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겨 낸 믿음의 승리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의 오우라 천주당大浦天主堂이다.
오우라 천주당은 1862년에 착공해서 3년 만인 1865년에 완공되었다. 오우라 천주당의 정식 이름은 일본 스물여섯 성순교자당, 그 이름대로 일본 스물여섯 성인에 바쳐진 교회당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기독교 건축물로서, 순교지인 나가사키 니시자카를 향해 세워졌다. 195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된 나가사키의 교회군과 기독교 관련 유산 중의 하나이다.
이 오우라 천주당은 에도 막부의 탄압이래 숨어 있던 키리스탄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건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1614년 금교령 이후, 에도 막부의 탄압은 집요하고 잔인했다. 주민들은 5호씩 묶어 서로를 감시하게 했고 막대한 포상금으로 잠복 키리스탄들을 신고하게 했다.
특히 악랄한 탄압 수단은 후미에踏み絵 (ふみえ)였다. 이것은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성화상을 발로 밟게 하는 것이었다. 밟기를 주저하거나, 뭔가 기도 같은 것을 하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크리스천으로 몰아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이 제도는 메이지시대까지 존재했다. 신도들의 믿음을 시험하게 하는 악의적인 수단이었다.
(후미에를 시행할 당시에 사용한 널조각, 처음에는 성모상이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린 종이를 사용했으나, 금방 훼손되었기에 이렇게 널빤지에 성모상이나 그리스도의 성화상을 넣어 사용했다.)
이에 대해 숨어 있던 키리스탄들은 후미에 당일에 발을 깨끗이 씻고 살짝 밟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돌아와서 발을 씻고 그 물을 보속의 의미로 마셨으며 통회의 기도를 바쳤다.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신부와 수사들이 처형당하고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교황청은 일본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200여 년의 시간이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의 이런 관심은 지속되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일본이 개국의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에 본부를 둔 파리 외방 선교회에 일본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1844년 테오도르 포르카드 신부(Théodore-Augustin Forcade 1816-1885)가 오키나와의 나하에 파견되어 2년을 체류하며 일본으로의 도항허가를 재차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고 1846년에 귀국했다. 그러나 같은 해 포르카드를 초대 교구장으로 일본 교구(정확하게는 일본사도좌 대리구)가 설립된 후 1855년에 지라르, 후에레, 메르메, 이렇게 3명의 신부가 나하에 부임해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후 1858년에 일프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에 입국하게 되었다.
이후 메르메 신부는 하코다테에, 지라르는 에도를 거쳐 요코하마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1862년에 요코하마에 일본의 개국이래 최초의 가톨릭 교회가 되는 성심교회(현재의 야마테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일본에서 새로운 선교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황청은 1862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26명을 성인으로 시성 했다.
오우라 천주당은 지라르의 지시를 받은 후에레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토지를 구입하고, 나중에 온 베르나르 푸치잔(나중에 주교가 됨)과 함께 1865년 2월 19일에 완공되었다.
새로 완공된 오우라 천주당을 당시 나가사키 사람들은 프랑스사フランス寺 혹은 남만사南蛮寺 라고 불렀다. 오우라 천주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서양식 건축물로, 이를 처음 본 나가사키 사람들은 신기한 건물로 여겨져 구경을 오는 이가 많았고 푸치잔신부는 일본인들에게 교회를 개방하고 자유롭게 견학하도록 했다.
푸치잔이 본래 나가사키 거류 프랑스 인을 위해 지어진 성당을 흥미 본위로 찾는 일본인들에게 견학을 허락했던 이유는 나가사키가 기독교 순교자의 땅이기 때문에 아직 성도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찾아오는 일본인 중에 신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구경 오는 이들 중에 우라카미 지역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잠복 키리스탄들이었다. 무려 250년간, 7세대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계승했던 잠복 키리스탄 농민들은 프랑스사에 가면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빠테렌(신부)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에서 이사벨라 유리(당시 52세 일본이름은 스기모토 유리)가 산타 마리아 님이 계신다면 그곳의 외국인은 빠테렌임에 틀림없다며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여기에 공감한 이들이 1865년 3월 17일 금요일 아침, 길을 떠나 정오를 지나 오우라 천주당에 도착했다.
당시 오우라 천주당에 도착한 사람들은 15명 정도였다. 푸치잔 신부는 그때 정원 손질을 하고 있었는데 15여 명의 남녀가 교회 문 여는 방법을 몰라서 헤매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불러들여 내부를 돌아보게 했다. 일행들은 구경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뿔뿔이 흩어져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푸치쟌 신부는 제단을 올라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세명의 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중의 한 부인이 가슴에 손을 대고 신부의 귀 가까이에 속삭였다.
그 여성(스기모토 유리)은 "ワレラノムネ、アナタノムネトオナジ 우리의 믿음은 당신의 믿음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정말입니까? 당신들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 푸치쟌 신부는 놀라움에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우라카미 사람들입니다. 우라카미에는 거의 모두가 우리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러고 나서 그녀가 되물었다.
"산타 마리아 님의 상은 어디에?"
신부는 그들은 성모자상으로 안내했다. 그러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성모상 앞으로 모였다.
"정말로 산타 마리아 님이네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시네 "라고 그들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신부나 사제 없이 그 긴 세월을 가혹한 탄압아래서 신앙을 지키며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지킨 이들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이 놀라운 일은 푸치잔 신부는 교구장 지라르에게 3월 18일 상세한 내용을 적어 편지로 보고했다.
실로 250년 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은 바로 로마에게 전해져 당시 교황 비오 9세는 이를 동양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이후 잇달아서 나가사키 각지에서 자신들도 키리스탄임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오우라 천주당을 찾아왔다. 푸치잔 신부는 견학하는 모습으로 찾아온 일본인 신자들에게 비밀리에 미사 및 지도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후 당당히 기독교 신자임을 드러나는 사람들이 많아져 에도막부와 기독교 금교 정책을 계승한 메이지 정부에서 마지막 탄압을 받게 된다.
당시 나가사키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숨어 있던 잠복 키리스탄들에게는 대대로 전해지는 예언이 있었다.
그것은 에도시대 초기에 막부에 의해 순교한 바스챤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일곱 세대가 지나면 다시 로마에서 빠테렌(신부)가 온다는 것이었다.
푸치쟌 신부에게 처음으로 성도임을 고백한 신도 재발견 사건 이후 아마쿠사, 고토등에 사는 신도들의 지도자들이 속속 신부를 찾아가 지도를 부탁했다. 신부는 비밀리에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은 마을로 돌아가 신부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렇게 다시 믿음을 드러난 지 2년 후 1867년 우라카미 마을의 신도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성도의 존재가 드러났다. 이 사건은 촌장에 의해 나가사키 부교에 전해졌고 이들이 기독교신자임을 확인한 부교는 다시 막부에 보고했다. 막부는 밀정을 보내어 마을을 탐색하고 난 뒤 그해 7월 14일 자정 마을에 있는 비밀 교회당을 급습하여 신도 68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성도들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내고 줄을 걸어주세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그 옛날 그들의 선조들처럼 순교를 각오한 것이다.
체포된 신자들은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것이 마지막 탄압으로 기록되는 우라카미 4번째 붕괴라는 메이지 박해였다.
다음날 사건을 전해 들은 프로이센공사와 프랑스 영사, 포르투갈 공사, 미국 공사가 나가사키 부교에게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행위라면 즉시 항의했다.
박양자 수녀님이 쓴 글에 보면 이때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투옥된 신자 중 다카키 센우에문외는 모두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여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들이 신앙을 버린 자는 집에 들어올 수 없다. 당신이 집에 있다면 우리들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신사부로의 수기에 보면 집에 돌아갔으나 집에도 들어갈 수 없고, 밖에도 있을 수 없고 천주님을 버렸다고 생각하면 내 몸 하나 둘 곳이 없어 3일 밤낮을 울었다. 그로부터 천주님과 산타 마리아 님의 도움으로 천주님께 돌아서고 사람들을 격려하여 개심자가 많이 생겨서 죽을 각오로 관청에 출두하여 다시 체포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신정부가 등장했지만 키리스탄에 대한 탄압은 중지되지 않았다. 1868년 5월 메이지 신정부는 우라카미 부락민의 유배를 결정하고 그해 7월 180명의 지도자와 신자들을 야마구치현의 하기, 츠와노, 그리고 후쿠야마로 유배시켰다. 2차로 각호의 호주 700여 명을, 다음날은 그들의 가족 모두를 검거하여 전국 각지 21개소에 유배시켰다. 이때 유배된 인원은 모두 3394명에 달했다.
더욱더 가혹한 처사는 이들의 유배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을 각각 다른 데로 유배시켰던 것이다. 당시 하기로 유배된 이와나가 즈루(당시 22세)의 이야기는 가혹한 고문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대표적인 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폭설이 계속되는 날, 속치마 하나 걸치고 눈 속에 무릎을 꿇은 채 하루 종일 밥 한 끼 먹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졌다. 아침이 되면 다시 또다시 시작되는 눈 속의 고문. 일주일간 계속되는 사이 대설이 내렸다. 즈루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눈 속에 파묻혀 검은 머리만이 흰 눈 위에 보이게 되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을 때 감시인 두 사람이 와서 "배교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도록 내버려 둘 거야 "라고 하면서 끌어내어 장작불 옆에 데려다 놓았다. 꽁꽁 얼어붙은 몸이 불 옆에 있자 고통은 배가 되었다. 몸이 녹으면서 가시에 찔린 듯 아파왔고, 온몸은 퉁퉁 부어올랐다.
감시인이 "어떠냐? 말해 봐"라고 말하자, 즈루는 "친절히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어떠한 고문을 받더라도 배교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에 대한 고문은 18일간 진행되었으나 그녀는 결코 굴하지 않았고 결국 관리는 그녀에 대한 고문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1873년에 귀향조치로 고향에 돌아가 1925년 12월 죽을 때까지 우라카미 십자회에서 전도사로서 봉사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부모 앞에서 아이들을 고문하는 등 그 잔혹함은 에도 막부의 탄압이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71년 메이지 정부의 사절단들이 서구 문물의 시찰과 불평등 조약 개정의 예비 교섭을 목적으로 구미제국으로 떠났다. 사절단은 가는 곳마다 키리스탄 박해에 대하여 거센 항의를 받았다.
(당시 사절단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가 중심이 되어 1871년 11월에 요코하마를 떠나 1년 10개월 동안 구미제국을 순방했다.)
당시 미국의 그랜트 대통령,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 등은 기리 스탄 탄압과 금교 정책을 격렬히 비난했고 메이지 정부의 기독교 탄압중지와 선교의 자유가 불평등조약 개정의 전제 조건임을 분명히 했다.
결국 메이지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기독교에 대한 정책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1873년 2월 각지에 유배된 우라카미 신자들을 석방 귀향 조치하게 되었다. 처음 유배된 사람들 3394명 중 662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성도는 유배의 고난을 여행이라고 부르고 더욱 믿음을 강하게 해서 1879년 자신들의 고향에 우라카미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메이지 정부는 1873년 기독교 금제를 철회하고 잠정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고 1889년 일본 헌법에 신앙의 자유를 명문화했다. 결국 수많은 희생과 고난을 이겨낸 믿음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