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김여철의 정원을 가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는 지난 일본 여행에서 세 번이나 다녀온 곳이다. 도쿄나 오사카를 비롯한 5대 도시를 제외한 도시 중에서 꽤 인상적인 곳으로 일본 3대 정원의 하나인 겐로쿠엔, 가나자와성, 21세기 미술관 등 볼거리,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다.
가나자와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서 가나자와시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것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겐로쿠엔 옆에 있는 작은 정원 교쿠센엔玉泉園과 그 정원을 만든 김여철金如鉄에 대한 것이다. 김여철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 에도시대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는 모 유튜브에서 처음 접했다.
조선인 김여철, 일본 이름은 와키타 나오카타脇田 直賢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유로 일본으로 건너와 가나자와의 정원을 만들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김여철은 1585년 조선의 한양에서 한림학사인 김시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고아가 되어, 우키타 히데이에 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가 나중에 여철가전기如鉄家伝記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김시성이고, 어머니의 이름 기억나지 않고, 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전사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7세의 나이에 포로가 된 김여철은 철수하는 우키타 군에 의해 나고야성(아이치현의 나고야성이 아닌 히젠 나고야성)을 거쳐 우키타 히데이에의 본거지인 오카야마로 끌려갔다.
"나는 조선국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 씨이고 자는 시성으로 한림학사였다. 어머니 성함은 잊었다. 이름은 여철이라 하였다. 나라의 풍습에 따라 어려서부터 문장을 배웠기 때문에 이를 기록할 수 있다. 분로쿠 원년, 임진년. 관백 히데요시 공이 조선을 습격하기 위해 히젠 나고야까지 출진하였다. 츄코쿠, 시코쿠의 다이묘들을 인솔하여 비젠 츄나곤 히데이에 경이 대소군과 같이 부산포로 도해하였다. 조선에도 요새를 구축하고 곳곳에서 방비하였지만, 수백 년 간 싸움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곳곳에서 패하고, 서울도 내주고 도망갔다. 그때 시성 부자가 전사하였다. 내가 일곱 살 때의 일이다. 히데이에 경의 포로가 되었다."
양반의 자녀답게 이미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김여철을 우키타 히데이에의 정실 고히메(豪姫 1574-1634, 교쿠센인, 오다 노부나가의 넷째 딸)에 의해 키워진다.
다음 해 고히메가 자신의 친정인 카가번을 방문했을 때 여철을 데리고 갔고, 카가번의 번주 마에다 도시나가의 정실인 에히메 (永姫 1574-1623)가 여철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해서 그때부터 에히메가 키웠다.
*고히메
고히메(1574년 ~ 1634년 6월 18일)는 센고쿠 다이묘 우키타 히데이에의 정실이다. 아버지는 마에다 도시이에, 어머니는 마쓰로서 2남 9녀 중 4녀로 태어났다. 양부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기타노만도코로이다.
오와리 국 아라코(현재의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아버지 도시이에와 히데요시의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던 히데요시 부부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고히메는 양부모에게서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고히메에게 보낸 편지가 현존해 있다.
덴쇼 16년 (1588년) 15세에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시집을 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게이초 5년 (1600년) 부군 히데이에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하였기 때문에 우키타 가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히데이에는 사쓰마로 도피하였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탐문을 피하기 위해 거짓으로 히데이에의 죽음을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게이초 7년 (1602년)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하였고, 히데이에는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인도 되었다. 게이초 11년 (1606년) 히데이에는 자식 둘과 함께 하치조섬에 유배되었다. 그 사이 고히메는 딸과 함께 친정인 카가 번으로 돌아갔고, 지참금으로 1500석을 받았다. 간에이 11년 (1634년) 향년 61세로 임종하였다.
*에히메
에히메(1574년-1623년) 마에다 도시나가의 정실, 오다 노부나가의 넷째 딸로 태어나 1581년 7살 때, 마에다 도시나가의 정실이 되었다. 1614년 남편 마에다 도시 나가가 죽자, 에히메는 가나자와로 돌아와 머리를 깎고 교쿠센엔이라고 불렸다.
가나자와성에서 자란 김여철은 규베이(九兵衛)란 이름을 받고 도시나가의 시종이 되었으며 녹봉은 230석이었다. 1605년 에히메의 주선으로 그는 마에다 가문의 가신인 와키타(脇田) 집안의 양자가 되었고 이때 와키타 나오카타로 이름을 바꾸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공격한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나오카타는 뛰어난 공을 올려 녹봉이 1000석으로 올랐고 최종적으로는 1천5백 석까지 이르렀다. 그 뒤로 순조롭게 승진하여 그는 가나자와(金澤)의 마치부교((町奉行, 시장에 해당)에 임명되었다. 그는 렌가(連歌, 일본식 한시)의 일인자였고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고대소설)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 나오카타로부터 그의 4대손 규베이에 이르기까지 와키타 집안이 조성한 정원인 교쿠센엔(옥천원玉泉園)은 지금까지도 가나자와시의 명물이자 일본식 정원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오카타는 한 때 “지하기독교인”이었으나 만년에 가서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의 법명은 자신의 옛 이름인 여철(如鐵)이었다.
그가 얼마나 번주의 신임을 받았는지는 74세에서야 은퇴를 허락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은퇴 후 “옛 이름으로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철’이라는 호로 불렸다. 자신이 죽으면 조선식으로 땅에 묻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와 자손들이 100여 년 동안 만든 정원은 그 기품과 아름다움으로 수백 년 동안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교쿠센엔은 총면적 약 2370m(약 720평) 전형적인 지천회유식 정원이다. 원내에는 가나자와에서 가장 오래된 다실·사이세츠테이灑雪亭 가 있다. 정원은 본정, 서정, 동정(本庭・西庭・東庭)의 세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원 내의 큰 나무들은 정원 조성공사 이전부터 무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에도시대 초기 와키타 나오카타가 정원 공사를 시작해서 4대손까지 약 1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카가번의 역대 번주가 만들었던 겐로쿠엔보다 약 120년 정도 더 오래된 에도시대 중기의 정원이다. 정원의 이름은 카가번의 2대 번주 마에다 도시나가의 정실부인 교쿠센엔에서 따왔다. (앞서 설명한 대로 에히메가 그를 키워줬고, 와키타 가문에 양자로 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교쿠센엔은 겐로쿠엔의 수목을 차경(먼 산 따위의 경치를 정원의 일부처럼 이용하는 일)으로 삼았고 연못의 수원을 겐로쿠엔의 곡수에서 끌어왔는데 이를 보면 카가번과 와키타 가문의 친밀성을 알 수 있다.(번주의 정원에서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다는 것은 번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야 가능한 일이다)
교쿠센엔에는 가나자와 지방에서 보기 힘든 미즈바쇼가 자생하고 있고, 나오카타 부자가 조선에서 종자를 가져온 수령 수백 년짜리 조선 잣나무 거목이 자라고 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와키타 가문이 가나자와를 떠난 이후에는 니시다 가문이 이 정원을 계승했고, 오랫동안 비공개였다가 1971년부터 공개되었다. 1960년 이시카와현의 지정 명승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 중에서 김여철과 같은 이는 거의 드문 존재였다. 대부분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김여철에 대해 2017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 장원재 도쿄 특파원의 글을 보면 그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3대 정원 중 하나인 가나자와(金澤) 시 ‘겐로쿠엔(兼六園)’ 옆에는 ‘교쿠센엔(玉泉園)’이라는 또 다른 정원이 있다. 수령이 400년 가까이 된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조선오엽이라는 품종이다. 묘목을 조선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가가(加賀) 번의 중신 와키타 나오카타(脇田直賢). 한국 이름은 김여철이다.
한양에서 태어난 그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일본군에 부모를 잃고 7세의 나이로 일본에 끌려왔다. 포로였지만 특유의 총명함으로 번주 부인의 총애를 받았고, 성인이 된 후엔 탁월한 무공과 행정능력으로 성의 책임자인 마치부교(町奉行)에 올랐다. 가가번은 당시 도쿠가와막부 다음인 100만 석의 영토를 보유했다. 지금으로 치면 재일동포가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大阪)의 지사를 맡은 셈이다. 그가 얼마나 번주의 신임을 받았는지는 74세에서야 은퇴를 허락받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은퇴 후 “옛 이름으로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했고, 이듬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철’이라는 호로 불렸다. 자신이 죽으면 조선식으로 땅에 묻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와 자손들이 100여 년 동안 만든 정원은 그 기품과 아름다움으로 수백 년 동안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주 도쿄(東京)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임진왜란 때 끌려온 포로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 관계자는 “김여철은 시가에 조예가 깊었고, 후손들도 문화 분야에서 대대로 업적을 쌓았다”라고 했다. 박물관에 따르면 11대 자손인 와키타 가즈(和)는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서양화가라고 한다. 12대인 와키타 사토시(智)는 동물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포로들이 모두 그와 같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포로 중 일부는 배 안에서 죽어 바다에 던져졌고, 일부는 유럽 등에 노예로 팔려갔다. 조선에 돌아갈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은 약 750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일본에서 노비처럼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중 일부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홍호연, 구마모토(熊本) 혼묘지의 주지가 된 여대남…. 그들에게 조선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국 생활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홍호연이 유언으로 ‘참을 인(忍)’자를 남긴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에 남은 이들 중에는 특히 도공이 많았다. 이날 전시의 이름도 ‘아리타야키(有田燒·아리타 도자기) 400년, 망향과 동화의 사이에서’였다. 당시 일본에선 다도가 유행했지만 도자기는 몹시 귀했다. ‘명품 찻잔 하나가 일국일성(一國一城)에 필적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퇴각할 때 도공을 무더기로 잡아갔다.
도공들은 일본 각지로 퍼졌고, 이들이 만든 도자기는 세계에 수출됐다. 이삼평과 백파선이 일으킨 아리타 도자기, 심당길과 박평의가 주도한 사쓰마(薩摩) 도자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조선의 기술에 일본의 감각을 더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박물관에 따르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한 해에만 5만 6700개의 아리타 도자기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금액은 현재 가치로 200억 엔(약 2080억 원)에 달한다. 도자기 수출로 번 돈은 이후 일본 근대화의 종잣돈이 됐다.
역사의 불행을 딛고 이국땅에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 김여철과 도공들. 박물관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입에 올렸다. 말은 안 했지만 기자도 같은 심정이었다. 한일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양국에서 이들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