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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 담담하게 Dec 18. 2024

나가사키 26 성인 기념관, 성 필립성당

거룩한 순교의 시작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전편에서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 자비에르의 일생과 일본에서의 선교활동, 그리고 죽음과 그 이후 성인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했었다.


주-자비에르가 전한 신앙은 로마가톨릭 신앙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말하는 개신교인 기독교와는 차이가 있으나, 이후의 글에서는 기독교 혹은 크리스천으로 표기할 예정이다.


이번에는 자비에르 이후, 일본 내 신앙이 어떻게 전파되었고, 어떤 희생을 치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먼저, 자비에르가 일본에 온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자.


*자비에르의 선교와 그 시대적 배경


16세기에 유럽에서는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일으킨 종교 개혁이 각국에 퍼져나가고 있었으며, 절대적이었던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은 마르틴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과의 대결 속에서 점차 쇠퇴해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에서 가톨릭교회는 무너져내리는 권위를 되찾기  위해 멀리 아시아에서의 포교활동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아시아지역에서의 신자수가 증가하면 개신교 세력에 대한 견제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그들의 막대한 헌금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일본에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선교사가 파송될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다. 처음 그들이 파견된 곳들은 한창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던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이었다. 그 후 더 먼 동쪽으로 눈을 돌려 극동지역에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현재 나가사키에서 선교사로 있는 현승건선교사의 국민일보 인터뷰를 보자.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이러한 종교개혁운동에 영향을 받아 로만 가톨릭 내부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의 하나로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특히 1534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를 중심으로 예수회가 조직되어 새롭게 발견된 항로를 따라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로만 가톨릭 내부의 개혁운동의 영향으로 시작된 세계선교의 열망 속에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선교사는 예수회의 창립멤버로서 포르투갈의 동방항로를 따라 인도와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동양선교에 헌신하던 중, 1547년 중국무역선에 승선하여 말라카를 출발한 뒤 2년 만인 1549년 8월 15일 일본 규슈 남부의 사츠마(가고시마)에 상륙하여 일본선교에 헌신하였습니다.


이 당시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은 로만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싸움이 아니라 신실한 크리스천과 타락한 크리스천의 투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간직한 신실한 크리스천이 기독교의 방향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타락한 로만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에 대해 벌인 투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운동은 로만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들의 타락에 반대하는 수많은 성직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로만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그들이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마틴 루터를 파문에 처함에 따라 교회 밖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됨으로써 촉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로만 가톨릭 내부에서도 하위 성직자들과 수도원을 중심으로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것이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교회 밖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과 축을 같이하여 수도원을 중심으로 내부적인 교회 개혁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로만 가톨릭 내부의 교회개혁운동은 세계선교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은 타락한 로만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의 타락으로부터 돌이켜 초대교회의 순교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순교의 신앙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한 신실한 선교사들을 통해 일본에서 실현된 것입니다.


이 당시 포르투갈을 떠나 2년여의 험한 항해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이미 없었습니다. 또한 엄격한 박해의 시대에 일본에 잠입한 선교사들은 이미 순교의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위해 당당히 순교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일본 신자들에게 커다란 신앙의 확신을 심어 주었으며 에도 막부의 잔인한 260여 년의 박해시대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011년 8월 11일 자 인터뷰 중에서.


*자비에르 이후 선교활동과 남만무역.


자비에르는 안지로와 코스메 드 토레스, 후안 페르난데스 등과 함께 일본의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2년 3개월 동안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가고시마에서 히라도, 야마구치를 거쳐 교토에 도착했지만 당시 교토는 오닌의 난 이후 쇠퇴해져 있었다. 천황의 권위도 실추된 상태이고 쇼군도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서서히 일본인 협력자들을 얻을 수 있어 약 700명 정도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 중국 선교를 위해 일본을 떠나게 되었을 때 예수회 본부에서 새로운 선교사 파견을 의뢰했고 거기에 응해 우수한 선교사들이 일본에 보내졌다. 그때 일본에 온 선교사들은 가스파 뷔레라 (Gaspar Vilela 1525-1572), 루이스 데 알메이다(Luís de Almeida 1525-1583 본래는 포르투갈의 상인이었지만 나중에 예수회 회원이 되었고 오이타현 오이타시에 일본 최초로 병원을 개설한 사람),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 1532-1597,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서 회견을 하고 일본 전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일본사를 썼다.), 가스파 코엘료(Gaspar Coelho 1530-1590)등이었다.

오이타현 오이타시에 있는 일본 의료 발상 기념비, 가운데가 루이스 데 알메이다이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원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당시 조선과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다. 그의 기록은 한국에서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필독서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번외 편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일본에서의 선교는 여타 지역과 다른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아시아에서의 선교는 대부분 유럽의 식민지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그 이면에는 본국의 군사적, 경제적이 있었지만 일본은 그런 배경이 없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제일 먼저 그 지역의 지배자인 다이묘와 면담을 해서, 남만 무역등의 이익을 호소하면서 포교 허가를 얻었다.


여기서 잠깐 남만 무역南蛮貿易(なんばんぼうえき)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가자.


남만무역은 일본 상인과 당시 스페인, 포르투갈 상인 사이에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초까지 실시된 무역을 말한다. 1543년, 타네가시마(種子島, 일본의 우주 발사 기지가 있는 섬, 일본 애니 초속 5센티미터 2화의 배경이 된 섬)에 포르투갈선이 도착한다. 이 선박은 유럽인이 일본에 온 최초의 사례인데 이때 영주인 타네가시마 도키타카는 포르투갈인이 가지고 있던 철포(鐵砲, 화승총)를 구입해 가신들에게 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우게 하였다.


이후 철포는 일본 전역에 유포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군사전략과 전술의 대변혁을 가져오게 되어, 혼란스러웠던 전국 시대(戰國時代)를 종식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포르투갈인들은 매년 일본에 내항하여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스페인도 1584년부터 히라토(平戶)에 내항하여 일본 무역을 개시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을 남만인(南蠻人), 그들이 타고 온 선박을 남만선(南蠻船), 그들과의 무역을 남만 무역(南蠻貿易)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본적으로 남만무역을 권장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에 비해 늦게 아메리카를 통해 태평양 항로를 개척했고, 루손섬의 마닐라에 본거지를 두고 일본을 방문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스페인과의 무역에 적극성을 보였고, 교토의 상인 다나카 쇼스케田中 勝介를 당시 스페인령이었던 멕시코에 파견했다.


그때에는 기독교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무역은 그런대로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후 에도막부는 금교정책 외에 서일본 지역의 영주들의 세력이 커지는 경계했기 때문에 해외무역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무역 장소는 히라도와 나가사키에 한정했고, 1624년에는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했으며 1639년 포르투갈의 선발의 내항마저 금지하여, 쇄국 체제로 이어지고 남만 무역은 종료되었다.

당시 남만 무역을 묘사한 그림


당시 일본에 온 남만인들, 옆에 흑인이 보인다.

당시 남만무역에서 거래된 상품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화승총(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조총)이었다. 1543년 가고시마현의 타네가시마에 표착한 포르투갈선이 처음 3 정의 총을 일본에 건네주었고, 이후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전래된 화승총은 쉬운 조작으로 점화할 수 있었고, 종래의 총기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편리함과 정확도가 있었다.


처음 각 지역의 영주들은 이 화승총의 성능을 의심했지만 점차 이 화승총이 사용된 전투에서 그 위력이 입증되면서 생산량이 증가했다. 당시 일본의 화승총의 총보유량은 오스만 제국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화승총의 모습. 이 화승총 외에도 당시 규슈의 크리스천 다이묘였던 오토모 쇼린 大友 宗麟 에 의해 불랑기포등의 대포도 수입되었다.


국립 진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의 불랑기포



오다 노부나가가 사용했던 불랑기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당시 남만 무역을 통해 컬버린포 4문을 영국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이 대포는 도요토미 가문과의 오사카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 당시 남만무역의 거래 대상 품목은 중국산 질산염, 생사, 견직물등이 수입되었고, 황, 은, 해산물, 칼, 칠기등이 수출되었다. 또한 이 무역으로 호박, 수박, 옥수수, 감자, 빵, 카스텔라, 담배, 지구의, 안경, 투계용 닭등이 일본에 소개되었다.


*크리스천 다이묘


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당시 전국시대의 일본 영주들은 서양과의 교역을 계속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비에르일행을 환영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에 접촉한 영주들 가운데서 세례를 받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기독교를 신봉한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이 빠져든 사람도 있었지만 단순히 남만무역을 보다 원활하고 대규모로 시행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세례를 받은 다이묘들을 크리스천 다이묘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 유명한 이들은 아래와 같다.



*오토모 쇼린(大友 宗麟 1530-1587 )


전국 시대의 무장, 지금의 오이타현인 분고국의 영주, 세례는 1578년 7월에 받았고, 영세명은 돈 프란치스코.

오모토 쇼린의 초상화


JR 오이타역전에 있는 오모토 쇼린의 동상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33-1587 )


나가사키의 영주로서 일본 최초의 크리스천 다이묘, 나가사키항을 개항시켰으며 당시 영내의 주민 6만 명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신앙인이 된 후에는 첩을 내보내고 정실 부인과 그리스도교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영세명은 발트 로메오, 1563년에 세례를 받았다. 다른 크리스천 다이묘들과 연합하여 로마에 덴쇼 소년 사절단을 파견했다.     

오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567-1612 )


지금의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의 영주, 훗날 그의 몰락이 시마바라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했지만 영세를 받은 후 깊은 신앙에 빠졌다. 그의 아내는 루치아.


아리마 하루노부

*타카야마 도모테루(高山友照 ?-1595)


영세명 다리오, 아내 타카야마 마리아 , 세츠국(현재의 오사카지역)의 다이묘,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다이묘. 사무라이의 귀감이라는 평을 얻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리스도교를 탄압할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주의 자리를 내버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교토에서 사망.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1552-1615)


영세명 쥬스트, 아내 타카야마 쥬스타, 타카야마 도모테루의 아들. 크리스천 다이묘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에 12세 때 세례를 받고 평생을 믿음을 굳건히 지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시절의 탄압 때 일본을 떠나 마닐라로 갔고 거기서 생을 마쳤다. 겨울의 추운 밤 성내를 순회하고 있던 그때에, 추위에 떨고 있던 하급 병사를 찾아냈을 때 그는 자신의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 자신은 오래된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의심스럽게 생각한 부인이 묻자 타카야마 도모테루는 "옷을 주님에게 바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또한 영내의 가난한 크리스천이 죽었을 때 장례식의 관을 함께 짊어진 뿐만 아니라 매장을 위한 무덤 파는 일까지도 도왔다고 한다.     


오사카부 타카츠키시 공원에 있는 우콘의 동상
타카츠키 가톨릭 성당

*고니시 유키나카 (小西 行長 1558-1600)


영세명 아우구스티누스, 아내는 쥬스타, 우리에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던 무장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서울에 먼저 입성했고, 평양까지 진출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칠전량 전투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을 패배시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뒤 참수당했다. 그때 유키나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정토문 승려에 의해해 머리 위에 경문을 두는 것을 거절하고 포르투갈 왕비로 주어진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성화를 들고 세 번 머리 위에 올린 뒤 참수를 당했다. 처형 후 목은 도쿠가와에 의해 산조다리 위에 걸렸다. 죽음에 임박하자 같은 크리스천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에 고해성사를 의뢰했지만 거절당했고 처형 당일도 사제가 성사를 시도했지만 접근하지 못하고 받을 수 없었다. 시신은 다시 성사를 받은 뒤에 실크 옷에 싸여 가톨릭 방식으로 묻혔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8세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끌려온 조선인 수양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오타아.


임진왜란 당시 평양 부근에서 일분군에 의해 납치되었으며, 부모는 전투 중 사망, 살해 또는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인질로 잡힌 양반의 딸이라는 설도 있으나, 실명이나 가계등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줄리아는 세례명이며 오타아는 일본 이름이다.


그녀는 고니시 부인의 지극한 교육을 받았으며, 고니시 집안의 가업인 약초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절세미인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양부인 고니시가 세키가하라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패배, 이시다 미쓰나리와 더불어 교토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한 뒤에 오타아의 미모와 재능을 알아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성의 대전으로 불러들여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시녀가 되었다. 그녀는 밤에는 매일 기도를 하고, 성서를 가까이하여 다른 시녀들과 가신들에게 신앙을 전파했다고 한다.


도쿠가와막부의 기독교 탄압정책에 따라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정식 측실이 되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고에도 난색을 표하여 1612년(게이초 17년) 금교령에 따라 슨푸에서 쫓겨나, 이즈 오오시마, 하치조섬, 나이지섬, 고즈시마섬등을 옮겨 다니며 유배생활을 했다.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자를 간호하고 다른 유형수들을 격려하는 등 사회선교를 했다고 한다. 3번의 유배처분을 받은 뒤 죄를 사면해 주는 조건으로 이에야스의 수청을 제의받았으나 다시 거절했으며, 니지마섬에서는 슨푸시대의 동료 시녀들인 루치아와 클라라등과 다시 만나 일종의 수도 생활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타아의 말년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1950년 고즈지마의 향토사학자인 야마시타 겐이치로라는 사람이 고즈시마섬에 있는 유래불명의 공양탑을 오타아의 묘라고 주장하면서부터 매년 5월 한·일양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오타아의 위령제가 열리면서 일종의 관광지가 되었다. 하지만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파체코 신부가 1622년 2월 15일에 쓴 편지에 따르면 오타아는 고즈지마 섬을 빠져나와 오사카로 옮겨가 프란체스코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 후 오사카에서 다시 나가사키로 이주했다는 내용이 발견되면서 줄리아 고즈지마 사망설은 부정되었다. 슨푸 시대에는 등롱(일본식 조명등)을 만들게 하여 명상을 했다고 전해지며, 오타아가 쓴 등롱은 기리시탄 등롱으로 불린다. 이 등롱은 현재 시즈오카시에 있는 정토종계 사찰인 호다이인(宝台院)에 보관되어 있다.


*가모 우지사토 (蒲生 氏郷 1556-1595)


영세명은 레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실한 가신,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에 마흔의 나이로 사망했다.


*본격적인 선교활동

일본에서의 선교 초기에는 기독교의 하나님(데우스 deus 라틴어의 하나님)을 다이니치로 번역 사용했다. 이것은 자비에르가 일본에 오기 전 안지로와의 문답을 통해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大日如来 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비에르가 일본에 와서 다이니치를 믿으라고 하면 당시 일본인들은 인도에서 온 외래 종교라고 생각했다. 또한 기독교를 천축교 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불교의 한 일파로 오해되는 일이 많았다. 초기에 제대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던 것이 기독교의 정확한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고 인식한 자비에르는 곧 불교 용어를 폐지한 원어주의가 채택했다.


예수회의 선교 정책에 근거하여 일본의 선교 정책은 일본의 전통문화와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일본인 사제와 주교를 양성하고 일본 교회를 사목 시키는 것에 있었다. 적응주의 라고 한 이 지침서에 의해 일본에서의 선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성직자가 될 능력이나 적성도 없다고 생각하고 경시했던 프란시스코 카브랄이 부임해 온 뒤부터 포르투갈 인과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립이 깊어지고 선교 활동이 정체했다. 그는 철저한 유럽인의 시각으로 동양인을 무시했던 것이다.


이때 예수회 본부에서 순찰사로 일본을 방문한 알렉산드로 바리냐노가 각지를 돌며 실정을 시찰한 후, 카브랄을 해임하고 그 정책을 부정하여 기존의 적응주의의 부활을 명령했다. 바리냐노는 일본인 사제 양성을 급선무로 하고 각지에 세미나리오 (소 신학교)와 노비샤도 (수련원), 콜레지오 (대신학교)를 설치했다. 이 학교에서는 당시의 학술어였던 라틴어와, 일본어 및 철학 · 신학, 자연 과학, 음악, 미술, 연극, 체육 및 일본의 고전을 필수 과목으로 학습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소양을 중시한 예수회의 교육 정책에 의한 것으로, 예수회의 교육은 일본의 메이지 이후 학교 교육의 앞선 성취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바리냐노는 미래의 일본을 짊어질 청소년들에게 직접 유럽을 보여주는 동시에 유럽에 일본의 존재를 어필하려고 덴쇼소년사절단(1582-1590)을 기획. 예수회 회원에 동반된 네 명의 소년을 유럽으로 파견했다.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

덴쇼 소년 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은 1582년 오토모 쇼린, 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등이 조정을 대신하여 로마 가톨릭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파견한 네 명의 소년을 중심으로 한 사절단이다. 예수회 선교사, 알렉사드로 발리냐노가 제안하여 교황을 접견하고 1590년에 귀국했다.


이 사절단에 의해 당시 황금의 나라 지팡구등 서양 세계에 환상적인 나라로 알려졌던 일본의 존재가 확실하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이 가져온 구텐베르그 인쇄기에 의해 일본은 동아시아 최초로 서양 활판 기술을 도입하여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소년 사절단의 내방을 전한 인쇄물, 1586년 발행.

인쇄물 오른쪽 위의 인물이 이토만쇼 伊東 マンショ 1569-1612. 1608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목에 힘썼으나 몸이 약해 1612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했다.


오른쪽 아래가 치지와 미게루 千々石 ミゲル 1569-1633, 영세명은 미구엘, 오오무라 스미 타다의 조카, 훗날 배교하여,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왼쪽 위의 인물이 나카우라 줄리안 中浦 ジュリアン 1568-1633, 1608년에 사제로 서품 되었다. 기독교 탄압을 피해 숨어서 선교활동을 하다 1632년에 체포되었다. 1633년 10월 21일 나가사키에서 순교했다.


당시 고문관이 나카우라 신부에게 이제 마지막이다. 배교하라고 회유하자, 나는 로마까지 갔다 온 나카우라 줄리안이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거꾸로 매달아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줄리안 사제의 순교 모습, 당시 이 처형은 귀뒤에 작은 구멍을 뚫어, 며칠씩 구덩이에 매달아 두는 것이었다
나카우라 줄리안 기념공원에 있는 그의 동상

왼쪽 아래 인물이 하라 마르치노 原 マルティノ 1569-1629, 라틴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사제 서품뒤 선교활동을 했으나 도쿠카와 막부의 크리스천 추방령에 의해 1614년에 마카오로 옮겨 갔으며 1629년 마카오에서 사망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를 알현하는 이토만쇼.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선교와 순교


오다 노부나가는 선교사들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기본적으로 노부나가의 정책을 계승하여 선교사에 대해 관대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을 목전에 둔 1587년 규슈 정벌에서 선교사와 크리스천 다이묘에 의해 수많은 신사와 사원이 불타고 불교가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그의 정책은 변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인이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노예로서 해외로 팔려가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규슈 정벌 완료 직후 하카타에서 당시 선교 책임자 인 가스파르 코엘류를 소환하여 바테렌 추방령을 발부, 선교사 추방 명령과 기독교 선교 제한을 표명했다.


이때가 1587년 7월 24일이다.


이에 대해 코엘류는 아리마 하루노부등 크리스천 다이묘에 히데요시와 대응하도록 요청하며, 더 많은 무기 · 탄약의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리마 하루노부는 이미 일본을 거의 수중에 넣었던 히데요시와 적대할 생각은 아니어서 이 요청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예수회는 히데요시를 자극할 것을 우려, 공공 선교 활동을 잠시 자제하게 된다.


한편, 히데요시는 추방령을 발부했지만 이후에도 사실상 크리스천은 묵인했기 때문에 박해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히데요시는 포르투갈을 통한 남만 무역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추방령을 철저하게 지키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입장은 다소 불안정했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꽤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선교활동의 결과로 1592년의 일본 내 기독교 신자는 약 22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의 말기가 되어 스페인령이었던 필리핀에서 프란치스코와 도미니크회등의 수도회가 일본으로 들어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졌다. 그들은 일본 선교에서 당시 예수회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선교해 나가는) 방식과는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직접 선교를 시도했다. 그것은 예수회처럼 일본 문화에 적응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고 히데요시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예수회와 이러한 후발 수도회의 대립이 점차 격화되면서 일본에서 선교사의 입장은 점차 악화되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1596년 산 펠리페호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산 펠리페 사건은 1596년 10월 19일 시코쿠의 토사 해안가에 태평양을 횡단하려 했던 스페인의 무역선 산 펠리페 호가 좌초된 사건을 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법률에 따라 좌초한 배의 모든 교역 물자를 압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불응했던 산 펠리페 호의 선장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스페인의 군사력에 의해 귀속된 세계 각국의 영토를 보여 주며 자신들의 무력을 과시했고, 모든 선교사들이 스페인의 정복을 위해 전 세계로 흩어져 자신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사건으로 비위가 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당시 교토에서 활동하고 있던 프란치스코회계열 선교사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한 최초의 기독교 박해이다. 결국 이때 체포된 사제들과 신도,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되었다.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온 기독교의 전파는 이제 피비린내 나는 길고 긴 탄압과 순교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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