양서류/조류, 물리/생물/화학/지구과학……
사람들은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걸, 나누고 또 나눴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의 특기인 분류 기술에 ‘에지(edge)’를 더해, 현대 기업들은 최대한 세세하게 나누고(세그먼테이션), 집중하는(타겟팅) 기술을 마케팅의 기본 원칙으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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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집중하는 마케팅의 기술은 수십 년 동안 놀랄 만큼 발전해, 아무리 해도 나눠질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의 사랑과 우정과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감성도 이미 다 세밀 분석을 끝난 상태다. 분석을 끝난 정도가 아니라, 종일 눈을 떼지 못하는 OTT는 그런 분류의 기술을 완벽히 체화해 우리들을 '알고리즘의 감옥'에 가둔 지 오래다. 작은 액정의 모니터는, 내가 오늘 어떤 사랑을 꿈꾸는지, 어떤 일에 분노했는지 다 안다.
게다가 내일이면 책으로 내게 날아올, 문제의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낭만적 사랑이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와 공명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하니, 여전히 순정한 사랑과 순수한 우정을 믿는 이들은 딴 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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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동양의 고전 《주역》은, 현대의 기업들과 사회학자의 ‘분류’를 훌쩍 뛰어넘는, 내밀한 분류를 최소 2000년 전에 이미 구현했다. 수백 년에 걸쳐 전쟁과 사랑과 인생에 대한 고대인의 궁금증에 대해 답했던, 수천, 수만 개의 메시지를 모아 그 옛날에 깔끔하게 분류를 끝냈다.
단 64개의 기호만으로…….
그게 우리들의 절망과 희망과 애로와 고통과 좌절과 낭만과 후회와 실패와 성공을 세분화해 물샐틈없는(듯 보이지만, 사실 허술한 구석이 많은) 체계에 아로새긴 64괘/384 효의 주역이다.
마케팅 또는 비즈니스 성공의 비밀이 ‘분류(세분화)’와 ‘집중’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게 여전하다면, 주역은 기업을 위한 최고의 바이블이다.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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