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자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이후 26명의 성인들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당할 때까지의 일본 초기 기독교사에 대해 살펴봤다.
이번 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의 기독교 박해사를 대략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런 후에 오늘날 나가사키현의 수많은 교회들 중에서 여행자들이 많이 찾아가는 오우라 천주당과 우라카미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먼저, 26명의 성인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처형당한 뒤의 신비로운 현상에 대해 알아보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26명의 순교뒤에 네 가지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첫 번째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십자가에 시체를 그냥 매달아 두었는데, 다른 때와는 달리 새들이 형장을 맴돌 뿐, 시체를 파먹거나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시 처형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것인데, 그들의 십자가 위에 신비로운 빛이 비치다가 차츰 나가사키 시내 쪽으로 퍼져 나갔다고 한다.
세 번째는 순교 후 보름쯤 지나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로 떠나기 전에 형장을 찾았는데 순교자들에게서 악취가 나거나, 부패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처형 당시나 다름없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 번째는 이탈리아인 죠반비 보나지나가 한 순교자의 피를 도자기로 된 그릇에 담아두었는데 9개월이 지난 뒤에도 굳지 않고 액체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이런 현상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1543-1616)는 처음에는 기독교 선교를 묵인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98년 스페인 선교사 헤로니모 드 헤스스 (Castro Jeronimo de Jesus)가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요청하자, 에도에 교회 건설과 포교 허가를 내주었다. 그러나 1600년 네덜란드의 선박 리후데호가 표착했을 때, 영국인 항해사, 월리엄 아담스와 얀 요스텐을 통해 이에야스는 당시 유럽 상황에 대해 전해 들었다. 한때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흥 강자였던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말한 유럽의 상황과 전쟁은 스페인 무적함대의 영국 침공이 좌절된 1588년의 7월과 8월의 해전과 80년 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은 156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네덜란드 독립전쟁. )
월리엄 아담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들로부터 당시의 세계정세를 전해 듣고 나서,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 양 진영을 맞서게 하면서 무역의 실리를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쇼군직을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1579-1632)에게 물려주고 슨푸성으로 옮겨간 뒤인 1607년에 예수회 회원 프란시스코 파지오를 접견하고 외국인 선교사의 체제와 포교 허가를 내주었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에야스는 무역의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무관심이었다. 이것은 미카와 잇코잇키 三河一向一揆등 종교와 관련한 것으로 시달린 것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기독교 포교를 수반하지 않는 무역도 가능하다"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야스에게 적극적으로 선교사와 기독교를 보호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사실 당시의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서 (경제적 착취와 문화의 탄압은하고 있었지만) 현지의 종교와 정치 형태에 대해서는 별로 간섭하지 않는 방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612년에 발생한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 岡本大八事件(おかもとだいはちじけん )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은 일종의 사기 사건인데, 이 사건의 관련자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분노를 샀고 그 결과로 인해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와 막부의 신하들의 기독교 금지를 선포하고. 다음 해 기독교 금지를 명문화하기 이르렀다.
이 결정이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의 출발점이었으며, 이때부터 에도막부의 기독교에 대한 시각은 막부의 질서에 반대하는 반국가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길고 긴 암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야스의 명을 받은 오쿠보 다다치카大久保 忠隣 는 크리스천들을 박멸하기 위해 오사카에 부임해서 선교사들의 국외 추방과 교회당 파괴를 시작했다.
1614년 2월 11일 교토에 있는 신부들은 나가사키로 가서 각자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들 일행은 4월 중순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모레혼 신부를 포함하여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 아우구스티노회 회원과 교구 사제를 포함하여 62명은 마카오로, 36명은 마닐라로 추방되었다. 이때가 1614년 11월이었다.
일본을 떠나지 않은 신부들은 몸을 숨겼다. 이때 추방된 신부들 속에 크리스천 다이묘였던 다카야마 우콘도 함께 있었다. 다카야마 우콘은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싸움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이다. 만일 이 전쟁에서 내가 죽는다 해도, 예수님과 함께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그 능력 아래 일본 교회를 보호하는 죽음이 될 것이다. 이런 죽음은 그리스도교의 승리와 영광, 그리고 번영을 가져올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이 은총을 주신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은혜다."
그는 결국 다시는 일본땅을 밟지 못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눈을 감았다. 신앙을 버릴 것을 거절한 대가였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은 뒤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본격적인 집권이 시작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한층 강화되었다. 1619년 10월 6일 교토에서 52명이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는 교토 대순교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교토를 관리하고 있던 이타쿠라 가츠시게板倉 勝重는 선교사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크리스천들을 붙잡았지만 특별히 처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안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이들을 화형 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사실 처형이 있던 그해 1월부터 관리들은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교토의 디아스초 デウス町(하나님을 뜻하는 데우스에서 온 이름으로 교토의 크리스천들이 모여 살던 동네를 말한다. 교토의 호리가와, 가라스마, 니시오지 등 교토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에 가서 신앙을 버리도록 설득했다. 신앙을 버리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특히 당시 7살이었던 마르타라는 소녀는 신앙을 버리지 않겠어요라고 크게 외쳤다고 한다.
이후 63명이 체포되어 옥에 갇혔고 그중 8명은 열악한 감옥 생활에서 죽었다.
그리고 1619년 10월 6일 처형 당일, 교토의 로쿠고가와라마치의 서쪽에 27개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이타쿠라 가츠시게는 크리스천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의를 베풀어 가족단위로 십자가에 묶었고 그 간격도 조밀하게 했다. 그렇게 되면 불길이 강해져 마지막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들을 묶은 줄은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얼마든지 배교를 하고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날의 처형에 있어 가장 극적인 순간은 테클라 하시모토라는 여인이었다. 교토출신이었다고 하는 그녀는 세 자녀와 함께 화형을 당했는데 한 명은 품에 안고 있었고 두 명의 자녀는 어머니를 얼싸안고 있었다. 불길이 치솟자 아이들은 뜨거움에 몸무림 치며 "엄마 뜨거워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테클라는 "이제 조금 있으면 하늘나라가 보일 것이다 "라고 외치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당시 그녀의 뱃속에는 또 한 명의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날 순교한 52명 중 어린아이는 모두 11명이었다.
로쿠조가와라마치 부근의 강변
겐나 키리스탄 순교의 땅이라는 표지석
테클라 하시모토와 함께 화형 당하는 그녀의 아이들..
이날 저녁 무렵에 이루어진 화형의 광경을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그의 가신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노림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사건이 본보기가 되어 1614년 금지령 선포한 이후 박해를 삼갔던 다른 다이묘들도 자신의 영내에 있는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게 된다. 크리스천 문제를 이유로 막부의 문책을 받아 다이묘의 신분을 박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미 배교를 거부한 몇몇 다이묘들에 대한 처벌등을 지켜보았기에 탄압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나가사키에서는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를 파괴했으므로 키리시탄(크리스천의 일본식 발음 이하 키리스탄으로 표기)은 자연 소멸되었으리라 여겨 더 이상의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1620년에 발생한 히라야마 죠친사건平山常陳事件(참고 4)으로 인해 키리스탄이 계속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1622년 막부는 잠복해 있는 선교사들과 그들을 숨겨준 신자들을 찾아내어 본보기로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후 나가사키에서 선교사와 신자 55명이 체포되어 화형과 참수를 당했다. 이것이 겐나의 대순교元和の大殉教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일본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신도가 동시처형된 사건으로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드나들었던 네덜란드 선원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해외에 전해지면서, 앞서 순교한 26인의 성인과 함께 대표적인 순교사건으로 기록된다. 또한 이 사건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와 가톨릭에 입교한 조선인 신도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처형된 사람들 중 33명은 오오무라(현 나가사키 시에 속한 옛 지역)에서, 다른 사람들은 나가사키의 감옥에 수년간 갇혀 있다가, 1622년 9월에 전원처형명령과 함께 우라카미를 경유하여 니시자카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일괄처형되었다. 순교자들은 선교사 및 수도사와 남녀노소의 신도들이었다. 여성과 어린이가 많이 포함된 것은 선교사들을 숨겨주었던 일가를 전원처형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예수회, 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사제 아홉 명과 수도사 몇 명은 화형, 나머지 평신도들은 참형을 당했다. 화형 당한 사람 중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일식관측을 통해 위도를 측정한 것으로 알려진 카를로 스피노라 신부가 포함되었다. 그를 숨겨준 포르투갈인 도밍고스 조르지와 그의 부인 및 어린아이도 희생자에 포함되었다. 또한 외국인 중에는 조선인 안토니오(화형)와 그의 부인 및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시 규슈지역에는 임진왜란 발발 2년 후인 1594년의 시점에서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중 약 2천 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처형광경을 지켜보던 서양화를 배운 수도사 한 명이 처형광경을 스케치한 그림이 〈겐나대순교도〉라는 것으로 예수회 본부가 있던 로마의 예수회(Jesuit) 교회까지 전달되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들은 1868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전원이 시복 되었다.
당시 처형장면을 그린 문제의 그림 겐나대순교도.
1623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쇼군직을 이에미쯔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은퇴하여 뒤로 물러나게 된다. 에도 막부의 3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미쯔徳川家光(1604-1651)는 도쿠가와 가문의 정권확립의 수단으로 키리시탄 금교령을 최대한 이용한 장군이다. 정권확립이란 전국의 다이묘들을 완전히 도쿠가와의 가문에 복종시키는 일이고 그는 키리시탄 금교령 수행의 의사를 밝히는 표시로 에도의 감옥에 수감된 하라몬도 이외의 50명을 화형에 처했다. 이를 에도의 대순교라고 한다.
당시 에도에는 쇼군 이에미쯔 장군의 취임축하식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다이묘들이 머물고 있었다. 이에미쯔는 자신의 위엄과 키리시탄 금지령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다이묘들 앞에서 50명을 처형했고 이후 박해가 더한층 강화되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이었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에도막부는 1639년 쇄국령을 발표하게 되고 청나라와 조선, 그리고 선교를 하지 않은 네덜란드만이 교역국으로 남겨두고 다른 나라와의 교류는 일체 불허하기 시작했다.
1640년대의 중반기에는 드러나는 순교사건은 없어지고 이미 키리시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짐작했으나 전국의 현상금 팻말과 금교령의 팻말은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데리우케(모든 국민은 절에 소속되는 제도)와 후미에(예수님, 성모님의 상을 만들어 밟게 하는 일)도 계속 행하여졌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그 아이의 손자에게 비밀리에 신앙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이 바로 잠복 키리스탄 隠れ キリシタン 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644년 이후 일본 국내에 가톨릭 사제가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신앙은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아주 작은 마을 단위로 비밀 조직을 만들어 몰래 기도문 오라쇼 オラショ(기도라는 뜻인 라틴어 오라 (oratio)에서 유래되었다.)을 암송했다. 이렇게 당시의 가톨릭 신도 (크리스천)와 그 자손은 겉으로는 불교도로서 행동하도록 강요되며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을 성모 마리아에 비유하거나 (오늘날 그 관음상을 마리아 관음이라고 한다.) 성화, 묵주, 십자가등을 난도가미納戸神으로 모셔 믿음을 이어나갔다. 이런 믿음을 계속 이어나간 곳은 나가사키현을 비롯한 구마모토현의 아마쿠사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