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 사립 미술관
오카야마현 구라사키에 간 것은 오하라 미술관 때문이었다. 지금은 인천-오카야마 공항 항공편이 있지만 이 여행 당시에는 오카야마현으로 가는 직항 편이 없어, 히로시마 공항을 이용했다. 히로시마 공항에서 히로시마로, 다시 히로시마에서 구라시키까지 신칸센으로 이동했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세워진 오하라 미술관은 설립자인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 孫三郎 1880-1943)와 서양화가 고지마 토라지로(児島虎次郎 1881-1929)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워진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11년 전인 1930년에 건립된 이 미술관은 한 해전인 1929년에 마흔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지마 토라지로를 위한 미술관이기도 하다.
오하라 미술관은 생전의 고지마 토라지로가 수집한 서양 미술, 이집트등의 중근동미술, 중국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서양 미술과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는 일본 최초이다. 좀 더 설명을 하자면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 서양 근대 미술을 주제로 한 박물관이 많이 탄생했지만, 독립 미술관이라는 것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뉴욕 현대 미술관의 개관이 1929년이었고 도쿄의 국립서양 미술관이 1959년에 설립된 것을 감안하면, 오하라 미술관의 설립이 얼마나 앞서간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모네, 고갱, 마티스, 엘 그레코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서양 미술사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화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도 , 그리고 이 미술관이 있는 곳이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 구라시키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뉴욕 현대 미술관의 전경)
(뉴욕 현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1889년작.)
구라시키시가 정식으로 출발한 것이 1928년이었음을 비추어볼 때, 어떻게 그 시대에 미술관을 설립할 생각을 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놀라운 미술관을 설립한 오하라 마고사부로와 고지마 토라지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전에 미술관의 입구 양 옆에 세워져 있는 2개의 조각품을 살펴보자..
먼저 왼쪽에 있는 조각품은 로댕의 작품인 세례자 요한이다.
오른쪽에 전시된 작품은 역시 로댕의 작품인 칼레의 시민-Jean Daire.
백년전쟁에서 벌어진 유명한 칼레의 여섯 명의 시민이야기 중에 칼레의 열쇠를 가지고 온 Jean Daire를 묘사한 것으로 칼레의 시민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이 칼레의 시민이 제대로 다 모여 있는 것을 보려면 도쿄 국립 서양 미술관에 가면 된다.
(도쿄 국립 서양 미술관에 있는 칼레의 시민)
이 세례자 요한과 칼레의 시민은 1922년에 고지마 토라지로가 로댕미술관에 주조를 요청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오하라 미술관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1939년에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2년 뒤인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일본이 생각한 전쟁은 초기에 바로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전쟁의 양상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전쟁 초기 일본은 승승장구했지만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일본에게 불리해져 갔다.
그러던 1943년 여름, 전황이 악화일로로 치닫던 그 시기에 일본 각지에서 소위 공출이라는 것을 시행하게 되었다. 생필품 부족과 전시 무기제조에 필요한 금속류 등을 공출이라는 형식으로 제공해야 하는데 오하라 미술관의 소장품인 세례자 요한과 칼레의 시민도 예외 없이 공출 대상 목록에 올라갔다. 당시에 절의 불상이나 각 지역에 세워진 동상, 하다못해 교복단추까지 뜯어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던지라, 오하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이 로댕의 작품들도 졸지에 용광로에 들어가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하지만 1943년 가을에 공출 대상에 심의를 하던 오카야먀현의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들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면서, 기적적으로 공출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오카야마현에 있던 170개의 동상들 중에서 공출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세례자 요한과 칼레의 시민을 포함해서 7개뿐이었다.
자 이제 다시 이야기를 오하라 마고사부로와 고지마 토라지오에게로 옮겨가보자.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1880년 7월 28일에 구라시키의 대지주이자, 구라시키 방적을 경영하고 있던 오하라 코지로大原 孝四郎(1833-1910)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사진)
그의 집안은 1861년에서 1863년 사이에 구라시키의 촌장을 맡았고, 메이지시대(1868-1912) 중반에는 약 800헥타르(242만 평)의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부를 바탕으로 1887년에는 구라시키 방적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해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도쿄 전문학교(현재의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이 시기의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는 위로 2명의 형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요절을 하는 바람에 그가 오하라 가문을 잇는 상속자였다. 부유한 집안과 상속자, 이런 환경이 그의 삶에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는 전문학교의 수업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나중에는 현재 가치로 약 1억 엔의 빚까지 질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그의 부친은 도쿄로 쫓아와 전문학교를 중퇴시키고 나서 그를 구라시키로 끌고 갔고 그에게 근신처분을 내리게 된다.
이 근신처분은 그의 삶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가져다준다. 이 근신기간 중에 그는 자신의 삶을 바꿔줄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시이 쥬지 石井十次(1865-1914)이다. 이시이 쥬지는 일본에서 맨 처음으로 고아원을 설립해서 훗날 오카야마의 4대 성인, 혹은 일본 아동복지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사람이다.
(미야자키현 종합문화공원에 있는 이시이 쥬지의 동상)
(이시이 쥬지,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드물게 173cm의 키에 83kg의 몸무게를 가진 건장한 체격이었다.)
이시이 쥬지는 1865년 5월 규슈의 타카나베번(현재의 미야자키현)의 하급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결혼을 한 뒤, 17세 때 고향을 떠나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오카야마로 이주해 왔다. 오카야마에서 그는 기독교에 입교를 했고 그 해 오카야마 갑종 의학교(현재의 오카야마 대학)에 입학했다. 2년 뒤인 1884년 그는 오카야마 기독교(현재의 일본 기독교단 오카야마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887년에 그는 우연히 만나게 된 미망인과 그의 세 자녀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한 아이를 맡아 기르게 되는데 그 후 아이들이 늘어나자 의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영국인 목사 죠지 뮐러를 모델로 삼아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고아 교육회(훗날의 오카야마 고아원)를 창설하게 된다.
(1906년경의 오카야마 고아원, 이때의 수용인원은 1200명이 넘었다.)
그의 부친은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 일본 사쓰마번출신의 정치가이자 무사, 메이지유신의 주역, 1877년 세이난전쟁에서 패해 자결, 우리에게는 1873년에 주창한 정한론으로 잘 알려진 인물)를 따라 세이난 전쟁에 참전한 바 있고 이시이 쥬지도 정부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50일간의 구류를 경험했을 정도로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던 타카나베번의 영주였던 아키즈키 타네시게(1744-1819)는 번정을 개혁하고자, 명륜당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이곳에는 사무라이외에 일반 백성들도 다닐 수 있게 했다. 이시이 쥬지도 어린 시절 이곳 명륜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또한 아키즈키 타네시게는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나면 매일 백미 2합(오늘날의 기준으로 약 300g)을 지급하는 등 일본에서 처음으로 아동 부양 수당제도를 확립한 뛰어난 영주였다.
이렇게 이시이 쥬지가 평생 고아 구제 사업등에 헌신하게 되는 그 배경에는 고향 타카나베번에서의 교육과 기풍, 어린 시절 동네의 가난한 아이에게 따뜻하게 대해줬던 그의 모친의 교육, 그리고 평생 그의 삶을 지탱해 준 기독교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가 창립한 오카야마 고아원은 30 년의 활동 동안에 약 3,000 명의 아동을 구제했다. 고아원에서의 교육은 독특한 것이었다. 고아원의 직원과 아이들은 한 곳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초기에는 아이들은 먹고 싶은 만큼 먹어야, 풍부한 마음이 자란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원내 규정은 자유로웠다.
그의 고아원은 아이를 칭찬하거나 꾸지람을 할 때에는 많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밀실에 따로 불러 1대 1로 이야기했다. 밀실에서 아이의 고민을 들어주거나 이시이 쥬지의 생각을 전하는 교육이었다.
또한 아이의 성장 년대에 맞게 교육 방침을 정해, 유년기는 되도록 놀게 했고, 소년기에는 배움에 주력하도록 했으며, 청년기에 이르러는 일하는 것으로 철저하게 구분했다. 그리고 체벌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당시 시대의 상식으로서는 모두 획기적인 교육 정책이었다.
(오카야마고아원의 여자 아이들의 식사모습, 여성 보육사가 엄마처럼 돌봤다.)
어린 나이부터 이웃과 고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헌신을 하던 이시이 쥬지, 구라시키의 대부호의 집안에서 부족함이 없이 자란 오하라 마고사부로.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899년 7월, 당시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열아홉, 이시이 쥬지는 서른네 살이었다. 오하라 가문의 후계자였지만 방탕한 생활에 젖어 있던 마고사부로에게 이시이 쥬지와의 만남은 어둠 속에서 만난 한 줄기 빛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사회사업에 헌신하고 있던 이시이 쥬지의 만남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이후 그 이전의 삶과는 180도로 바뀐 삶을 살게 된다. 이후 마고사부로는 이시이 쥬지가 운영하는 고아원의 평의원으로 고아원이 어려울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으며 그 지원은 이시이 쥬지가 죽고 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평생 동안 사회 문화 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이시이 쥬지는 오하라 마고사부로에게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바로 오하라 마고사부로에게 평생을 함께 할 연인을 소개한 것이다. 1901년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이시이 쥬지가 소개한 히로시마현 출신의 열여덟 살의 이시이 스에 石井スエ(1883-1930)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회사였던 구라시키 방적에 입사한 뒤 경영자의 삶을 살게 된다.
입사 이후 그는 공장의 직원들이 초등교육조차 받지 못한 현실을 보고, 직공 교육부를 설립했으며 1902년에는 공장에 소학교를 설립했으며 구라시키 상업보수학교(현재의 구라사키 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일하면서 배우는 공장 직원 교육을 지원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는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해 장학회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장학회의 지원을 받은 학생 중의 한 명이 바로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평생의 친구이자, 오하라 미술관의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고지마 토라지오이다. 하나의 인연이 또 하나의 인연을 가져다준 것이다.
(고지마 토라지로의 사진)
고지마 토라지로児島虎次郎는 1881년 4월 3일 오카야마현 카와가미군 시모하라초(현재의 오카아먀현 타카하시시)에서 하시모토 여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하라 마고사부로보다 한 살 아래이다. 그의 집은 여관업에 요리와 생선 판매도 겸하고 있었다. 그가 4살 되던 해 당시 오카야마의 초기 서양화가이며, 오카야마 사범학교의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마츠하라 산고로가 하시모토 여관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린 토라지로가 그린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 꼭 그림을 그리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그의 할머니는 소중한 손자가 화가가 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더 이상의 학업이 허락되지 않아 14세부터 생선 행상을 하는 등 가업을 도왔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계속되어 그는 일을 일찍 마치고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지마 토라지오가 16세 때 그린 그림.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습작과 선배들의 조언만으로 그림 작품이다.)
그렇게 어려운 시간이 흘러 보내던 그는 1901년에 그림을 배우기 위해 도쿄로 떠났다. 그때까지 그림공부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부모와 친지들을 열정적으로 설득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았다. 도쿄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근교로 스케치를 하러 나가고 낮에는 도쿄 미술 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녔다. 저녁에는 효성중학교 야학에 나가 프랑스어를 배웠다.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이런 그의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은 결실을 맺어 이듬해인 1902년 도쿄 미술학교(현재의 도쿄 예술 대학) 서양학과 선과에 입학했다.
그해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된다.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인 변호사 사쿠라이 쿠마타로의 소개로 오하라 마고사부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쿠라이 쿠마타로는 오하라 마고사부로에게 고지마 토라지오를 장학생으로 추천했다. 도쿄에서 귀향 후 그는 소개장과 몇 점의 작품을 들고 구라사키의 오하라의 집을 방문했다. 토라지로에게는 운명의 만남이었다.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고지마 토라지오의 성실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 만남 이후 토라지오가 죽기까지 27년 동안, 두 사람의 우정과 헌신은 변함이 없었다.
오하라 가정 장학생으로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된 토라지오는 더욱더 그림공부에 매달렸다. 선천적인 재능과 성실함으로 그는 두 번이나 월반을 해서 1904년에 졸업을 하고 연구과(오늘날의 대학원)로 이동한다.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그린 작품이 바로 등교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이때가 1906년이었다.
(작품 등교 현재 오카야마현 타카하시시 나리와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모자를 쓰고, 길가에서 딴 꽃을 가지고, 나른한 표정으로 걷는 여동생. 큰 양산을 쓰고 풀숲에 뛰어노는 고추잠자리를 찾는 언니를 묘사한 그림으로 뛰어난 묘사력을 엿보게 하고 있다. 빛을 역광으로 도입하는 것으로, 아이의 미묘한 표정이나 피부의 질감이 강조되고 온화한 정감이 넘쳐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 후 3년 뒤인 1907년에 그는 은사인 구로다 세이키의 권유로 도쿄부 주최 권업 박람회 미술전에 なさけの庭(정情의 정원)과 마을의 물레방아, 이렇게 2점을 출품하게 된다.
(なさけの庭, 1907년작 현재 궁내청보유)
1907년 2월 하순경에 완성된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3개월 동안 오카야마 고아원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고지마 토라지로는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소개로 이시이 쥬지와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마을의 물레방아. 오하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2점의 작품 중에 정의 정원이 1등 상을 수상했고, 이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었던 천황비에 의해 궁내청이 그림을 매수하여 오늘까지 보관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고지마 토라지로의 작품, 등교를 소장하고 있는 타카하시시 나리와 미술관은 이곳 출신인 고지마 토라지오를 기념하기 위해 1953년에 개관한 미술관이다. 현재의 미술관 건물은 개관 이후 3번째의 건물로 유명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의 작품이다. 관내에는 고지마 토라지오의 작품 외에 고지마 토라지로가 수집한 이집트 등의 고대 미술품 및 나리와 마을에서 채집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군 화석을 전시하고 있다.
나리와 미술관의 모습이다.
(나리와 미술관의 정원과 테라스)
미술전에서의 수상은 고지마 토라지오뿐만 아니라 그를 후원한 오하라 마고사부로에게 대단한 기쁨이었다. 그 수상을 계기로 1908년 오하라의 후원을 배경으로 그는 더 넓은 세상인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해 1월 청운의 꿈을 안고 고지마 토라지오는 일본을 떠나 45일간의 항해 끝에 3월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는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1년을 보냈다. 1909년 7월 벨기에의 겐트로 가서 도쿄 미술학교시절의 친구의 안내로 미술관들을 돌아보다가 겐트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겐트 미술 아카데미에서의 3년 동안 그는 인상파의 기법등을 배우게 된다.
겐트 미술 아카데미에서의 그의 삶은 그의 일기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의 그의 일기에는..
"매일 오전 3 시간의 연구는 유익하다. 공부는 더없이 재미있다. 오늘부터 야간 수업에 나가기로 했다. 밤에는 2 시간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 벨기에에서의 3년 동안 고지마 토라지오는 오직 그림공부에만 매달렸다. 1912년 4월 겐트 미술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귀국길에 올라 그해 11월에 친구들의 환영 속에 고베에 도착한다. 커다란 꿈을 안고 프랑스로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귀국 후 다음 해인 1913년, 그는 삶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해 4월 2일,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중매로 이시이 쥬지의 장녀 이시이 토모코石井友子와 결혼을 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하나, 토모코는 스물셋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오하라가의 저택에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신혼집은 구라사키 사카즈에 있는 오하라가의 별장이었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카즈의 농부(나리와 미술관 소장 1914년작)이다.
벨기에에서 배운 빛의 표현과 기술을 일본의 풍토에서 시도한 야심 찬 작품이다. 그러나 귀국 후 몇 년간은 그에게 슬럼프의 시기이기도 했지만 중국과 조선을 여행하는 등 나름의 화풍을 찾고자 노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1914년. 오하라 마고사부로와 고지마 토라지오는 뜻밖의 슬픔을 맞이하게 된다.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30일, 고지마 토라지오의 아내 토모코가 출산을 했다. 이 기쁜 소식을 토모코의 아버지 이시이 쥬지에게 전보로 알렸지만 그날, 이시이 쥬지는 지병이었던 신장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겨우 마흔여덟. 의사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죽는 날까지 부모를 잃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이시이 쥬지가 마고사부로와 토라지오의 곁을 먼저 떠난 것이다. 그 후 5년 뒤인 1919년 5월,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권유에 의해 고지마 토라지오는 두 번째 유럽으로 떠난다. 그해 5월에 일본을 떠난 토라지로는 런던을 거쳐 7월에 파리에 도착하게 된다. 이 파리행은 자신의 회화 수업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당시 일본에 서양 미술작품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미술관이 없어, 서양 미술을 전공하는 젊은이들에게 서양 미술작품을 직접 보게 해 주겠다는 결심에 의한 것이었다. 1920년 11월에는 모네를 찾아가 수련을 구입하는 등 그해 연말까지 오하라의 후원을 받아 모두 27점의 작품을 매입한다.
이듬해 2월에 귀국한 토라지오는 다음 해인 1922년 5월에 세 번째의 유럽행을 결행한다. 이 여행에서 그는 로댕, 엘 그레코 등의 작품들을 구입했고. 이 여행길에서 전부터 동경하고 있던 이집트에 들러 도편과 조각도 구입했다. 이것이 현재 오하라 미술관과 나리와 미술관에 이집트 부장품들이 소장된 이유이다.
(1926년 작품 화탁의 소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924년에 토라지오는 메이지 진구 미술관의 벽화 제작을 의뢰받는다. 메이지 천황의 일생을 엮는 작품이었다. 그에게 의뢰된 주제는 대러시아 선전포고 어전회의.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를 결정하는 회의의 풍경을 담은 것이었다.
이 작품제작을 수락하고 나서 1926년에 중국으로 네 번째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을 포함한 4 차례에 걸친 중국 여행 때 구입한 중국 고대 유물이 오늘날의 오하라 미술관 · 동양관 컬렉션의 기초가 되었다.
이 작품이 현재 나리와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러시아 선전 포고 어전회의의 습작이다. 이 작품을 준비하는데만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작품을 그리기 위해 여러 자료를 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평소 그의 성격답게 무엇인가에 몰두하면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과, 외유와 자료 조사 등의 고된 작업들이 그의 건강을 갉아먹고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때쯤에 그는 오하라 마고사부로와 오하라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새로운 미술관에 대한 꿈을 키웠지만 날로 악화되는 건강이 그 모든 꿈과 희망을 앗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1928년 9월 벽화 제작의 피로가 그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9년 3월 8일. 이제 막 봄이 오려는 그때, 계속되는 치료는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고지마 토라지오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47년 11개월의 삶이 거기서 멈춰버린 것이며, 자신의 바람이었던 오하라 미술관의 건립도 결국 지켜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시이 쥬지가 48세로 세상을 떠난 지 14년 만에, 고지마 토라지오도 마고사부로의 곁을 영원히 떠나버렸다.
(오하라 마고사부로와 고지마 토라지오가 함께 찍은 희귀 사진)
깊은 슬픔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지마 토라지오가 세상을 떠난 지 3개월 뒤인 1929년 6월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토라지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업적을 영원히 기념하며, 토라지오가 그토록 바랬던 서양미술의 공개를 실현하기 위해 미술관 건립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1930년 4 월 23 일 ~ 5 월 4 일에, 고지마 토라지오 화백 유작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미술관 건설을 착공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930년 10월에 마침내 미술관이 준공되었다. 오하라 마고사부로와 고지마 토라지오가 의기투합해서 모은 작품들을 위한 미술관이었다. 또한 그들과 단단한 인연으로 맺어졌던 이시이 쥬지의 삶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마고사부로는 미술관의 이름을 오하라 미술관大原美術館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오하라 컬렉션, 고지마 토라지오의 유작을 진열한 뒤 1930년 11월 5일 오하마 미술관의 개관식을 거행했으며 11월 25일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하지만 개관 초기에는 하루 방문객이 아예 없는 날이 있을 정도로 그 시대에는 서양 미술관은 낯선 곳이었다. 그 후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변함없이 사회사업과 문화사업을 후원했다. 세월은 다시 흘러 1939년.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아들인 오하라 소이치로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은퇴를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두운 시대가 다가왔다. 4년 뒤인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1월 18일.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구라시키의 자택에서 영면한다. 그의 나이 62세. 그는 이시이 쥬지와 고지마 토라지오의 곁으로 떠났다.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남긴 자취는 대단한 것이었다. 오늘날에 남아 있는 그의 업적들을 보면 오하라 미술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설립한 쿠라방적 중앙병원 (현재의 구라시키 중앙병원), 앞서 설명했듯이 이시이 쥬지의 고아원을 그는 계속 후원했었는데 이 병원도 고아와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했다.
이외에도 오하라 장농회 농업 연구소(현재의 오카야마 대학 자원생물 과학 연구소), 구라시키 노동과학 연구소, 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현 호세이 대학 사회문제 연구소), 구라시키 상업 보수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그는 일본 기독교단 구라시키 교회의 최초의 신자이기도 했다. 이제 오하라 미술관의 컬렉션과 몇몇 뒷이야기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칠까 한다.
오하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방대한 미술품 전체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모네의 수련과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먼저 나를 오하라 미술관으로 가게 했던 모네의 수련을 보자.
(모네의 수련 1906년경 오하라 미술관 소장)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모네의 수련은 1개의 작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작형태로 다수의 작품이 그려졌다.
(모네 1899년경 촬영된 사진)
모네는 같은 주제를 다른 시간, 다른 광선 아래서 그린 연작을 많이 그렸지만 그중에서 가장 작품수가 많고 모네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것은 189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한 수련 시리즈이다. 수련은 지베르니의 집 정원에 있는 연못의 수련을 모티브로 해서 1899년에서 1926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총 200점이 그려졌다. 1883년에 지베르니로 이주한 모네는 1890년에 집과 토지를 정식으로 구입했고 1893년에 땅을 사고 연못을 건설했으며, 1901년에는 엡트강의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확장했다. 종종 모네의 그림에서 모티브가 되었던 일본풍의 다리는 1895년에 건축한 것이다. 수련과 연못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1890 년대 중반부터 나타나는데, 본격적으로 이 주제에 집중한 것은 1899 년부터이다. 그해부터 다음 해인 1900 년까지 수련과 일본풍의 다리를 테마로 한 연작을 다루어 18 점이 제작되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 시리즈 중 몇 작품을 살펴보면..
(1906년 제작 수련, 시카고 미술관 소장)
(수련의 연못과 일본풍의 다리, 1899년경 제작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수련, 1926년경 제작 일본 카가와현 지중미술관 소장)
나는 전시실의 벽에 걸려 있는 수련을 처음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휴일이었음에도 전시실에 몇 사람이 없었고, 그 앞을 가로막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 작품의 앞에 서서 바로 코앞까지, 가까이 다가가도 특별히 문제가 없었다. 작품을 만지거나, 사진 촬영만 하지 않는다면 온전히 혼자서 감상할 수 있었다. 비록 내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미술에 대해 깊은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네의 그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주위의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고지마 토라지오가 지베르니에 거주하고 있던 모네를 찾아간 것은 1920년이었다. 당시 모네는 79세로 백내장으로 인해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여서 캔버스에 얼굴을 가까이 한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모네는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의 풍속화)의 대담한 색채나 구도를 좋아했고 일본식 정원을 만들 정도로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지마 토라지오는 일본의 화가를 위해 꼭 작품을 구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부탁을 했고 이에 모네는 한 달 후에 오라고 말했다. 한 달여 뒤 다시 방문한 고지마 토라지오에게 모네는 몇 점의 수련을 내놓았고 그중에서 한 작품을 선택한 것이 바로 오늘날 오하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련이다.
(마티스 딸의 초상)
고지마 토라지오의 1차 유럽 방문 시 구입한 모네의 수련, 마티스의 딸의 초상과 이외에도 알베르 마르케 등의 작품 20여 점을 모아 1921년에 귀국했다. 그다음 달에 구라시키의 한 초등학교에서 이 작품들을 공개했다. 그러자 구라시키역에서 전시회장까지, 수많은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 광경을 본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작품 수집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후 두 번째 유럽 방문에서 구입한 작품들은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
이 작품을 고지마 토라지오가 보게 된 것은 1922년 파리의 화랑에서였다. 이 작품이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된 고지마 토라지오는 이 그림의 사진과 함께 구입을 검토해 달라는 편지를 오하라에게 보낸다. 오하라의 답신과 함께 구입대금이 온 것은 그로부터 60일 후. 당시 유럽은 1차 대전 이후의 불황이 찾아온 시기였고 그 불황의 여파가 곧 일본에게도 몰아닥칠 것이라는 것을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시기가 미술품을 구입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구입을 결정한 것이다.
(폴 고갱(1848-1903)의 향기로운 대지. 1892년 고갱의 1차 타이티 여행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세간티니의 알프스의 한낮
두 번째의 유럽행에서는 엘그레코의 수태고지, 세간티니의 알프스의 한낮, 고갱의 향기로운 대지등의 작품들이 구입되어 일본으로 옮겨졌다. 이외에, 고지마 토라지오가 죽고 난 뒤, 오하라 마고사부로가 개인적으로 다른 루트를 통해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르노와르와 피카소의 작품들이다. 오하라 미술관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후계자인 그의 아들 오하라 소이치로(大原 総一郎 1907-1968)였다.
(오하라 소이치로)
소이치로는 미술관은 살아서 성장해 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작품과 전시장을 확장했다. 그는 에콜드 파리파의 작품을 수집했다.
(에콜 드 파리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였던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킨다.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나 브라크 Georges Braque(1892~1963)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파에 속하나 편의상 다른 유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앙데팡당의 화가들, 특히 서정적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Amadeo Modigliani(1884~1920), 리투아니아의 수틴 Chaim Soutine(1894~1943), 폴란드의 키슬링 Moïse Kisling(1891~1953), 네덜란드의 반 동겐 Kees van Dongen(1877~1968), 일본의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 등이 주요 작가이며, 샤갈 Marc Chagall(1887~1985)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출처 1999 월간 미술)
이외에도 그는 근대 일본 회화 수집에도 노력했고 이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1961년에 분관을 건립했다.
현재 오하라 미술관 재단 이사장은 오하라 마고사부로의 손자인 오하라 켄이치로에 이어 켄이치로의 장녀 오하라 아카네가 맡아서 4대에 걸친 예술 사업을 이끌고 있다.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 1906년 사원기숙사에 일어난 전염병으로 몇 명의 직원이 사망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그의 아버지가 사임했기 때문에 그는 구라시키 방적의 사장이 되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공장 직원의 노동 환경 개선을 실행했다. 기존의 합숙소 제도를 폐지하고 직원의 확보 · 이용 수당 · 일 용품의 판매 등을 회사가 운영하도록 고쳤다. 공장 직원의 주거도 집단 기숙사에서 오늘날 사택에 가까운 상태로 고쳐 주재 의사와 보육실 등의 시설도 갖췄고 직원 모집용 영화까지 만들었다. 또한 임원에 대학 · 전문학교 졸업생을 채용했다. 또한 회사의 이익의 대부분을 러일 전쟁등으로 늘어난 고아를 구하기 위해 고아원을 지원했다. 이에 대해 회사의 임원이나 주주들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그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1923년에 설립한 구라시키 중앙병원은 환자 중심의 병원으로 병원 안에 온실 휴게실이 있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1902년에 그는 일요일 강연회를 시작했다. 매월 1회 유명한 학자나 작가를 초청하여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인데 첫 번째 강연회에는 600명 이상이 몰려들었다. 그 당시 유명한 학자나 작가 대부분이 도쿄 같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시골인 구라시키로 초청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요일 강연회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강연회를 개최했고 그 후 23년간 총 76회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강연회는 그의 아들 시대에도 이어졌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구라시키로 떠난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함도 아니고 특별한 축제를 보러 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미술 교과서에서만 들었던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경험을 했으며, 아름다운 구라시키 미관지구의 풍경은 덤이었다. 이 여행 이후 나는 일본 여행을 할 때, 그 지역의 유명 미술관을 들러보는 일정도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