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성을 돌아보다(2)
천수각이 있는 앞마당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은행나무이다. 구마모토성이 은행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을 낳게 한 은행나무, 앞서 설명했듯이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에서의 굶주림을 기억하여 성에 은행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식량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가토 기요마사
하지만 이 나무는 수컷으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가 은행나무를 심으며 했다는 말, 즉 이 나무가 천수각 높이만큼 자랐을 때 구마모토성에 병란이 닥칠 거라고 했다는 말은 실제 그런 말을 했는지의 사실 여부를 떠나, 기록상으로 세이난 전쟁 발발 시 실제의 나무 크기가 그 정도 높이까지 자랐다고 한다.
다만 세이난 전쟁 때 이 천수각 주변은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그 나무는 소실되어 버렸다. 현재의 나무는 그 이후 싹이 터서 현재에 이르렀다고 추정되고 있다. 다음으로 구마모토성을 방문하게 되면 확인하게 되는 것이 우물이다.
이 우물의 깊이는 36m이다, 현재 성안에는 17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성을 건축할 때 팠던 우물의 개수는 120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얼마나 울산성에서 물이 없어 고통받았는지 그 많은 우물을 판 것이다. 이 우물은 세이난 전쟁 때 정부군이 포위되었을 때도 매우 유용한 것이었고 정부군의 승리에 한 요인이 되었다.
1875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스키야마루에서 찍은 소천수각과 대천수각 그리고 우물이 보인다. 대천수각은 석벽으로부터의 높이가 약 29.5m 외관은 3층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6층, 지하 1층의 구조이다. 소천수각은 대천수각 건축 이후 만들어졌고, 석벽 위로부터 높이가 19m 외관 2층, 내부 4층, 지하 1층이다. 소천수각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기요마사가 다른 성에 머물렀지만 불만스러워 그 성의 천수를 해체하여 구마모토성으로 이축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의 소천수각이라고 한다. 천수각의 내부는 현재 1층은 가토 기요마사 가문, 2층 호소카와 가문, 3층은 세이난 전쟁 시의 자료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소천수각과 대천수각은 1960년에 복원되었다.
구마모토성 천수각의 특징은 사면에 배치한 지도리하후(千鳥破風)와 최상층의 남북에 만들어진 가라하후(唐破風)라고 불리는 건축양식이다. 「무기방」이나「갑옷·투구방」,「화살방」 등 전쟁 도구의 이름을 딴 방 명칭이 붙여져 있으며, 에도시대에는 무구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소천수의 석축 위에는 시노비가에시(忍び返し)라고 불리는 적의 침입을 막는 쇠꼬챙이가 설치되어 있는 등 세밀한 곳에 전쟁을 대비한 장치가 있었다.
*치도리하후
치도리하후(千鳥破風)는 성 등 일본의 건축물에서 장식적으로 사용되는 파풍의 일종이다. 파풍이란 두 방향으로 경사진 지붕이 합쳐져 옆에서 보면 삼각형을 이루는 부분을 말한다. 책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맞배지붕이나 아랫부분이 맞배지붕이고 윗부분이 맞배지붕인 팔작지붕에서는 자연스럽게 풍파가 생긴다. 건물의 구조상으로는 필요가 없으나 외관을 좋게 할 목적으로 지붕 위에 곁들이는 파풍도 있어 이를 지도리하후이라 부른다. 천수나 노 등의 지붕 위에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샤치호코, 지붕 장식물이다 샤치호코(머리는 호랑이, 등에는 가시가 있는 상상의 물고기,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는 화재 방지나, 액막이 등으로 주로 지붕을 장식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 전시물은 소천수각의 샤치호코로서, 복제품이다.
에도시대의 구마모토성의 조감도
대천수각과 소천수각의 모형도
구마모토성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이다.
세이난 전쟁 때 사용되었던 소총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런 소총을 들고 전쟁을 했을 때, 당시 조선은 어땠을까?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씁쓸하다. 이제 천수각을 벗어나서 혼마루고텐으로 옮겨갔다. 정식명칭은 本丸御殿大広間 혼마루고텐오히로마. 2008년 4월에 복원 공개한 곳으로 혼마루고텐은 번주의 거실 혹은 접객장소, 부엌등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재현된 이로리, 조리를 위해 숯이나 장작으로 불을 피웠던 곳이다.
이 요리하는 방의 이름은 오온다이도코로, 상부에는 연기가 빠져나가는 공간이 있다.
에도시대의 혼젠요리, 1860년, 번주의 축하의식에 나온 요리를 재현했다.
복원된 공간, 접견이나 연회의 장소로 쓰였다.
바깥 툇마루
안뜰, 옛날의 평면도에는 이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번주의 족자, 번주의 고용화가인 야노셋소가 그렸다는 그림, 왼쪽은 아침 해, 오른쪽은 독수리이다.
번주의 접객 공간, 와카마츠로마라고 불리는 방이다.
가장 안쪽의 공간인 쇼쿤노마昭君之間, 벽에 그려진 그림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왕소군의 그림이다. 이 방에는 우구이스바리(적의 침입을 알리는 복도)와 밖으로 통하는 숨겨진 통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번주의 거실로 사용된 것 같지만, 이설에 따르면, 유사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방이라고 한다. 〈쇼쿤(昭君)〉 = 〈쇼군(将軍)〉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고 당시에는 탁점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로 쓴다면 같은 자가 된다. 표면상 패자(覇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순의 예를 나타냈지만, 히데요시의 은덕을 잊지 못하는 기요마사의 충의를 엿볼 수 있다.
호화스럽게 그려진 천장의 꽃과 나비
혼마루고텐에서 나와서 바라본 구마모토성의 천수각.
이 혼마루고텐은 두 개의 돌담사이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지하공간이 있다. 이런 지하 공간을 갖고 있는 경우는 일본에서 구마모토성이 유일하다.
천수각 서쪽의 구루와(曲輪)는 일찍이 가토 헤이자에몬(加藤平左衛門)이 맡은 것에서 헤이자에몬마루라고 불렀다. 이 구루와에는 대천수, 소천수와 함께「제3의 천수」라고도 불리는 국가 지정 중요문화재인 우토야구라(宇土櫓)가 에도시대부터 현존해 있다.
혼마루 서북쪽에 있는 우토야구라(宇土櫓)는 축성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다중 망루이다. 3중 5층 지하 1층의 구조로 천수에 버금가는 규모와 구조 때문에「제3의 천수」라고도 부른다. 메이지 초 무렵까지는 그 밖에도 4동의 고카이야구라(五階櫓)가 있었으나 현재는 우토야구라만이 남아 있다. 우토야구라라는 명칭은 우토 성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5년-1600년)의 옛 신하를 이 망루의 근처에 둔 것으로 명칭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2016년 구마모토 지진에서는 우토야구라 남쪽의 쓰즈키 야구라(続櫓)가 도괴하는 피해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구마모토성의 변천과정
가토 기요마사가 건축한 구마모토성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성들이 겪었던 과정을 그대로 밟아갔다. 대개의 일본 성들은 메이지유신 이후 군 병영이 설치되거나, 망루와 문들을 해체하여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거나, 주요 장소에는 현청, 병원, 학교등이 건립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구마모토성도 니노마루를 중심으로 1875년 보병 제13연대, 1925년 구마모토 육군교도학교, 1943년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가 생겼다. 또한 그 근처의 현재 감물대 수목원 자리에 구마모토 육군유년학교(1897년 9월 1일-1927년 3월 31일)가 생겼다. 니노마루와 고성 사이는 에도시대에는 다이묘야시키(번주의 저택)였지만, 는 육군병원이 되었다. 1945년부터 국립구마모토병원, 그 후에는 국립병원기구 구마모토 의료센터가 되었다. 1871년의 폐번치현 후는 구마모토현의 현청이 니노마루에 역시 건립되었다. 구마모토성이 결정적으로 제 모습을 잃은 것은 앞 편에서 설명한 대로 세이난 전쟁 때였다. 1877년 2월 19일 오전 11시 40분부터 오후 3시까지 원인 불명의 화재로 대소천수각등 건물(동시에 30일간, 성 아래 민가 약 1000채)들이 불타버렸다.
*구마모토 지진
2016년 4월 14일 21시 26분경 일어난 구마모토 지진은 여러 피해를 가져왔다. 구마모토성도 지진의 피해를 받아 최소 6곳 이상의 돌담과 중요 문화재의 담 100m가 무너져 버렸다.
2021년에 천수각의 복구공사는 끝이 났지만 현재도 구마모토성의 복구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완전 복원은 2052년에 끝이 날 예정이다.
이렇게 해서 구마모토성을 돌아보았다. 이 여행에서 내가 돌아본 구마모토성은 전체에서 일부 지역이다. 물론 천수각이나 혼마루고텐 같은 핵심 부분을 보긴 했지만, 전체 성을 다 돌아보지는 못했다. 그 점이 매우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간다면 전체적인 모습을 다 돌아볼 생각이다.
다음 편에는 구마모토성의 남은 이야기를 끝내고, 그다음에는 일본의 성 이야기만 계속하면 지루해져서 일본의 미술관 여행기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