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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26 성인 기념관, 성 필립성당

그날 그 순교의 현장

by 늘 담담하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테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장 54절-60절


1597년 2월 5일(게이초 원년 12월 19일) 이른 아침. 일본 규슈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바다가 굽어 보이는 그곳에는 스물여섯 개의 십자가가 들어섰고 그 아래에는 처형을 기다리는 26명의 크리스천들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것은 1549년 자비에르가 도착한 이래, 비교적 순조롭게 퍼져나갔던 일본의 기독교 신앙이 처음으로 시련의 문에 들어선 것이며 이후 수많은 희생과 고난이 이어지는 가혹한 탄압의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었다.


그날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던 걸까? 무엇을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순교라는 것과 맞바꾸었던 걸까?


죽음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동요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이미 그들은 지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수백 년이 흐른 뒤 벚꽃이 만발한 니시자카에 선 나는 그날 그들이 마주 대했을 마지막 순간의 슬픔과 고통을 떠올리고 있었다. 앞편에서 설명한 대로 기독교의 선교에 있어, 비교적 관대했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지만 크리스천 다이묘와 크리스천 신자들에 의해 사찰이 불타 버리거나, 반대로 불교를 믿는 다이묘들에 의한 크리스천 박해가 계속 이어지고,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일본인들이 노예로 해외에 판매되는 사례가 발각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테렌 추방령을 발부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히데요시는 남만무역의 실리를 얻기 위해 대규모 박해는 하지 않았다. 일종의 묵인상태였다.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고, 크리스천이 된 일본인들이 공개적으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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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를 진행하고 있는 선교사와 일본인 사제, 그리고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2.jpg 일본인과 예수회 회원의 모습을 그린 그림-1600년경.

그러나 1596년 10월 산 펠리페호 사건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그때까지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을 180도로 바꿔버렸고 12월 8일에 다시 금교령을 공포했다. 그와 함께 예수회 이후 일본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란치스코회의 활발한 선교 활동이 금교령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당시 교토 봉행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명령하여, 교토에 있는 프란치스코 회원과 기독교인 모두를 포박하고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그것이 본격적인 탄압의 시작이었다.


그 명령에 의해 당시 오사카와 교토에 있던 프란치스코 회원 7명과 신도 14명, 예수회 관계자 3명 등, 총 24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이시다 미쓰나리는 바오로 미키를 포함하여 예수회 관계자들은 제외시키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들 24명은 교토의 이치죠우모도리바시에서 왼쪽 귓불을 자르고(히데요시의 명령은 귀와 코를 없애라는 것이었다.) 거리로 이리 끌고 다녔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모욕이며,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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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독교들이 귓불을 자른 이치죠모도리바시一条戻橋의 모습, 현재의 다리는 1995년에 신축한 다리이다.


그 이전 다리의 모습은 근처에 있는 세이메이진자晴明神社 경내에 이전 다리의 부재들을 이용해 만든 미니다리에서 볼 수 있다.

4.jpg 세이메이진자에 있는 이치죠 우모도리바시, 축소된 모습이다.


참혹한 징벌이 있은 뒤, 1597년 1월 10일 이들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이 내려진 뒤 일행은 오사카를 출발, 걸어서 나가사키로 향했다. 한 겨울에 교토에서 나가사키로 걸어서 이동하라는 이 명령은 잔인함의 극치였다.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는 오늘날 일본 철도에서 신칸센 노조미를 타고 후쿠오카현의 하카타로 간 다음 나가사키행 특급 가모메로 바꿔 타고 가도, 4시간 58분이 걸리는 현대의 철도로만 815km에 이르는 거리이다. 그 시대에 그들이 걸어간 실제의 거리는 약 1000km였고 한 달이 걸렸다.


5.jpg 순교자들의 이동 경로

교토와 오사카, 그리고 사카이를 통과할 때는 수레에 태워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것은 기독교를 믿는 이들은 앞으로 이렇게 처형될 것이라는 강한 협박이요, 본보기였다.


그들이 통과하는 지역들은 서일본지역이었고 이곳은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곳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가사키가 처형지로 선택된 것도 그런 이유이다. 당시 서일본지역에서 나가사키지역은 기독교의 세력이 가장 컸고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처음 24명이 교토를 출발해서 나가사키로 향했지만, 이들을 돌보기 위해 뒤따랐던 베드로 스케지로ペトロ助四郎와 프란치스코 키치 フランシスコ吉가 스스로 체포되기를 원하여 모두 26명으로 늘어났다. (26명 중 6명은 외국인, 20명이 일본인이었고, 이중 신부는 3명, 수도사는 6명, 그리고 일본인 평신도는 17명이었다.)


베드로 스케지로는 교토출신으로 예수회 오르간티노 신부가 순교자를 돕기 위해 파견했으나 도중에 자신도 포승을 받아 순교자의 한 명이 되었다.


또 한 사람 프란치스코 키치는 이세 출신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출신지는 확인할 수 없고, 교토에서의 박해가 시작되기 아홉 달 정도 전에 세례를 받은 사무라이 기질의 목수였다.. 순교자들이 오사카에서 나가사키로 보내질 때 일행의 뒤를 쫓아, 프란치스코 회원들을 돕기 위해 따라나섰지만 도중에 순교자의 무리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기독교인으로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겨울의 고된 여정을 이어간 순교자들은 마침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들을 맞이한 나가사키의 책임자 데라자와 한자부로 寺沢半三郎(당시 나가사키 봉행 데라자와 히로타카의 동생, 데라자와 히로타카는 훗날 히젠 가라츠번주가 됨, 나중에 가라츠성 여행 때 소개할 예정임)는 일행 중에서 12세 소년 루도비코 이바리키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너무 어린 소년이었던 것이다. 어린 소년의 죽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던 한자부로는 신앙을 버리는 조건으로 구해주려 했지만 루도비코는 "순간의 생명과 영생을 바꿀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며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26명이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곳은 니시자카의 언덕이었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골고다 언덕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처형 당일 나가사키 시내에는 혼란과 혹시 모를 소요를 막기 위해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니시자카의 언덕에는 이들을 처형하기 위한 26개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순교를 선택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 순서는 니시자카에 세워져 있는 26 성인 기념비의 오른쪽부터이다.


6.jpg 26 성인 기념비

1. 성 프란시스코 기치フランシスコ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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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미상 앞서 설명했던 대로 그는 원래 체포된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자료는 교토 출신이라고 하고, 어떤 자료에는 이세 출신이라고 하는데 목수였고 프란치스코 회원들을 돕기 위해 따라나섰다가 순교한 사람이다.


2. 성 코스메 타케야コスメ竹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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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38세, 오와리 출신으로 칼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예수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설교자로서 오사카의 수도원에서 일할 때, 마루티노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3. 성 베드로 스케시로ペトロ助四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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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출신, 당시 30세였다는 기록이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예수회 오르간티노 신부가 순교자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도중에 자신도 포승을 받아 순교자가 되었다.


4. 성 미카엘 코자키 ミカエル小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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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출신으로 당시 나이 46세, 어느 날 선교사의 강론을 듣고 영세를 받았다. 교토와 오사카의 수도원 건설에 혼자서 협력했다. 함께 순교한 토마스 코자키의 아버지.


5. 성 디에고 키사이 ディエゴ喜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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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젠 출신으로 당시 나이 64세, 이 날 순교한 예수회 수사 3명 중의 하나이며 최연장자, 형 집행자가 십자가에 달린 그를 창으로 찔렀을 때 작은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외쳤다.


6. 성 바오로 미키 パウロ三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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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수사, 당시 나이 33세, 시코쿠 아와(현재의 도쿠시마) 출신이라는 설도 있고 오사카의 셋츠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처형 당시 모여든 군중들에게 설교를 했고, 창이 가슴을 찌를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전국 시대 다이묘(大名) 미키노한다유(三木半太夫)의 아들로 1564년에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의 예수회 신학교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스물한 살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3년 후 전사했다. 그는 일본에서 최초로 순교한 예수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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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밤베르그 성 마틴 교회에 있는 성 바오로 미키의 기념상


7. 성 바오로 이바라키 パウロ茨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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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 출신으로 당시 나이 54세, 함께 순교한 성 레온 카라스마루의 형이자, 가장 어린 순교자였던 12세 루드비코 이바라키의 아버지. 이들은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이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며 이들은 조선에서 끌려와 일본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 루드비코의 나이가 6세였다. 서울의 절두산 성지에도 이 세 사람의 기념비가 있다. 숨지기 직전 "주님 당신께 생명을 바칩니다 "라고 기도했다.


8. 성 요한 고토五島の ヨハネ草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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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바오로 미키와 함께 체포되었던 19세의 청년, 처형 직전 예수회에 입교한 사실이 밝혀졌다.


"주님의 가르침을 믿고 섬기는데 게으르지 마십시오 "라고 말한 뒤 자신의 묵주를 부친에게 드렸다.


9. 성 루드비코 이바라키 ルドビコ茨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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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중 가장 어린 12세의 소년. 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순교했다. 교토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시종으로 있었다. 사제들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려 제외되었지만 스스로 잡혀가기를 청하였다.


처형 당시 "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 "라고 말하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10. 성 안토니오長崎の アントニ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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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출신으로 당시 13세,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마르틴 신부가 교토로 데려가 다른 소년들과 함께 가르쳤다. 형장에 나와 지켜보며 울고 있던 부모를 위로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11. 성 베드로 밥티스타 ペトロ・バウチス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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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출신으로 당시 48세의 프란치스코 신부, 그는 처형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처럼 양손에 못이 박혀 죽기를 원했다. 숨을 거둘 때 예수 마리아를 찬양했다.


12. 성 마르티노 데 라 아센시온 マルチノ・デ・ラ・アセンシオ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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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귀족 출신의 신부. 당시 나이 30세 "마루찌노 신부"로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박해가 일어났던 해 봄, 일본에 와서 오사카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신부는 몇 개월 만에 일본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어학에 재능이 있었고 순교할 때 십자가에서 설교한 일본어 원본이 사후에 수도복의 소매 속에서 발견되었다. 신부는 무언가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신자에게 선물로 남겨주고 자신은 주로 야채만을 먹었다. 밤에는 거의 자지 않고 기도 시간에 소비했다.


창에 몸이 찔렸을 때 큰소리로,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겨 드립니다라고 외쳤다.


13. 성 필리포 데 헤수스 フェリペ・デ・ヘス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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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부유 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당시 나이 24세.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해 멕시코로 가는 도중 조난을 당해 일본에 머물렀고 바로 체포되었다. 그가 탔던 배가 이 박해의 원인이었던 산 펠리페호였다. 처형당할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노래하면서 가장 먼저 숨을 거뒀다.


14. 성 곤 자로 가르시아 ゴンザロ・ガルシ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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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태생의 포르투갈 수도사. 당시 40세. 열여섯 살 때 일본에 예수회 사제 하에서 전도 전문가로 일하고 있지만 그 후 그 후 필리핀으로 건너 프란치스코회 수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바우찌스타 신부를 따라 일본에 왔다. 포르투갈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했다고 한다. 형장에서 창에 찔리기 전, 형리에게 회개와 개종을 권유했다고 한다.


15. 성 프란시스코 브랑코 フランシスコ・ブラン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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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태생의 프란치스코회 사제. 당시 28세. 마르티노 신부에 따르면 일본에 와서 일본어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어가 능숙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묶여졌을 때 그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가 사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16. 성 프란시스코 데 산 미겔 フランシスコ・デ・サン・ミゲ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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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태생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당시 53세. 미겔 수도사은 과묵함 때문에 "침묵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는 바우찌스타 신부에 따르면, 가르시아 수도사와 함께 왔다. 필리핀에 있던 시절, 해안에서 "일본에서 불어오는 바람 '을 배에 가득 들어마시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조용한 신앙생활을 사랑한 수도사였다.


17. 성 마티아스 マチア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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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지만 출신지도 일본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다. 일설에는 도시 출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체포 명단에 올라 있던 수도원의 "요리사 마티아스"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관리가 이름을 읽어 줄 때 바로 그 마티아스가 대답을 하지 않았고 같은 이름의 세례명이었던 그가 대신 나서, 순교자에 참가했다.


18. 성 레온 카라스마로 レオ烏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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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 출신의 전도사, 당시 나이 48세, 루드비코 이바라키의 삼촌. 도시의 병원에서 아내와 함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으로 첫 번째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이었다.


19. 성 보나벤투라 ボナベントゥ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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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출신으로 연령 미상,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세례를 받았지만 곧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 후에 새어머니는 불교 신자로서 그를 절에 맡겨 승려가 되도록 했지만 20년 후에 개종하고 크리스천으로 돌아왔다.


20. 성 토마스 코자키 トマス小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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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미카엘 코자키의 아들, 당시 나이 14세 오사카의 수도원에서 자랐다. 미래에 훌륭한 설교자가 될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미하라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21. 성 죠아킴 사카키바라 ヨアキム榊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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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출신으로 40세. 원래는 무사였지만, 병상에서 전도 전문가에게 세례를 받았다. 병이 회복하면서 감사를 위해 오사카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건설을 도왔고 그 후에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22. 의사 성 프란시스코医者の フランシス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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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고의 영주 오모토 쇼린의 주치의였고, 교토에서 세례를 받고 요셉병원에서 일했다. 교토출신으로 당시 나이는 46세였다. 일본 이름은 알려져지 않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종군 하기도 했다.


23. 설교자 성 토마스 トマス談義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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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출신으로 36세. 약재 상인. 민감한 성격이었지만 믿음으로 온후한 전도자가 되어, 약을 사러 오는 손님들에게 설교했다고 한다.


24. 성 요하네 키누야絹屋の ヨハ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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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출신의 직물업자 당시 나이 28세. 수도원 근처에 살아 당시 선교사들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다.


25. 성 가브리엘 ガブリエ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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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출신의 일본인 전도 전문가. 당시 나이 19세 원래는 교토의 봉행을 섬기는 일을 했으나 곤잘레스 수도사에 이끌려 17 세 때 세례를 받고, 도시의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양친도 크리스천이었다.


26. 성 바오로 스즈키 パウロ鈴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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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 출신, 당시 49세. 설교자로 도시 병원의 원장을 하고 있었다. 깊은 학식을 갖고, 통역을 통해 외국인 사제들의 선교를 도왔고 그 자친 프란치스코회에서 최고의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니시자카의 언덕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죽음을 알리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26명의 순교자들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그 잔혹한 운명을 그들은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순교당시.jpg 순교 당시를 묘사한 그림


그때 바오로 미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여든 군중에게 자신의 믿음에 대해 말했다.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잘 들어주십시오. 나는 필리핀사람도 아니요 틀림없는 일본인으로서 예수회의 수도자입니다. 나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죽으며, 죽는 것을 기뻐하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입니다.


나는 지금 이때를 이용해서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단언하고, 주저하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원수, 자기에게 해를 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 ( 도요토미 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도록 한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미움은 없고,오히려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은 절절한 외침이었다. 지상의 삶을 마치고 곧 하늘의 사람으로서 살아갈 그가 최후로 남긴 설교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못 박혀 있던 십자가들이 땅 위에 세워졌을 때 놀랍게도 모든 이들은 굳건한 자세를 취했다. 원장 신부는 거의 부동자세로 시선을 하늘에다 못 박아 놓고 있었다. 마르티노 수사는 "주여,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고, 프란치스코 블랑코 수사도 낭랑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감사드렸으며, 곤자로 카르시아 수사는 목소리를 좀 더 높여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쳤다.


미키는 동료 순교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격려하기 시작했다. 군중 가운데서 한 교우가 어린 루드비코에게 "조금만 있으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외치자, 그는 기쁨에 넘친 동작으로 손과 온몸을 위로 뻗쳐 모든 군중들에게 주의를 끌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순교자들은 양쪽에서 창에 찔려 하나둘씩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오전 10시경이었다.

4,000명의 군중들이 그들의 순교를 지켜보았고 나가사키 항구에 정박해 있던 포르투갈 선박들에서는 함포를 발사하여 그들의 순교를 찬양했다. 이들의 유해는 사후 많은 사람들의 손에 나눠져, 일본 최초의 순교자의 유해로 세계 각지로 보내져 숭배를 받았다.


26명의 순교는 일본보다 유럽에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그들의 순교상황을 기록한 루이스 프로이스와 같은 선교사들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26명의 순교자들은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 되어 성인의 위치에 올랐다.


다시 100년 흐른 1962년, 시성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들이 순교한 니시자카 언덕에 일본 26 성인 기념관(이마이 켄지今井 兼次 1895-1987 디자인)과 조각가 후나코시 야스타케 舟越 保武1912-2002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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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성인 기념관, 기념관 및 인접한 성당의 디자인을 한 이마이 켄지는 안토니 가우디의 연구원이기도 했다. 그는 가우디 스타일(전체의 모양과 외벽면의 타일 등)을 의식적으로 도입했다. 특히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를 의식한 성당의 특징 있는 쌍탑은 나가사키의 랜드 마크 중의 하나이다.


800px-Sagrada_Familia_02.jpg 가우디의 미완성 작품,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에 교회.

이곳에는 기념관 및 성당, 기념비가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기념관 부속 성당의 이름은 일본 26 성인 기념성당 성 필리포 교회이다. 이미 26명의 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으로 일본 26 성 순교자 성당인 오우라 천주당이 있었기 때문에 명칭을 달리 한 것이다.

26성인 기념관 부속 성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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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부 높이 2.2m 길이 6.6m의 벽면에 그려진 하세가와 로카의 나가사키로의 길, 오사카와 교토에서의 체포순간부터 나가사키의 처형까지 모두 14개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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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6명의 성인들의 축일은 일본에서는 2월 5일이나, 기존 2월 5일이 성녀 아카타 동정 순교자 축일이 있기 때문에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는 2월 6일에 성 바오로 미키와 동교 순교자들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날 이 니시카자의 언덕에서 사라져 간 26명의 크리스천들, 그들은 영원히 하늘의 사람이 되었지만 일본에서의 박해는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뒤이어 도쿠카와 막부의 가혹한 탄압, 시마바라의 난, 일본이 개항할 때까지의 길고 긴 시간들 속에서 수많은 박해들이 이어졌지만 그들은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념비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특히 루드비코가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도 죽음과 맞서는 용기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벚꽃 잎이 다시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벚꽃이 떨어지는 니시자카에서 내려와 오우라 천주당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는 오우라 천주당, 우라카미 교회와 함께 26 성인의 순교 이후 일본의 기독교 박해사를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14세의 성 토마스가 죽기 전에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할까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몇 줄 적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처형되기 위하여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신부님과 저희들은 맨 앞에 세워진 선고문 대로,24명입니다. 아버님 미카엘과 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안 계신다 해도 임종 때 범한 죄에 대하여 깊이 통회하고,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많은 은총에 대하여 감사드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현세는 허무한 것이기에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오는 어떤 것이든 잘 인내하고 커다란 애덕을 실천하십시오. 내 동생들, 만쇼와 필리버를 비신자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애써주십시오. 나는 어머님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니다. 나를 알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인사 전해 주십시오.

거듭 말씀드립니다.


어머니가 범한 죄에 대해서 깊은 통회를 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느님을 배반한 죄를 지었습니다만 통회와 보속으로 구원되었습니다. "


1597년 1월 19일 히로시마의 미하라 성에서 토마스가 어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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