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자비에르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여행했던 일본의 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하고, 도쿄의 니콜라이 성당 편을 썼다. 그런데 그 외 일본의 성이나, 기념관, 미술관, 박물관등을 여행한 이야기도 이어질 텐데, 아무래도 중구난방으로 쓰는 것보다는 아예 브런치북으로 통합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이렇게 매주 수요일에 연재하기로 했다.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에 도착한 뒤 제일 먼저 간 곳은 나가사키역 맞은편 언덕에 있는 일본 26 성인 기념관이었다. 나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들의 기념관을 제일 먼저 찾아가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념관이 있는 니시자카 언덕에는 아직 하얀 벚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만개한 벚꽃들은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26명의 성인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버린 언덕 위에 서서 바라본 봄의 풍경, 벚꽃을 보면 덧없는 삶을 생각하게 하는데 과연 그들의 순교는 덧없는 것이었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과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앞으로 써 내려갈 26 성인의 순교이야기는 에도막부의 혹독한 탄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회에 걸쳐 연재될 것이다. 그 모든 이야기의 시초는 일본에 가톨릭을 전해준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Francisco de Xavier (1506년-1552년)에서 시작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는 1506년 4월 7일 나바라 왕국(현재 스페인의 나바라주)의 팜 플로냐 부근 자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Xavier'는 바스크어 etxeberria에서 유래한 것으로 '새로운 집'을 뜻하며 성인이 태어난 출신지를 가리키는데, 향후 일반적인 남자 이름으로 쓰이는 자비에르의 기원이 되었다.
나바라왕국(스페인어 Reino de Navarra, 바스크어 Nafarroako Erresuma, 프랑스어 Royaume de Navarre) 중세 유럽에서 대서양 연안의 피레네 산맥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현재의 바스크지방 대부분을 영유하고 있었다. 나바라 왕국이 건국되기 이전에 이 지역은 프랑크족이 다스리던 바스코 공국이 있었으나, 824년 팜플로나와 남부 나바라를 중심으로 바스크인들의 반란을 통해 팜플로나 왕국이 건국되었고, 이 왕국이 영역을 확장하면서 나바라 왕국으로 발전했다.
왕국은 산초 3세 시기인 11세기에 가장 강성했으며, 산초 3세는 카스티야 백작과 아라곤 백작의 지위를 모두 계승하여 일시적으로 스페인의 황제로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초 3세가 죽고 나서 동군연합은 해체되었으며, 나바라 왕국은 이후 프랑스왕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면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서 반 속국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후 나바라 지방은 둘로 나뉘어, 남부 지방인 상 나바라는 1474년 아라곤 왕국의 카를로스 2세가 점령하여, 카를로스 1세로서 나바라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아라곤 왕국이 혼인을 통해 카스티야 왕국과 합쳐져 스페인 왕국이 되면서 상 나바라의 왕위는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가 동시에 계승하는 칭호가 되었다. 아직 남아 있던 북부 지방은 1572년 이후 프랑스 왕국과 동군연합 상태에 있다가, 1620년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멸망했으며, 1790년 프랑스의 피레네 아틀란티크(Pyrénées-Atlantiques) 지방의 일부가 되었다.
자비에르는 5남매(2명의 형, 2명의 누나)중 막내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돈 후안 디야스, 어머니는 도나 마리아 드 아즈필쿠에타였다.
그의 아버지는 나바라왕 후안 3세의 가신으로 재상을 맡고 있었고 프란치스코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나이가 60세였다. 당시 나바라 왕국은 소국이었지만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의 분쟁 속에 나바로 왕국은 1515년에 아라곤왕 페르난도 2세에 의해 흡수 합병되고 만다. 이 혼란기에 아버지 후안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의 가세는 기울어져 갔다. 1525년 19세가 된 프란치스코는 파리로 유학을 떠나 꼴레쥬 상트 바흐브 Collège Sainte-Barbe에 들어갔다.
1530년에 이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Beauvais college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충실한 동반자였던 이그나시오 로욜라(예수회의 창시자 1491년-1556년 )와 프랑스 출신의 피에르 파브르를 만났다.
당시만 해도 그는 몰락한 집안을 회복하기 위한 출세에 관심을 두었고 선교사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그나시오와의 만남으로 그는 영성에 눈을 뜨고 선교의 길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결국 그는 로욜라와 다른 다섯 명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였고 1534년 8월 15일에 프랑스 몽마르트르의 작은 예배장에서 가난, 순결과 순종을 서약을 했으며 또한 중동에서 무슬림을 개종시키는 사역을 하기로 했다.
이것이 몽마르트르의 맹세이다.
그 후 1537년 6월 베니스 교회에서 빈센테 니구산티 주교에 의해 자비에르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사제로 서품 되었다. 당초부터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했던 예수회는 포르투갈 왕 주앙 3세의 의뢰로 회원을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인도 서해안의 고아에 파견하게 되었다. 자비에르는 다른 3명의 예수회 회원과 함께 1541년 4월 7일 리스본을 출발하여 8월에 아프리카 모잠비크에 도착,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1542년 2월에 모잠비크를 출발해서, 5월 6일 고아에 도착했다. 이후 고아를 거점으로 인도 각지에서 선교를 했고 1547년 말라카로 갔을 때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12월에 가고시마 출신의 일본인 사토미 안지로弥次郎를 만난 것이다.
그에게서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 일본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안지로(1511? - 1550?)는 일본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는 가고시마 출신으로 자신과 자비에르의 편지에 따르면 젊은 시절에 사람을 죽이고 포르투갈배를 타고 말라카로 도망쳤다고 한다. 1548년 오순절에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영세명은 바오로 드 산타페(성신의 바오로)였다. 그때 같이 영세를 받은 이들은 야지로의 동생 요하네스, 야지로의 부하 안토니오였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자비에르가 일본을 떠난 뒤 포교활동에서 해적으로 활동하다가 중국 부근에서 살해당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승려들의 박해를 받고 출국을 강요당해 중국 인근에서 해적에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1548년 11월에 고아의 선교 감독이 된 자비에르는 다음 해인 1549년 4월 15일 예수회 회원인 토레스신부, 후안 페르난데스 수사, 중국인 마누엘라, 인도인 아마도르, 그리고 안지로 일행 3명과 함께 정크선을 타고 고아를 출발, 일본으로 향했다.
일행은 중국 명나라의 상천 안을 거쳐 사쓰마(오늘날의 가고시마)의 사쓰마 반도의 보노츠坊津에 도착한 뒤 상륙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1549년 8월 15일에 현재의 가고시마현 기온노스초祇園之洲町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 날이 가톨릭의 성모승천의 축일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비에르는 일본을 성모 마리아에게 바쳤다.
자비에르는 1549년 9월에 이치우치성一宇治城 (가고시마현에 있었던 산성)에서 사쓰마의 수호다이묘, 시마츠 타카히사 島津 貴久를 알현하여 선교의 허가를 얻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자비에르 신부는 《예수의 길》이라는 기독교 책을 일본어로 발간했다. 당시 자비에르의 기록을 보면 그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문화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대단히 예의가 바른 사람들인데, 잘 사는 것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남자는 14세가 되면 항상 칼을 옆에 차고 다닙니다. 사무라이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무기를 항상 갖고 다니며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비에르 신부는 《공교 요리》(公敎要理)라는 기독교 교리해설서를 쓰기도 했는데, 이를 읽고 감명받은 베르나르도라는 무사가 자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자비에르 신부는 베르나르도를 일본 교회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예수회에 가입시켰으며, 로마에 보내 신학공부도 하게 했다. 그는 일본인 최초의 유럽 유학생이었다.
얼마 후에는 미켈이라는 농부를 포함한 15명이 신자가 되었으며, 1년간의 전도로 1백 명에서 1백50명이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의 반발로 시마츠 다이묘가 기독교에 대해 차가운 모습을 보이자, 안지로에게 교인들을 맡기고 교토로 가기로 했다.
1551년 자비에르는 히라도와 야마구치현을 거쳐 교토에 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야마구치로 되돌아갔다. 당시 일본 본토는 오닌의 난 이후로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의 선교는 외면을 받았고 그는 실의에 빠졌다.
1551년 4월 하순 야마구치의 오우치 요시타카를 다시 알현하여 선교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폐사찰이었던 다이도지大道寺를 자비에르 일행에 내주었다. 이곳은 일본 최초의 상설 교회당이 되었다. 자비에르는 이곳에서 하루에 두 번씩 설교를 했고 약 2개월의 선교기간 중에 신도수는 500명에 이른다. 야마구치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설교를 유심히 듣는 장님이 한 명 있었다. 그는 규슈의 히라도 출신으로 눈이 멀어 거리에서 비파를 켜는 악사였다.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자비에르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의 이름은 로렌조 료우치 ロレンソ了斎(1526-1592). 그는 훗날 전국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일본 내에서 기독교의 확산에 공헌이 큰 열정적인 예수회 회원이 되었다.
그렇게 일본에서 머무른 지 2년을 지나, 자비에르는 인도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1551년 11월 15일 일본인 청년 4 명 (가고시마 베르나르도, 마테오, 주앙 안토니오)를 선택 동행시켜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데스 수도사들을 남겨놓고 중국을 거쳐 인도의 고아로 떠났다.
1592년 2월 15일 고아에 도착해서 자비에르는 베르나르도와 마테오를 성직자 양성 학교인 성 바울 학원에 입학시켰다. 마테오는 고아에서 병사하지만, 베르나르도는 학문을 수련하기 위해 유렵으로 건너갔다.
그해 4월, 자비에르는 일본 전역에서 기독교전파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중국의 선교가 필수적이라고 생각, 중국 선교를 생각하며 그해 9월 중국의 광둥 성 상천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국으로의 입국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고 점점 체력은 쇠잔해 갔다.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있었다. 그의 한계가 다가온 것이다.
결국 쇠약해진 그의 몸에 열병이 찾아왔고 1592년 12월 3일. 그는 영원히 신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의 유해는 석회를 채워 납관하고 해안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 후 1553년 2월에 다시 그의 유해가 이송되어 1553년 3월 22일 말라카의 성 바울교회로 임시 매장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1일 인도의 고아로 옮겨졌다.
1554년 3월 16일부터 3일간 성 바울 성당에서 그의 유해는 일반인에게 관람이 허락되었다. 그때 그의 유해를 참관했던 한 여성이 오른발 손가락 2개를 물어뜯어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 두 손가락은 그녀의 사후에 반환되었고 1902년 그중 1개가 그의 고향인 자비에르 성으로 옮겨졌다.
1637년 12월 2일, 부패하지 않은 그의 유해는 은과 유리로 만들어진 관에 안치되었고 현재 그의 유해는 인도의 고아 Basilica of Bom Jesus성당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성당에 모셔진 자비에르의 유해. 그의 유해는 10년 주기로 일반인에게 참관이 허용되고 있다. 2004년 12월 한 달 동안 그의 유해가 공개되었고 2024년 11월 21일부터 2025년 1월 5일까지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그의 유해중 오른팔 아랫부분은 1614년 로마의 예수회 총장의 명령으로 세바스티안 곤잘레스에 의해 절단되었다. 이때는 그가 죽은 지 50년 이상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른팔에서 선혈이 배어 나와 이를 본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이후 이 오른팔은 로마 예수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오른팔은 1949년, 자비에르 방일 400주년이었던 1949년과 450주년이었던 1999년 일본에 옮겨져 팔 형식의 상자에 넣어진 채 전시되었다.
그의 오른팔 윗부분은 마카오로 보내졌고, 귀와 머리칼은 리스본으로, 치아는 포르투갈로, 흉골의 일부는 도쿄등으로 분산되어 보관되고 있다. 자비에르는 1619년 10월 25일 교황 폴 5세에 의해 시복 되어 1622년 3월 12일, 그의 예수회동지였던 이그나시오 로욜라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자비에르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호주, 보루네요, 중국, 동인도제도, 고아, 일본, 뉴질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올려졌다. 그는 바울사도이후 가장 많은 이들을 기독교에 입교시킨 사제였다.
루벤스가 1618년에 그린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의 기적이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중앙 부분에 노란색 도포에 망건 같은 것을 쓴 사람이 보이는데 조선인으로 추측된다. 현재 일본 내에는 자비에르를 기념하는 교회가 35개소가 있으며 그중 자비에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교회는 모두 3개이다.
아래 사진의 교회들이 바로 그곳들이다.
현대의 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가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람의 수가 약 30,000명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그의 헌신은 대단한 것이었다.
멀고 스페인에서 태어나,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일본까지 찾아와 신앙을 전해준 자비에르.
그의 긴 여정의 씨앗이 일본 내 기독교의 싹을 뿌렸고, 그것이 훗날 순교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지금까지 일본 기독교의 시작을 만든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몇 십 권의 책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압축했음을 이해 바라며 다음 편에서는 자비에르 이후, 일본 기독교의 역사와 26 성인의 순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