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난 전쟁과 구마모토성(2)
메이지 신정부가 사이고의 낙향 이후 그를 계속 감시한 이유는 만일 사이고 다카모리가 거병을 할 경우 전국 40개현의 무사들이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이고와 사쓰마 무사 군의 반란 결행에는 이런 예상이 깔려있었다. 일차적으로 사이고 군대가 내세운 목표는 <조정의 간신을 물리치고 사이고 선생님의 충의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그분을 모시고 상경한다> 였으며, 결과적으로 신정부군의 평민 위주의 군대의 무력함을 증명하여 사무라이들의 입지를 재정립하고, 군사력을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유리한 방향으로 확대해나가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즉 군사력을 통한 기득권과 정국주도권의 획득에 그 목적이 있었다.
전쟁의 깃발이 올라가자, 가고시마 각지에서 무진전쟁 당시의 군복부터 평범한 기모노를 입은 무사들이 소장했던 총이나 칼 한 자루만이라도 들고 집결했고, 사이고를 따라 낙향했던 간부들이 사이고에게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자 "그대들이 그런 마음이라면 나의 몸을 내어줄 따름"라고 하며 1877년 2월 15일 마침내 사이고 다카모리는 거병한다.
전쟁 발발 직전까지 사이고는 다카모리는 전쟁보다는 일종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체제를 무너뜨린 주역으로서 그는 같은 유신 동지였던 오쿠보와 직접 만나서 사족들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무라이 계급에게 처해지고 있는 일련의 처사를 해결해 보려고 했으며, 무력에 의한 전면 전쟁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장차이가 워낙 차이가 있었다. 사이고는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이 새로운 통치자로 복귀했지만 여전히 사무라이 계급이 새 정부의 주도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오쿠보는 사무라이 계급이 갖고 있던 모든 특권을 폐지하고, 평민 중심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입장이었다. 한편, 오쿠보도 가고시마로 직접 가서 사이고와 만나려고 했지만, 그러면 반드시 암살당할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이 둘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2월 5일에 향후의 행동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수뇌부의 의견은 엇갈렸다. 일부는 죄를 묻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부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3명이 상경(지방에서 도쿄로 가는 것 혹은 천황이 있던 교토로 가는 것)하여 당시 정부를 힐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상경 도중에 정부가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안된다는 반대가 있었다. 결국은 군대의 출병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쓰마는 중앙정부에 지극히 반항적이었다. 또한 사쓰마 무사들은 거친 것으로 일본 전체에서 명성이 높았다(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싸웠던 이가 바로 사쓰마의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
앞서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시작된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쓰마 세력은 계속된 메이지 신정부의 간섭과 압박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봉기한 사이고의 반란군은 연전연승으로 규슈 일대의 정부군을 대부분 격파, 전투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런데 규슈의 중심부 구마모토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난공불락의 요새 구마모토성이 버티고 있었다. 축조로부터 무려 200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천혜의 요새로 건재하여 정부군은 이 성을 거점으로 사이고의 반군을 가로막고 농성전에 돌입한다. 반란 초기의 구원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다.
사이고가 이끄는 파죽지세의 사쓰마 반군도, 재래식 방어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이 성을 두고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이고 군은 숫적인 우위와 함께 서양에서 공수받은 최신식 총, 화포 및 근대적 전술과 사무라이 정신까지 겸비하고 있었으나 구마모토성의 철벽 방어를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사이고의 사쓰마 1만 3천 대군은 성을 포위하고 밤낮없이 포화를 퍼부으며 사력을 다해 맹공했다. 그에 비해 농성하는 정부군은 고작 3천. 사쓰마 군은 설령 성의 방벽 돌파에 실패하더라도 보급선을 끊어 성 내의 정부군을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여기에 성 내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해 천수각이 소실되는 등 수비 측 정부군에게는 재앙이 겹쳤다. 성 주변의 곳곳에서 크고 작은 격전이 벌어졌으며 사쓰마군이 강물을 성 주변으로 끌어들여 서쪽과 동북쪽을 호수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전선은 더욱 좁혀졌다.
포위 공성전은 50여 일이나 지속되었고, 마침내 본토에서 편성된 정부군이 구마모토성에서 농성 중인 정부군을 구원하려 내려왔다.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결국 정부군은 구마모토성에 입성하여 더욱 강력하게 사쓰마 반군을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구마모토성 전투로 사망한 양측 병력의 숫자만 1만 2천 명. 끝끝내 난공불락인 구마모토성 함락에 실패한 사쓰마 반군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결국 다시 근거지로 패주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 견고한 성을 공략하는데 실패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세이쇼 공에게 진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 '清正'를 음독하면 '세이쇼'가 된다)
구마모토성 포위전이 진행 중이었던 시점에서 사쓰마군 전위대는 정부의 구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노기 마레스케가 지휘하는 고쿠라 제14연대를 3번에 걸쳐 연파하였으나 연락수단의 부재로 추격섬멸에 실패했다. 그러던 와중 정부군이 타카세 방면에 집결 중이라는 정보를 얻은 사쓰마군 주력이 타카세로 진격하여 서남전쟁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전력을 회복하여 사쓰마군이 물러선다. 사쓰마군은 구마모토성 북방의 키치지 고개, 타바루자카, 야마가, 미노타케, 가와치 해안에 이르는 약 40km의 방어선을 구축, 특히 타바루자카와 키치지 고개 사이에는 참호와 화력거점을 설치한 참호선을 구축했다.
신정부군은 하루라도 빨리 구마모토성을 구원해야 했기 때문에 타바루자카 정면에 대한 총공격을 결의한다. 1877년 3월 3일 타바루자카를 주공, 키치지 고개를 조공으로 삼아 돌격을 개시하지만 사쓰마군의 십자포화, 참호에 육박하면 발도 돌격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여 공세는 돈좌된다. 그러나 사쓰마군도 키치지 고개를 방어하던 1번 대대장 시노하라 구니모토(篠原国幹)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정부군은 이에 대해 타바루자카를 공세중점으로 삼아 물량을 동원한 화력전으로 맞섰으며, 이때의 탄약소비량은 일일평균 32만 발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대다수는 징집된 평민병사들로써 화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효과도 부족하고 특히 발도 돌격만 시작되면 어찌할 도리를 모르고 참살당하거나 도주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에 경찰 발도대를 편성하고 사족 출신이 많은 포/공병에서 저격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타바루자카 측면 요충지인 요코히로야마 점령에 나섰다. 사쓰마군도 요코히로야마 방어를 위해 7 연발 스펜서 연발총 40정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발도대의 발도 돌격과 저격대의 정확한 사격 속에 마침내 요코히로야마를 점령하여 타바루자카 방어선 돌파를 실행하게 된다.
3월 20일, 타바루자카를 남쪽에서 우회하여 사쓰마군의 7번 포대를 기습한 정부군은 폭우로 방어선이 약화되고 사쓰마군이 쓰던 전장식 소총의 불량률이 높아진 점을 이용하여 전선 돌파에 성공한다. 이로써 타바루자카 방어선은 함락되지만, 사쓰마군이 재역습을 감행하여 사쓰마군 전선은 다시 고착화된다.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한 것은 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군으로, 사쓰마군은 결국 방어선을 포기하고 퇴각, 4월 15일에 구마모토성은 해방된다.
야시로 만에 상륙한 정부군을 의식하여 타바루자카를 포기한 사쓰마군은 부대 재편성을 수행하고 히토요시(人吉) 방면에서 방어를 꾀하지만 정부군은 1877년 5월 하순부터 히토요시 방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 6월 1일 히토요시가 함락되면서 방어선이 무너진다. 사이고는 히토요시 함락 전에 이미 가고시마현 청사가 있던 미야자키로 이동, 독립정부를 선포하고 각 방면의 방어를 지시했다.
정부군의 전단, 투항하라는 것과 투항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내용
예하 사령관들이 지형에 익숙하다는 장점을 살려 게릴라전으로 정부군에게 몇 차례 승리를 거둘 때까지는 좋았으나, 결국 후장식 소총을 보유한 정부군에 비해 사쓰마군은 전장식 소총을 보유했고, 병력 자체가 워낙 차이가 심했기 때문에 결국 총공격이 이루어진 7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사쓰마군의 각 방어선은 함락, 대대적인 패주가 이루어진다. 미야자키도 8월 14일에 함락, 궁지에 몰린 사쓰마군은 잔존병력은 겨우 3000, 그에 비해 정부군은 7개 여단 35000명에 달하는 병력의 차이가 있어 이대로는 패배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사쓰마군은 최후의 발도 돌격을 결의한다.
정부군이 주재하고 있는 논밭 지역과 구마다 분지를 감싸고 있는 에노다케~와다고에 능선은 약 40m의 높이를 가진 곳으로 사쓰마군이 방어를 하든, 정부군이 방어를 하든 어차피 와다고에 능선을 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쓰마 군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직접 독전을 하는 가운데 8월 15일 오전 8시, 최후의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다. 총병력 3000에 대포 3문에 불과한 장비로 감행한 발도 돌격은 예상외로 정부군의 화력의 우세를 제압하고 정부군 제4여 단과 별동 제2여단을 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곧 시작된 정부군의 함포 사격을 통해 사쓰마군의 포대가 파괴되고, 화력의 우세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 정부군의 공세에 정오 즈음에는 대략 승패가 결정, 사쓰마군 잔존병력은 능선을 타고 에노다케 방면으로 도주를 개시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공세가 실패로 돌아갈 즈음 칼을 빼들고 싸우다 죽겠다고 나섰으나, 간부들이 강제로 팔을 붙들어 에노다케 방면으로 끌고 도주했다고 한다.
와다고에에서 승리를 거둔 정부군은 8월 16일 새벽 부대를 정비하면서 제2여단, 제3여단을 동원하여 사쓰마군의 도주로인 에노다케 방면으로 진출, 제1여단은 에노다케에 출장본영을 설치하여 사쓰마군의 퇴각에 대비했다. 북쪽에서는 구마모토 진대병력과 경찰 발도대가 진입, 별동 제2여 단과 제4여단은 각각 와다고에에 진주, 강을 건너 가와시마를 넘어 감으로써, 사쓰마군은 정부군에게 타와라노 방면에서 완전포위를 당했다.
사쓰마군은 8월 17일 오후 10시경 전 부대를 전, 중, 후 3 제대로 나누고 정부군 1 여단이 출장본영을 설치한 에노다케 방면으로 돌진, 1 여단 출장본영을 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다음 포위망을 돌파해 시로야마(城山)로 도주한다.
에노다케 돌파 이후 22일간 사쓰마군은 행방이 묘연하였으나 실제로는 능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총 225km의 거리를 거쳐 옛 사쓰마의 수도인 가고시마로 향하고 있었다. 9월 1일 가고시마에 도착한 사쓰마군은 곧 사학교 건물에 주둔하던 정부군 치중대를 습격, 물자를 탈취하여 가고시마 북쪽의 시로야마에 진을 친다. 정부군은 가고시마를 4월 27일에 이미 점령하였으나 후방으로 보고 설마 사쓰마 군이 오겠나 싶어 소수의 병력만을 두고 있다가 당한 것이었다. 사이고와 사쓰마 군의 복귀를 기뻐한 가고시마 시민은 즉시 봉기하여 경찰, 군인, 관리들을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시로야마에 주둔한 사쓰마 군에 합류했다.
용기를 얻은 사쓰마군은 현청 부근에서 농성 중인 정부군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심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잔존병력은 부상자를 포함하여 370여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정부군은 속속 가고시마에 도착, 5만~7만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대군으로 시로야마를 완전 포위, 5중의 포위망을 구축하여 절대로 돌파할 수 없게 만든 다음 연일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사쓰마군은 참호를 파고 버티면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구명을 위해 간부회의를 거쳐 정부군에 사신을 보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휘하의 정부군은 사이고에게 자결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 또한 9월 24일까지 항복하지 않을 경우 총공격을 개시하겠다는 경고를 추가했다.
9월 24일 오전 4시, 3발의 신호포격을 시작으로 정부군은 총공격을 개시한다. 공격 2시간 만에 시로야마의 방어진 지는 모두 함락되고, 시로야마의 미야자키 타니에 구축한 동굴에서 14명의 병력이 최후의 발도 돌격을 감행하여 분전하였으나 모두 사망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분전 중 총상을 입자 더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무라이로서의 최후를 결정하고 할복 준비를 했다. 그는 옷을 바로 하고 동쪽으로 절을 한 다음 할복을 시작하자, 가이샤쿠(할복자살하는 사람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목을 자르는 역할)를 맡은 벳푸는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죄송합니다"하고 외치며 칼을 내리치고 자신도 곧바로 할복했다.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 사쓰마 간부들은 전원 사망, 세이난전쟁은 끝을 맺게 된다.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냈던 유신 3 걸 중의 하나였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는 그렇게 쓸쓸했다.
이 전쟁에서 사쓰마군의 발도 돌격의 위력을 경험한 정부군은 백병전을 경시하던 방침을 버리고 일본식 검술을 다시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하는 논의가 분분하게 되었고, 프랑스식 검술의 무력함도 함께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검술은 제대로 배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껏해야 3년 근무하던 당시 일본 징병제 하에서는 하나마나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또 정작 사쓰마-조슈 군도 무진전쟁에서 막부군을 패퇴시킨 비결은 후장식 총과 암스트롱포 등의 화력 우위였다는 점도 있어 1차 대전 이전까지 백병전보다는 화력에 집중하는 형태의 군대가 되었다.
막부 편을 들었던 아이즈 번에 비해, 사쓰마는 유신웅번이었고 사이고 계열이 아니더라도 군경에 사쓰마 출신자들이 많았던 탓에 달리 차별은 받지 않았다. 사이고를 배척하고 진압군으로 활약한 오야마 이와오는 훗날 일본 육군 원수 직위에 오르는 등 사쓰마 계열의 출세도 이어졌다.
이때 이후로 규슈에서 기승을 부리던 이른바 <사족반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일본 제일의 사무라이로 기대를 받았던 사쓰마 군대조차 참패했다는 점이 무사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 그 대신 사족들은 자유민권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특정 계파들이 장악한 정부를 양당제의 입헌군주국으로 만드는 운동을 전개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만 해도 총기류나 도검류의 사적 소지에 큰 제한을 두지 않았고, 이는 사족들의 정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또 전장식의 소총은 후장식의 정부군의 드라이제 후장식 소총이나 샤스포, 스나이더 총기의 위력으로 쉽게 제압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쓰마군이 전장식 구형 소총으로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준 것 때문에 이후는 민간인의 총기 소지에 간섭을 많이 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일본육군의 유일한 대장으로 군 총사령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카리스마도 대단했다. 모든 직위를 내던지고 낙향했지만 육군 대장 직급은 그냥 유지했을 정도. 일본은 정부군이 보여준 추태가 정신적 구심점이 없고 정신교육이 없어서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 최고원수를 덴노로 규정, 정신교육 면에서는 군인칙유 등의 봉건적 요소가 가득한 표어를 내리는 방식으로 향후 정신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본군의 군 교범을 만들어내는 시발점이 되었다.
전쟁에서는 졌어도 지금까지 가고시마현에서는 세이난전쟁과 사이고를 옹호하는 지역 여론이 강한 편이다.
전투 도중 소실된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1960년에 가서야 복원되었다.
이렇게 세이난 전쟁 편은 끝이 났다. 다음 편부터는 구마모토성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세이난 전쟁이 모델이었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할 것이다.
지금까지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가고시마 여행 편에서 이야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