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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빚은 위스키, 요이치 닛카 위스키 두 번째

낯선 타국, 그래도 사랑이 있어서.

by 늘 담담하게


귀국 후 두 사람은 셋츠 주조에서 가까웠던 오사카의 데즈카야마 에서 일본에서의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이 살던 집은 훗날 닛카 위스키의 대주주가 되는 시바카와 마다시로(芝川又四郎 1883-1970)의 집이었다.


AS20160106001116_comm.jpg?type=w2 (시바카와 마다시로)

*시바카와 마다시로

일본 위스키의 비호자로 불린다. 마사타카를 계속 지원했고, 리타는 시바카와 마다시로의 딸 영어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시바카와 가문은 시바카와 마다시로의 증조부 대부터 구미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부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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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bakawa-bld.jpg 시바카와 빌딩

*시바카와 빌딩

오사카 주오구에 있는 역사적 건조물, 1927년에 준공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에도시대 수입상으로 시작하여 부를 쌓은 시바카와 가문은 메이지 시대에는 대지주가 되어 부동산업에 주력했다. 시바카와 가문의 4대 당주였던 시바카와 마사히로는 관동대지진 후 지진에 강한 건물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이 건물을 세웠다. 닛카 위스키의 전신인 일본 과즙 주식회사의 설립 총회의 장소이기도 했으며 오사카 출장소가 이 건물에 있었다. 현재 이 건물 1층에는 닛카 위스키의 제품을 판매하는 펍 The Court가 있다.


마사타카는 위스키 양조 연수 결과를 정리해서 이와이에게 제출했고 셋츠 주조는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순수 일본산 위스키의 생산을 기획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에 닥쳐온 경제공황에 의해 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어 그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보통 위스키를 제조해서 판매하려면 기본적으로 3-5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셋츠 주조는 그 자금을 모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22년 마사타카는 셋츠 주조를 퇴사하게 되었다.


큰 꿈을 가지고 돌아온 일본에서의 첫 번째 실패, 좌절감이 깊은 것은 고사하고 당장의 생계에 문제가 되었다.


이때 리타는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맛상분의 일을 할게요.."


그 말에 마사타카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일본에서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해요"


그러자 리타가 다시 대답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남편이 힘들어질 때 아내가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리타는 일본에 와서 만난 영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데츠카야마학원의 교사로 들어갔다. 리타는 매우 차분한 여성처럼 보였지만 발 빠른 행동력으로 피아노와 영어 교사가 된 것이다. 리타의 유머 넘치는 수업과 세심한 가르침은 어느덧 여자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의 대상이 되어 갔다. 게다가 외국인의 미인 교사라는 소문이 학원의 내외에 퍼져갔다.


한편, 상심해서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마사타카도 집 주변의 세인트 앤드류스 중학교에서 화학 교사의 일을 찾아냈다. 마사 타카도 영국 교육의 영어와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리타와 마사 타카는 서로 일하면서 생활을 지원하고 위스키 만들기의 기회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맛상 이렇게 함께 먹는 저녁 식사가 가장 좋은 시간이네요."


리타가 그렇게 말하자 마사타카는 "응..."이라고 답했지만 우울하기만 했다.


두 사람은 각각의 일에 바빠서 서로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것은 매일 저녁 밖에 없었다. 리타는 마사타카의 얼굴에 생기가 없는 것이 걱정이었다. 셋츠 주조를 그만두고 나서 1 년이 지난 1923년 어느 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식사 후 리타와 마사 타카는 클래식 레코드를 듣고 있었다. 그때 집의 현관에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세요라고 리타가 유창한 오사카 방언으로 물었다.


두 사람을 찾아온 사람은 당시 오사카의 양주 제조 판매업을 하고 있던 고토부키야(현재의 산토리)의 토리이 신지로(鳥井 信治郎 1879-1962)였다.


고토부키야에서 본격적으로 위스키의 생산을 기획하고 있었기에 토리이 신지로가 스코틀랜드에 적임자가 있는지 문의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에는 재작년 위스키 제조 기술을 배워서 귀국한 타케츠루 마사타카라는 적임자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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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다정했던 리타와 마사타카의 사진)


그 이전 토리이는 이전 셋츠 주조 모방 와인 제조를 위탁하고 있었서 마사타카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토리이는 스코틀랜드에서 익혀온 기술을 다시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마사타카를 설득했고 토리이는 마사타카를 연봉 사천 엔이라는 파격적인 봉급으로 채용했다. 이 금액은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불러오는 기술자의 임금과 같은 수준이었다. 결국 1923년 6월 마사타카는 고토부키야에 정식 합류했다.


리타는 하나님에게 감사드렸다.


imagesRLHVZS0O.jpg?type=w2 (토리이 신지로)

*토리이 신지로

오사카 출신의 실업가, 현재의 산토리의 창업자


고토부키야에 입사한 마사타카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위스키 공장 용지 선정이었다. 마사 타카는 후보지로 스코틀랜드의 기후와 풍토와 비슷한 홋카이도를 추천했다. 그러나 토리이는 도쿄 나 오사카의 소비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결국 마사타카는 오사카 부근의 5개의 후보지중 양질의 물을 사용할 수 있고 스코틀랜드의 유명 위스키 생산지와 비교적 가까운 기후를 가진 교토의 야마자키로 결정했다.

야마자키.jpg 야마자키 증류소 옛 사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이다.
Yamazaki_Distillery_山崎蒸留所05.jpg 현재의 야마자키 증류소


교토의 야마자키는 마사타카의 본가가 있는 히로시마와 가까웠다. 그래서 리타와 마사타카는 함께 요양 중이었던 마사타카의 어머니를 자주 문병했다. 마사타카의 어머니는 집안의 반대와는 달리 마사타카가 리타와 결혼을 생각할 무렵 이런 편지를 보냈다.


" 파란 눈의 며느리라고 해도 같은 인간이고, 마음씨만 좋다면 정은 통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리타는 늘 시어머니를 따뜻하게 여겼다. 고토부키야에 입사한 지 일 년 뒤인 1924년 11월에 야마자키 증류소가 준공되었고 마사타카는 초대 소장이 되었다.

bio_img_1.jpg?type=w2 (리타의 형제들 사진과 리타의 어린 시절 사진)

공장의 뒤에는 산이 있었다. 그 중턱에 지어진 목조 서양식 주택이 리타와 마사 타카의 거주지가 되었다. 위스키 공장이라는 꿈의 성을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집은 편안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이 온화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9년 4월 1일 마사타카가 생산한 최초의 위스키가 발매되었다. 하지만 이 위스키는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아 판매가 저조했다. 그해 마사타카는 고토부키야가 인수한 요코하마의 츠루미의 맥주공장 공장장으로 겸임명령을 받았다. 교토와 요코하마까지의 거리가 있어서 잠시 동안 서로 떨어져 지냈지만 요코하마와 가까운 가나가와현의 즈시로 이사를 했다. 해안가의 작은 마을로 쾌적한 환경이었다.


사실 이 겸임발령은 마사타카에게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두 공장의 거리도 너무 멀기도 했지만 위스키와 맥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리타는 즈시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히로시마 다케하라의 시어머니에게 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마사타카는 뜻밖에 전보를 받아 들게 된다. 어머니 위독이라는 내용이었다. 마사타카는 리타를 설득해서 급히 본가로 돌아갔다. 집안 전체가 리타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유일하게 인정해 준 것이 어머니였고 어린 시절부터 항상 그를 따뜻하게 이끌어준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결국 리타와 마사타카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다. 마사타카는 어머니옆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삶에 있어서 처음으로 닥친 큰 슬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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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의 마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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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와 마사타카의 사진,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은 항상 따뜻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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