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난 전쟁과 구마모토성(1)
구마모토성을 건축한 가토 기요마사는 성안에 심어진 은행나무를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은행이 천수각만큼 자랐을 때 이 성에서 병란이 일어나겠지 "
미래를 내다본 것 같은 그의 말, 그것이 과연 진짜 했던 말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예언 같은 그 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가 성을 완성한 것이 1607년. 그로부터 270년이 지난 1877년, 구마토모성은 세이난 전쟁의 치열한 격전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성내에 있던 은행나무의 키는 대체로 천수각과 비슷했다고 한다.
자, 구마모토성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세이난 전쟁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고 가자.
"세이난 전쟁(西南戦争 세이난 센소, 한국어 서남전쟁)은 1877년(메이지 10년)에 현재의 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오이타현, 가고시마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 隆盛 1828-1877)와 그의 추종 세력이 주도하여 일으킨 사무라이의 무력 반란이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 후 설립한 사학교가 중심이 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에 사학교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메이지 초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무라이 반란 중 최대 규모였으며, 개국 이래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 역사상 마지막 내전이 되었다."
일본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에, 일단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의 일본의 상황, 세이난 전쟁의 발발 원인, 그리고 주모자라고 하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결말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이해가 제대로 될 것 같다.
일본 역사를 전혀 모르는 이들도 메이지유신이라는 사건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867년의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에도막부가 무너진 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새로운 일본 정부의 핵심세력은 반에도막부파였던 사츠마번(오늘날의 가고시마현)과 죠슈번(오늘날의 야마구치현)이었다. 이 양대세력이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에 따라 삿초동맹을 맺어 에도막부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이 양대세력은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주요 정치인들을 양산해 냈고, 구 일본 육군은 죠슈번 출신들이, 구 일본 해군은 사츠마번 출신들이 장악을 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일본 우익의 본산지가 되었고, 대표적인 인물이 이미 고인이 된 전 일본 총리 아베(죠슈번, 야마구치현), 고이즈미 전 총리(사츠마번, 가고시마현)이다.)
그런데 메이지정부가 들어선 이후 각종의 개혁정책을 쏟아내기 시작한 지, 6년이 되던 1873년. 메이지 6년의 정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은 조선에 대한 정한론으로 일어난 사건이기에 정한론 정변이라고도 불린다. 세이난 전쟁의 시작점은 바로 이 정변에서부터였다.
먼저 조선의 국서 거부사건부터 이야기하자.
1. 조선의 국서 거부사건
메이지유신으로 들어선 일본의 신정부는 당시 조선에 대해 새로운 외교 관계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 요구가 담긴 국서를 조선이 거부한 사건이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 정한론이 거론되었고 그 논쟁과 대립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츠마번출신들이 정부에 사직한 사건이 바로 메이지 6년의 정변이다.
이 정변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당시 조선의 국서 거부는 어떤 내용일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조선은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한 뒤 외국에 대한 정책에 변화가 없었다. 종래대로 청에 사대하고 일본과 교린 한다는 정책이 유지되었다. 다만 서양 세력에 대해서는 아편 전쟁 등의 예를 들어 충분한 준비가 되기 전까지 문호를 개방하지 않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대원군의 쇄국 정책이었다.
1868년 1월 15일 일본은 모든 외교권을 신정부가 접수하고 이 사실을 일본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 공관에 알렸다. 이때 조선과의 외교는 종래대로 대마번의 번주에서 관할케 한다.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주에게 일본왕실의 권위나 국체(國體)의 위엄을 손상하는 문구를 쓰지 말 것과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 일왕의 서열상 우위를 명확히 표현할 것을 요구하였다.
1868년 6월 28일 일본에서 조선으로 왕정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사절단을 구성하고, 1868년 12월 19일 조선 동래에 일본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가지고 온 외교 문서의 등본을 조선 측에 전달하였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당시 조선 조정은 1)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2)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3) 황제, "황조"(皇祚), "황상(皇上)" 같은 중국의 천자만이 쓸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접수하지 않았다. 이때의 일은 그 뒤 6년 동안 조선과 일본 정부의 외교 현안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체의 변동 등은 외교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며, 이는 외교 사절 등을 파견하기에 앞서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하는 사항이므로, 조선의 반응은 국제관례에 비추어 비상식적인 대응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외무성의 관원을 보내 근대적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일본 측 서계(書契)의 형식 및 용어가 구규(舊規)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끝내 거절하였다. 이처럼 흥선대원군이 메이지정부의 일본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거부한 이면에는 세상을 유교적 도덕이 지배하는 중화의 문명세계와 유교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야만세계로 이분하는 화이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일본을 중화문화권 밖으로 이탈하여 서구의 양이들과 같아진 야만국이라고 보는 왜양일체의 부정적 일본관이 작용하고 있었다.
2. 메이지 6년의 정변(明治六年政変)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유신지사의 리더 중 하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선의 국서거부 사건으로 일본 내부에서 정한론이 거세지자 지금껏 우리가 조선에 외무성 하급관리나 보내며 대충 상대했으니 조선이 대일외교를 건성으로 대응하는 것도 당연하다면서 조선의 요구에 맞추어 전통복식을 갖춘 거물급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정한론자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외교 사절은 자신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이고의 사절 파견에 찬성한 이들은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등이었으며, 반대한 이들은 오쿠보 도시미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 등이었다.
오쿠보는 대원군이 설득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사이고가 조선에 간 경우 반드시 살해당한다, (살해당하지 않아도 대원군이 사절을 거부할 경우 전쟁의 대의명분이 생기게 된다) 그럴 경우 결과적으로 조선과 전쟁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 당시 일본에는 조선과 청,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결국 전쟁을 하게 되는) 국력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전략적 판단, 사절단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위험한 외교적 도박에 손을 대려 하는 사이고 측에 대한 감정적 반발, 조선의 문제보다도 먼저 손대야 하는 외교안건이 존재하는 일본의 국제적 입장등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 비용문제 등도 포함해서 정한의 불리를 설득하여 연기를 주장했다.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절단 파견 문제는 백지화가 되어버렸고,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정부 인사들(주로 조슈계)의 태도에 분노한 사이고는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 고향 사츠마(지금의 가고시마 현 서부)에서 사학당을 열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기회를 엿보게 된다. 당시 사이고뿐만 아니라 사츠마계 군인과 정부요인들이 함께 낙향하여 사학교 학생들과 함께 큰 파벌을 이루었고, 이들은 사학교당(私學敎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결국 이 정변으로 세이난 전쟁발생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대립했던 오쿠보 도시미치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고 가자.
오쿠보 도시미치의 사진, 유신 이후의 모습으로 수염을 길렀고, 지독한 골초였다고 한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년 9월 26일-1878년 5월 14일)은 19세기말 메이지 시대에 활약했던 사츠마번 출신의 정치가로서 264년 동안 일본을 통치해 온 도쿠가와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유신삼걸로 불린다. 1866년 새 유신 정권이 수립된 뒤에 참의(參議)가 되어 과감한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가 하야한 뒤 메이지 유신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지조(地祖) 제도 개혁, 식산진흥책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세이난 전쟁 진압 후였던 1878년 도쿄의 기오이자카에서 이시카와현 출신의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습격당해 현장에서 절명했다. (이때 시마다 일당이 얼마나 칼을 세게 휘둘렀는지, 오쿠보의 시신이 발견된 당시 칼날이 목을 뚫고 땅바닥까지 박혀 있었다고 한다.)
같은 사츠마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대립은 결국 세이난전쟁으로 이어져 사이고가 죽는 원인이 되었고, 고향인 사쓰마 일대에서는 아직도 인기가 있는 사이고를 죽게 만든 자로 받아들여져 극도로 증오를 받은 탓에 그 시신도 가고시마 쪽에 가져와 묻을 수 없었다.
(오쿠보는 가고시마현 지방에서 사이고를 죽게 만든 천하의 간신으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정부군의 지휘관으로 등장하는 오무라의 모델이 바로 이 오오쿠보 도시미치인데 영화의 오무라는 뚱뚱한 간신배 타입이지만 실제의 오쿠보는 날씬했다.)
1868년경의 사진, 유신지사 시절의 오쿠보 도시미치
3. 전쟁 발발의 다른 요인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하야한 사이고는 1874년에, 가고시마 현 전역에 사학교(私學校)와 그 분야를 창설하였다. 사이고처럼 하야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의 통솔과 현 내의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였지만, 외국인 강사를 채용하거나 우수한 학생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외국 정벌을 위해 굳건한 군대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사학교는 당시 현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의 협력 아래 현지 정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근대화를 추진하던 메이지 신정부는 1876년 3월 8일 폐도령廃刀令(はいとうれい),, 8월 5일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를 발포하였다. 이 두 가지는 칼을 차는 특권, 녹봉의 지급이라는 구 무사 최후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며, 사족에게 정신적ㆍ경제적인 손해를 주었다. 이를 계기로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 현에서 '신푸렌의 난', 27일 후쿠오카현에서 '아키즈키의 난', 28일 야마구치현에서 '바키의 난'이 일어났다.
국민 개병제를 실행하기 위해 사무라이 무사들로 구성되었던 구 신정부군에서 무사들이 제대당하고 농민 등 평민 위주로 군대를 재편성하였기 때문에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공헌을 했고 당연히 그 대가로 신정부 군대에서 복무할 것으로 여겼던 무사들은 커다란 배신감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각 지역에서 무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은 군 주둔지를 습격하고 사령관을 살해하는 등 그 양상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신정부 사이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사학교 설립 이래, 정부는 초기에는 대책을 세우지 않았지만, 사학교 당(黨)에 의한 현 정치의 장악이 계속됨에 따라 사학교를 '반(反) 정부 지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1876년 내무대신 오쿠보 도시미치는 내각 고문 기도 다카요시를 위시한 조슈파의 맹렬한 제안에 의해, 가고시마 현 정치 개혁안을 수락하였다. 이때 오쿠보는 밖으로는 사학교, 안으로는 조슈파라는 몹시 괴로운 입장에 서 있었다. 이 개혁안은 현령 오야마 쓰나요시의 반대와 지방의 난 발생으로 대부분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실행된 것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1876년 1월, 사학교의 내부정찰과 이간공작을 위해 경시청의 가와지 도시요시 대총경이 나카하라 나오오 이하 24명의 경리를 '귀향' 명목으로 가고시마로 파견한 것이었다. 현지 사학교 학생들은 나카하라 나오오 등의 '무더기' 귀향을 수상히 여겼고, 그 목적을 알아내려 경계하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4. 전쟁의 전야
사츠마번과 신정부 사이의 갈등이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던 1877년 1월 29일, 신정부는 가고시마 현에 있던 육군성 포병 소속 창고의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옮기기 위해 비밀리에 세키류마루(赤龍丸)를 가고시마로 보내 반출하였다. 이 반출은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 장비였던 스나이더 총의 탄약 제조설비를 오사카로 반출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육군성의 조슈 파와 사츠마파의 대표자 야마가타 아리모토, 오야마 이와오가 협력해 이루어진 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스나이더 총을 주력 장비로 채용한 일본 육군에서, 그 탄약은 사츠마 번이 설립한 병기, 탄약 공장이 전신인 가고시마의 공장에서 제조되어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후장식 스나이더 총을 재빨리 도입하여, 슈세이칸(集成館) 사업의 축적으로 근대 공업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사츠마번은 영국에서 설비를 수입해 메이지 5년(1872년)에 육군성 설치 이전부터 이미 스나이더 탄약의 국산화에 성공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화약, 탄약, 뇌관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었던 전장식 총과는 달리 후장식 스나이더 총의 탄약(실탄)은 놋쇠를 주재료로 하여 수압 프레스로 성형된 탄피가 필수적이었고 이것이 없으면 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탄피 토대는 단순한 구조였기 때문에 개인 레벨의 소규모 양만 있으면 가내 생산으로 제조할 수 있었지만, 소규모라도 군이 전투에서 사용하기 위한 분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용 대량 생산 설비가 필요했고 그 정도 설비는 당시의 일본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공업 기반의 유무도 당시 일개 지방에 불과했던 가고시마와 신정부 사이의 역학관계를 균형 짓고 있던 주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옛 사츠마 번 무사들의 경우, 가고시마 창고의 화약이나 총알, 무기, 제조기계류는 번의 무사가 갹출한 돈으로 만들거나 사들인 것으로서 유사시에 필요한 경우 그 자금을 댄 번의 무사나 그 자손들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 탄약 제조 설비는 사츠마번에서 자금을 대서 만든 것인데 이것을 몰래 빼돌린 것이다.
당연히 사학교 학생들은 신정부가 '도둑'처럼 사츠마의 '재산'을 반출한 사실에 분노하였고 그와 동시에 예상되는 충돌에 대비한 무기, 탄약을 입수하기 위해 밤중에 소모타(草牟田) 화약 창고를 습격하여 총알과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 밤을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화약 창고가 야간에 습격당하는 '탄약 약탈 사건'이 연일 일어난다(사학교 학생이 입수한 것은 야마가타와 오야마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구형 엔필드 총과 그 탄약뿐이었지만). 스나이더 탄약의 제조설비를 잃은 것은 사쓰마를 상징하는 신병기였던 스나이더 총의 무용지물과 이미 구식화된 전장식인 엔필드 총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고, 후장식과 전장식의 연사속도차가 초래하는 결정적인 전력차를 보신 전쟁에 임전했던 사이고를 비롯한 많은 사쓰마 사족들은 직접 체험하여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때 사학교 학생들이 가져간 것은 약 84000발의 탄약과 다수의 소총이었다. 또 사학교 측에서는 이 이외에도 탄약의 비축을 실시하고 있으며, 세이난 전쟁을 통해 사츠마군이 사용할 수 있던 탄약은 약 300만 발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월 30일, 사학교 간부 시노하라 구니모토, 고노 슈이치로, 다키 시치노조 등 7명은 회합, 다니구치 도타에게 나카하라 등 경시청의 내탐을 의뢰하여 같은 날 저녁, 다니구치의 정보로 나카하라 일행의 귀향은 사이고를 암살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정보를 듣게 된다.
시노하라, 후치베 군페이, 이케노우에 시로, 고노 슈이치로 등 사학교 간부는 선후책을 의논하여 고네지메(小根占, 현재 미나미오스미정)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그의 넷째 동생 사이고 고베를 파견하였다. 또한 탄약 약탈 사건 소식을 접하고 요시다무라(吉田村)에서 가고시마로 돌아온 기리노 도시아키는 시노하라 구니모토 등과 담합하여, 2월 2일 헨미 주로타 등 3명을 고네지메로 파견 보냈다.
사이고 고베와 헨미에게서 탄약 약탈 사건의 전말을 들은 사이고는 'ちょしもたー(아차)!' 하고 중얼거렸고, 암살 계획의 소문으로 비등한 사학교 학생들을 수습하기 위해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이고를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사학교 학생이 급히 몰려와,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에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2월 3일, 사학교당은 나카하라 등 60여 명을 일제히 포박, 가혹하게 고문한 결과 가와지 대총경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암살하도록 나카하라에게 지시했다는 '자백서'를 받아냈고, 많은 사학교 학생들이 격앙하여 폭발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후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당시 신정부는 암호를 사용하여 전보를 전달하며 사학교당의 동태를 감시했는데 사이고를 보오즈(坊主)라고 불렀다. 사학교당은 전보의 내용을 입수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보오즈오시사쓰세요>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래 뜻은 <보오즈를 시찰(示察:시사쓰)하라> 라는 의미였다고 하나, 사학교당에서 <보오즈를 척살(刺殺:시사쓰)하라>라는 뜻으로 잘못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보는 한자가 아닌 가타카나로만 수신되어 버려서 생긴 오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포박된 나카하라가 사이고 암살 계획을 '자백'하여 흥분한 많은 사학교 학생은 사이고 암살계획을 의심 없이 믿었지만, 다니구치가 이를 암살계획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사이고를 '시찰(視察)'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나카하라의 말을, 냉정한 인간이라면 '시찰'이라 알아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카하라를 줄곧 의심하고 있던 다니구치가 '척살 (刺殺)'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고, 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추측하고 있다.('시찰'과 '척살'은 일본에서 똑같이 'しさつ'로 발음된다) 다니구치 도타는 사쓰마 군 괴멸 후에도 살아남아 체포, 투옥된 후에 가고시마에서 살았으며 1933년에 죽을 때까지 사이고 암살 계획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사츠마번의 입장에서 보면, 에도막부를 무너뜨린 핵심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권아래에서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낙향한 자신들에 대해 정부의 탄압과 배신에 분노하였고, 에도 막부집권시기에는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지만 유신 이후 궁핍한 처지로 몰려 있던 사무라이 세력들의 반감이 더해져, 신정부와의 대결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