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3대 명성 구마모토성
이번 편에서는 일본의 성 중 구마모토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마모토성 이야기는 워낙 방대해서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내용을 나누기로 했다.
1부에서는 구마모토성의 기본적인 설명과 함께 구마모토성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삿사 나리마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2부에서는 구마모토성을 건축한 가토 기요마사의 이야기로, 구마모토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던 정유재란의 울산성 전투와 울산마치역에 대한 이야기.
3부에서는 구마모토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이난 전쟁.
4부에서는 구마모토성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내용으로 진행할 것이다.
구마모토성은 JR구마모토역에서 A계통의 전차를 타고 10분쯤 가야 한다.
구마모토 성( 熊本城)은 제곽식 평산성으로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 중의 하나이다. 성 주변에 은행나무들이 심어져 있어서 긴난 성 (銀杏城: 은행 성)이라는 별명도 있다.
구마모토 성은 구마모토 시의 북쪽에 있는 우에키정에서 남쪽으로 뻗은 설상대지의 선단인 자스산 구릉지 일대에 축조된 평산성이다. 현재 구마모토 시 혼마루, 니노마루, 미야우치, 후루시로 정, 후루 쿄 정, 지바조 정에 해당한다.
성의 넓이는 약 98만 평방미터(도쿄돔의 21배 크기)이고, 주위 약 9킬로미터(축조당시) 안에는 3개의 천수, 성루가 49곳, 성루문이 18곳, 29개의 성문을 가진 웅대한 성이었던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1562-1611)에 의해 1601년에 착공하여 1607년에 완성되었다
주위 5.3 킬로미터의 성내에 120여 개의 우물을 팠던 이 성의 건조물들은 1877년에 발발한 세이난(西南) 전쟁으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의 천수각은 1960년에 재건된 것이다. 특이한 경사와 견고함으로 알려져 있는 구마모토성의 성벽은 '무샤가에시 武者返し(난공불락의 성벽이라는 의미)'로 불리고 있다. 또한 산 벚꽃, 이고 벚꽃, 소메이요시노 등 3종류・약 600그루의 벚꽃이 피는 “벚꽃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어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 선정되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성을 짓기 이전에도 이 지역에는 또 다른 성들이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 한국의 역사에서는 고려 충숙왕 시대에서 조선 선조 6년)에는 기쿠치 가문의 일족인 이데타 가문이 자스산에 성을 쌓았는데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 이후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1536-1588)가 이 성에 입성하였다.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도야마성 여행기에서도 또 다룰 예정이다.
삿사 나리마사는 삿사 나리무네 (佐々成宗)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삿사 나리마사는 형이 두 명이 있었지만 형들이 연달아 싸움에서 전사하였기 때문에, 에이로쿠(永禄) 3년인 1560년에 후계자로 기라성 성주가 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시종으로 들어간 삿사 나리마사는 우마마와리(馬廻, 일종의 경호대로 영주의 신병을 보호하거나 최후 결전의 병력)로 활약하여 전공을 세우고, 오다 가문의 무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여 오다군의 유력한 장수가 되었다.
텐쇼(天正) 3년 1575년 5월의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노노무라 마사시게(野々村正成), 후쿠도미 히데카츠(福富秀勝), 반 나오마사(塙直政)와 함께 철포대를 이끌었다. 철포부교(砲奉行)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여기서의 철포는 조총을 말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에치젠 정벌 이후 시바타 가쓰이에가 에치젠 영지를 받자 그곳의 한 군을 받아, 시바타 휘하에 소속되어 가가의 일향종과 싸움을 거듭하였다.
(에치젠- 지금의 후쿠이현을 말하는 것이고 삿사 나리마사는 시바타 가쓰이에의 휘하에 들어가서 가가(현재의 이시카와현)의 일향종(불교의 한 종파)과 계속 싸웠다.)
삿사 나리마사는 텐쇼(天正) 3년 에치젠 휴추 3만 3000석을 받아 에치젠 후츄를 다스린다. 이때 삿사 나리마사와 함께 마에다 도시이에, 후와 미쓰하루(不破光治)와 휴추 10만 석을 같이 받았지만, 후츄 10만 석을 받는 사람이 3명이었기에 3만 3000석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우에스기 겐신(현재의 니가타현에 있던 에치고 국의 영주)의 사망 이후 오다군이 엣츄를 점령하면서, 엣츄를 다스리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텐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죽음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호쿠리쿠 방면군은 우에스기 군의 마지막 거점인 엣츄 우오즈 성을 떨어뜨렸으나, 혼노지의 정변이 각 장수한테 전해지자 장수들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기 때문에 우에스기 군의 저지를 받게 되었고, 결국 시바타 가쓰이에의 몰락 원인이 된다.
삿사 나리마사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 시즈가타케 전투(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숙부인 삿사 헤이자에 몬(佐々平左衛門)을 지원군으로 보냈었다. 시바타 가쓰이에가 패배한 이후,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반과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압박으로 딸을 인질로 보내고 머리를 삭발하는 것으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텐쇼 12년 1584년 코마키 나카테루 전투(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권력쟁취를 위한 전투)가 일어나자 삿사 나리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으로 가담하지 않고, 여름 무렵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쓰 측에 가담하였다. 그렇게 되어, 히데요시 측에 붙었던 마에다 도시이에와의 스에모리성 전투가 일어났고, 이때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와도 관계가 나빴기 때문에 양쪽으로 공격을 당해 고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화의가 성립되자, 삿사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의 재기 독촉을 위해 히다 산맥을 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가 10만 대군으로 도야마 성을 포위하였다. 결국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카쓰의 중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히데요시의 조정으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자신의 영토인 엣츄국 동부의 니시카와 군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몰수당했다. 이후, 규슈 정벌에 참가하여 히고국을 받았으나, 히고의 호족들이 일제히 삿사의 정치에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할복 명령을 받게 되었다.
후세의 일반적인 평가로는 비천한 출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몹시 경멸했던 전국 시대의 엘리트 장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오다가문을 배신한 히데요시를 증오했고 그래서 그는 항상 히데요시의 반대편에 섰다. 이것이 그가 훗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이후,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히고국(오늘날의 구마모토현)을 영지로 받았다. 2014년에 방영된 NHK의 대하드라마 "군사칸베에"서는 당시 규슈 정벌이 끝난 후에 외지에서 온 새로운 영주들에게 반항을 하는 현지 무사들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주인공 칸베에는 물론 삿사 나리마사도 그런 저항이 예상되어 칸베에가 미리 조심하라고 언질을 준다. 그래서 칸베에는 덕으로 다스리기 시작했지만 나리마사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삿사 나리마사에게 급격한 개혁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당시 병에 걸려 있던 삿사 나리마사가 타이코겐지太閤検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이후 실시했던 토지 측량 조사)를 실시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현지 호족들이 봉기하여 반란이 발생했다. 그는 이 반란을 자력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결국 이에 대한 책임을 히데요시는 그에게 물어 할복을 명령했다. 주변의 탄원도 소용이 없었다. 그제야 삿사 나리마사는 자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쳐둔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당시 히데요시가 급격한 개혁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명령의 근거도 애매모호하기만 한 것이었고 나리마사의 토지 조사 조치도 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또 다른 학설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장차 조선과 명나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규슈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나리마사에게 영지를 하사했고 나중에 전쟁이 벌어지면 그를 선봉장으로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근거는 삿사 나리마사가 죽은 뒤 그의 영지를 분할받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 되어 출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삿사 나리마사는 구마모토성의 역사에서 사라져 갔고 그 뒤에 가토 기요마사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구마모토성을 건축하게 된다.
삿사 나리마사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애첩 사유리早百合에 관한 것이다.
나리마사에게는 사유리라는 아름다운 첩이 있었다. 나리마사는 이 사유리를 깊이 총애했는데 사유리가 임신을 하게 된다. 그것이 질투와 시기를 불러 나리마사가 성을 비웠을 때 "사유리가 간음을 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는 나리마사 님의 아이가 아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성으로 돌아온 나리마사는 이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 사유리를 진즈강변으로 끌고 가서 죽여버렸다. 뿐만 아니라 사유리의 일족 18명도 효수해 버렸다.
사유리는 죽을 때 " 나리마사! 비록 나는 이곳에 참형에 처해지지만 이 원한으로 악귀가 되어 몇 년 안 되어 네 자손을 모두 죽여 네 가문을 단절시켜 버리겠다 "라고 외쳤다.
또한 사유리는 다테야마에 검은 백합꽃이 피면 삿사 나리마사 가문은 멸망할 것이라는 저주를 남기며 죽었다고도 한다. 이후 삿사 나리마사의 가문에서는 백합을 키우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유리가 죽음을 당한 진즈강 근처에서는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면 여자의 목과 도깨비불이 출현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명확하지 않고 그저 전설의 일부로 전해지고 있지만 어찌 되었건 사유리의 원한이 결국 삿사 나리마사의 집안을 멸문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 동서고금을 틀어 여자에게 한을 품게 해서는 안되다는 교훈이라고 해야 할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