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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빚은 위스키 ,요이치 닛카 위스키 첫 번째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 타케츠루 마사타카

by 늘 담담하게 Mar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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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세코에서 오타루행 열차를 타게 되면, 7번째 역, 오타루에서는 오샤만베방향으로 3번째 역이 JR요이치역(余市駅)이다. 1902년에 개업한 요이치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닛카위스키 홋카이도 요이치 증류소(ニッカウヰスキー北海道工場 余市蒸溜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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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들른 이유는 이 위스키 공장의 창립자인 타케츠루 마사타카(竹鶴 政孝, 1894–1979)와 그의 아내 리타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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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닛카 증류소에 있는 타케츠루 마사타카의 흉상)( 닛카 증류소에 있는 타케츠루 마사타카의 흉상)

일본 위스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타케츠루 마사타카는 1894년  6월 20일 히로시마현 가모군 다케하라초에서 태어났다. 타케츠루竹鶴라는 성씨는 집(현재의 타케츠루주조)의 뒤편에 있었던 대나무숲에 학의 둥지를 틀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염전과 주조업을 하고 있던 타케츠루가에서 그는 사남오녀중 셋째 아이였다. (전체 형제들 중에서는 그는 일곱 번째 아이였다.)     

(현재의 다케하라시에 남아 있는 타케츠루 주조의 건물)(현재의 다케하라시에 남아 있는 타케츠루 주조의 건물)

타케츠루 가문은 다케하라 마을에서 3대 염전지주 중의 하나로 1733년부터는 주조업도 시작했다.  타케츠루 마사타카의 집안은 그의 할머니대에 분가하여 제염업을 하고 있었지만 본가의 부부가 장남이 태어난 직후 사망하였기 때문에 마사타카의 아버지인 타케츠루 케이지로가 본가로 들어가 주조업을 계승했다.   

            

그의 아버지 케이지로는 미우라센자부로를 중심으로 하는 히로시마 주조업계의 핵심멤버로서  술에는 부적합한 히로시마의 연수에서 "음양 만들기(저온에서 누룩을 천천히 발효시키는)의 기술을 확립하고 현재의 히로시마 술의 주춧돌을 쌓아 올린 인물이었다. 자신의 일에 매우 엄격한 장인으로, 때로는 행동적인 사업가로서의 케이지로의 모습은 훗날 품질에 집착하는 마사타카의 직업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어머니인 챠우는 명문가의 딸답게 거문고나 다도등에서 뛰어났고 늘 정원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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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촬영된 타케츠루 가문의 단체 사진, 앞줄 중앙의 아이가 타케츠루 마사타카이다.


9남매가 태어난 집안답게 제일 큰형과는 18세의 나이차가 있었고 큰 형은 와세다 대학 상과를 나와 싱가포르로 건너가서 고무 재배사업을 했고 둘째 형은 규슈제국대학을 나와서 홋카이도 탄광선박회사에 입사, 홋카이도로 건너갔으며, 남동생도 게이오대학 진학 후 술과는 다른 길로 가서 가업을 잇는 것은 마사타카뿐이었다.



마사타카의 다섯 명의 누이들 중  세 살 아래의 사와노는 마사타카가 특히 귀여워했고, 한때 오사카에서 같이 살던 시절에는 함께 연극을 보러 가거나 식사나 쇼핑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마사타카는 호기심이 가득한 소년이었다. 


다다노우미중학교 忠海中学(현재의 히로시마 현립 다다노우미 고등학교)에 진학한 마사타카는 통학시간이 너무 길어, 3학년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한 학년 아래에는 구마모토의 제5 고등학교에서 교토제국 대학으로 진학하여 훗날 일본의 총리가 될 이케다 하야토가 있었다. 마사타카와 이케다의 친분은 이케다가 사망할 때가 지속되었고 그 때문에 이케다는 국제 파티에서 국산위스키를 사용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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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하야토池田 勇人 1899-1965 히로시마현 출신으로 일본 58-60대 총리, 19세기 출신으로 마지막 총리,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기를 이끌었다. )


마사타카는 당시 유도부의 주장과 기숙사 사감을 맡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의 오사카 고등공업학교(현재의 오사카 대학 공학부)의 양조학과에 입학했다. 이는 이미 앞서 설명한 대로 위의 형들이 가업인 술을 기피한 때문이었다.  오사카 고등공업학교 졸업을 앞둔 1916년 3월에 당시 일본에 소개된 양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마사타카는 학교 선배인 이와이 키이치(셋츠주조 상무)와의 인연으로 졸업을 기다리지 않고 셋츠 주조에 입사했다. 그해 12월에 징병 검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근무하기로 한 것이다. 셋츠 주조에 입사한 마사타카는 그의 희망대로 양주 제조 부분에 배치되었고  현장과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곧 주임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알코올 소독이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포도주병이 점포에서 파열되는 사고가 여러 번 발생했다. 하지만 마사타카가 생산한 와인은 철저하게 살균되어 있었기 때문에 깨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이 일로 마사타카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2월 마침내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을 때 어린 시절부터 유도등을 익혀왔기 때문에 체력에 자신이 있었던 마사타카는 갑종 합격을 자신했다. 하지만 검사관이 그의 이력서를 보고 나서, 알코올 생산은 화약제조에 필요한 기술이기 때문에 입대하지 말고 제조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하며 을종합격으로 판정하여 입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셋츠 주조에서 일 년 더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마사타카는 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로의 유학을 꿈꾸게 된다.


이 유학은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19세기에 위스키가 미국에서 전해진 뒤, 일본에서는 서양 모조품의 위스키를 만들어냈지만 순수한 일본의 위스키는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셋츠 주조는 순수 국산 위스키 양조를 시작하는 것을 계획했다.  1918년 마사타카는 사장과 상무였던 이와이 키이치의 명령을 받고 혼자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유기화학 및 응용화학을 배우게 된다.  그는 현지에서 적극적으로 위스키 증류소를 견학한 뒤 간절히 부탁하여 엘진의 양조장에서 실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캠벨 타운의 헤젤번 증류소에서 실습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는 위스키의 증류가마의 내부 구조를 조사하기 위해 전문 장인조차 싫어하는 솥 청소를 자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가 스코틀랜드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동안에 마사타카의 형들은 술을 만드는 일과는  무관한 길로 가고 있었다. 


큰 형은 와세다 대학 졸업 후 말레이시아에서 고무 재배를 하지만 실패했고 둘째 형은 규슈제국 대학을 졸업한 후 선박 엔지니어가 되어 상무까지 오른 이후에는 삿포로에서 살고 있었다.  


자, 이쯤에서 그의 영원한 사랑, 리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타케츠루 리타는 마사타카보다 2년 늦게 1896년 12월 14일 스코틀랜드 이스트던바턴셔주 커킨틸록에서 의사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정식 이름은 제시 리베르타 코완 Jessie Roberta "Rita"Cowan, 애칭은 리타였다.  그녀를 포함한 형제는 모두 4남매로서 둘째는 이사벨라 릴리안 코완, (애칭 엘라), 엘라보다 3살 아래 루시, 그 아래 막내 동생 램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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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루시, 램지, 엘라, 그리고 리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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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루시, 엘라, 그리고 리타의 모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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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로 떠나기 전에 촬영된 사진.



리타는 어린 시절부터 편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그 때문에 15세가 되었을 때 학교에 다니지 않고 개인 교습을 받았다. 3년 뒤 18세 때 글래스고우 대학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건강을 되찾아 음악, 영국과 프랑스 문학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자동차 운전면허를 받아 아버지의 왕진을 도왔다. 두 사람이 운명의 만남을 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위스키 제조를 배우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남자, 그 당시 영국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미지의 세계였다.      

                   

마사타카는 리타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약혼자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919년, 당시 이 대학 의대에 다니고 있던 리타의 여동생 엘라에게서 동생 램지(당시 15세)에게 유도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리타와 첫 만남을 가진다. 당시 엘라는 의대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고, 마사타카는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두 사람 다 꽤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엘라도 마사타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는데 그가 유도를 아주 잘한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동생에게 유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리타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리타의 4남매와 리타의 모친이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때 마사타카는 리타를 보고 한순간에 반해 버렸다. 처음에는 남동생에게 유도를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리타의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 이후에는 유도를 가르치는 것은 리타를 만나기 위한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 당시 일본인이 유도를 가르친다는 것은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터라, 리타의 가족들은 번갈아가며 몰래 마사타카를 훔쳐봤다. 유도 교습이 끝나면 리타의 모친은 그를 거실로 초대해서 홍차를 대접하곤 했다. 그리고 일본이란 나라와 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이때 리타는 한 걸음 뒤에 서서 미소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습이 끝나면 리타는 항상 현관에서 그와 작별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이때 그녀는 미스터 마사타카상이라는 존칭을 사용했다. 그러자 마사타카는 일본에서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 있다면서 다음부터는 맛상이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취미는 음악으로서 리타는 피아노를 쳤고, 마사타카는 가지고 갔던 북을 함께 연주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갔다. 그 뒤 와인을 공부하기 위해 유럽여행을 떠났던 마사타카 타케츠루는 돌아오는 길에 그녀에게 프랑스 향수를 선물한다.  일종의 사랑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향수를 받은 리타는 기뻐했고 답례로 위스키의 노래가 있는 로바트 바안의 시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시집에는 "나의 사랑하는 시집을 일본의 소중한 친구에게 바칩니다.  리타"라는 리타의 글이 쓰여 있었다. 정말 조심스러운 사랑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910-20년대에 국제결혼, 특히 서양인과 동양인의 결혼이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특히 서양인이 여자인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마사타카는 리타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되었다. 마사타카는 스코틀랜드에서 두 번째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였기에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리타의 집에서 진행된 크리스마스 파티의 클라이맥스는 푸딩운세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푸딩운세는 스코틀랜드의 가정에서 보편화된 풍습이었다.)               

리타의 집에서도 매년 푸딩 케이크를 크리스마스에 준비하는데 그 푸딩 케이크에는 새로 만들어진 6펜스의 은화와 골무가 숨겨져 있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운세의 의미가 있었는데 만일 케이크를 잘랐을 때 남자가 찾아낸 것이 은화이고 여자가 찾아낸 것이 골무이면  훗날 그들은 맺어진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의미는 남자가 은화를 찾아내면 부자가 되고, 여자가 골무를 찾아내면 신부가 된다라는 것)      

         

그런데 놀랍게도 마사타카의 푸딩케이크에는 은화가, 그리고 리타의 푸딩케이크에서는 골무가 숨겨져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운명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사타카는 결국 그녀가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고 리타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만일 당신에게 의지가 없다면 분명히 말해주세요.... 만약에.. 만약 당신이 바란다면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이 나라에 머물며 직업을 찾겠습니다. "          

    

그 고백에 리타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들은 스코틀랜드에 머무러 있어야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본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사타카 씨는 커다란 꿈으로 살고 있고 그 꿈은 일본에서 진짜 위스키를 만드는 거예요. 나도 그 꿈을 위해 살고 도와주고 싶어요.."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녀의 집안도 그랬고 난데없이 서양인 며느리를 마주 대하게 될 일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두 사람은 1920년 1월 등기소에서 두 사람만의 약식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결혼수속이었다. 그날은 매우 추운 날이었다. 리타 가족의 반대 때문에 교회에서는 결혼식을 올릴 수가 없었고  두 사람은 루시와 그녀의 친구,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약식결혼식을 올린 뒤 마사타카와 리타는 각각 결혼 서류에 서명을 했고, 주장관 대리는 그들의 결혼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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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의 나이 26세, 그녀의 나이 24세였다. 결혼식 후, 마사타카와 리타는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캠벨타운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위스키에 대한 공부에 열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0년 10월, 공부를 마친 마사타카와 리타는 글래스고우를 출발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미 대륙 횡단 철도를 통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일본우선의 후시미마루호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요코하마항으로 향했다. 리타는 첫 일본 생활에 불안과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남편과 함께 남편의 꿈인 위스키를 만들며 살아갈 미래가 리타의 마음속에 있었다.      

                    

1920 년 11 월 가을이 깊어가던 요코하마항에 후시미마루호가 도착했고 리타는 마사타카의 손에 이끌려 배에서 내렸다. 검은색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모피 목도리와 검은 모자를 쓴 리타의 모습에 마중 나온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마중 나온 사람들 속에 아사히 맥주의 야마모토 다메사부로가 있었다. ( 리타도 ,마사 타카도 나중에 마사 타카가 창업한 닛카 위스키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야마모토 다메사부로가 될 것이라는 것은 그때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사타카가 셋츠 주조에서 다시 일해야 했기 때문에 현재의 오사카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어를 배우면서 데츠카야마가쿠인 학원에서 영어와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일했다.              

 

그 후 그녀는 1924년과 1931년에 마사타카의 시찰에 동행해서 스코틀랜드로 귀향하기도 했다. 1934년에 마사타카가 홋카이도의 요이치에 대일본과즙 회사를 설립한 뒤 요이치 증류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거주하게 되자, 리타도 1935년 9월에 요이치로 이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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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의 이름은 리타하우스라고 하는 소화 6년 그러니까 1931년에 지어졌다. 건립된 초기에는 경리사무실과 연구실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마사타카 타케츠루와 리타의 유품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의 역할을 하며 한쪽에는 찻집 로우먼드가 있다. 로우먼드는 리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에 있는 호수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 처음 사랑의 맹세를 한 곳이라고 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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