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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빚은 위스키-요이치 닛카 위스키,네번째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

by 늘 담담하게

거대한 전쟁의 폭풍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1941년 12월 8일 리타와 마사타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임시 뉴스를 듣고 아연 실색했다. 그 전날 하와이 시간 12월 7일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지휘하는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공격하여 1945년까지 길고 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날이후 요이치 공장에서도 직원들이 속속 소집되어 갔다. 마을에서는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마을의 공장도 전시체제로 들어갔다.

그렇게 세상이 전쟁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 무렵, 마사타카의 집에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지붕으로 튀어나온 라디오의 안테나를 보고 리타가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리타를 향한 무서운 의심이었다. 하필 그때 마사타카는 출장 중이라 집에 없었다. 고압적인 경찰의 심문에 리타는 평소 유창하게 사용하던 일본어를 잊어버릴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 리타를 대신하여 공장 직원들이 나서 라디오의 잡음이 심해 우리가 안테나를 세워준 거라고 변명을 해서 경찰을 돌려보냈다.


출장에서 돌아온 마사타카에게 리타는 이런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마음속까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쟁기간 내내 리타에 대한 감시는 집요하게 이루어졌고 리타는 그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마사타카는 그런 리타를 보며 이렇게 위로했다.


"이런 일은 전쟁이 끝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야"


이렇게 전쟁은 리타와 마사타카에게는 시련이었지만 한편으로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대일본과즙은 전시체제 아래 해군감독 공장으로 지정되었고 모든 원재료를 군에서 조달해 주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제품 또한 군이 다시 구입해 주었다. 1945년 여름이 다가오자,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 요이치에도 공습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멀게 만 느껴졌던 전쟁의 폭풍이 홋카이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미 해군의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마다 마사타카는 리타와 함께 방공호로 대피했고, 겁에 질린 아내를 끌어안으며 진정시켰다.


이때의 홋카이도 공습의 내용은 이러했다.


1945년 7월 14일, 미 해군 제38 임무 부대는 홋카이도 남부의 노보리베츠 앞바다에 이르러 총 13척의 항공모함에서 3,000대 이상의 함재기를 발진시켜 루모이시 이남의 홋카이도 주요 도시에 무차별 폭격과 기총 소사를 했다. 특히 당시 홋카이도지역에서 군수 산업의 중심지였던 무로란과 구시로, 네무로에 대한 공습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전략폭격으로 일본의 도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B-29는 홋카이도가 항속거리 범위 바깥에 있어 폭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5년 7월 14일과 15일의 공습 당일, 홋카이도 지역은 구름이 많이 끼여 시야가 나빴고, 항공모함에서 이륙했던 함재기들은 대부분이 공격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네무로나 구시로 같은 해안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각자의 판단에 의해서 닥치는 대로 공격을 가했다.


네무로에 대한 공격은 14일과 15일 양일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4일은 네무로항만에 있는 선박들이 주공격 목표였다. 이 공격은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생산되는 광물등이 네무로항으로 이동하여 일본 본토로 운송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14일의 공격과 달리 15일의 공습은 당시 예상외였다. 다음날 15일 오전 5시 8분, 공습경보가 울리고난 뒤 7대의 미군전투기들이 시가지를 공격했고 3시간 후에는 약 40기 이상의 대편대가 들이닥쳐 500발의 폭탄과 로켓탄 공격을 가했고, 기총소사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네무로 시가지의 70%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사망자는 210명에 이르렀다.


14일과 15일 양일에 걸친 홋카이도 공습 목표지는 모두 78개 시정촌이었다. 하코다테에 대한 공격은 시가지와 아오모리와의 연락선 및 화물선에 집중되었다. 하코다테는 예부터 홋카이도와 혼슈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홋카이도에서 생산된 석탄과 식량을 혼슈로 운송하기 위한 주요 항구였다. 따라서 교통수단의 중심이었던 세이칸 연락선(하코다테-아오모리 간 여객선) 및 관련 시설이 공격 대상이 되고, 그 결과 아오모리와 하코다테 항구와 쓰가루 해협의 각처에서 운항 중인 연락선 12 척 가운데 침몰 · 좌초된 것이 10 척, 손상이 2 척, 여객 · 승무원 부상자 72 명, 사망자 · 행방 불명자 425 명이 발생하여 홋카이도와 일본 본토로의 해상수송망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에 비하면 하코다테시의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시내도 곳곳이 공격을 받아 폭탄 투하에 의해 서부 지역의 일부, 현재의 야요이 쵸 주변에서는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하여 약 400 채의 주택이 불타고, 최소 79명이 사망했다. 당시 하코다테 시민들 대부분이 지금의 하코다테야마의 산기슭으로 피난을 했기 때문에 대규모의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당시 폭격으로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는 며칠이 지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가장 큰 피해를 낸 곳은 노보리베츠에서 가까운 무로란이었다. 무로란은 주변에 철광석 광산이나 탄광이 있었고 항구가 있어 제2차 세계대전이전부터 주요 제철소와 제강소(당시에는 고사포등의 무기를 생산하는 곳) 공장들이 집중되어 있던 중공업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전략상 중요한 도시였고, 그래서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이다. 7월 14일 공격에서 무로란항 앞바다에 있던 제65호 해방함, 74호 해방함, 화물선 제1 운양호가 격침되고, 4척의 화물선이 손상을 입었다.


다음날 7월 15일에는 무로란에 대규모 함포 사격을 가했다. 아이오와, 미주리 등 전함 3척 외에 순양함 2척, 구축함 8척 총 13척이 함포 사격을 가해 약 1,000발 이상의 포탄이 공장과 주택가에 떨어졌다. 일본 제강의 포신 공장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다른 공장도 2-10일간 공장을 돌리지 못하게 되었다. 이 날 공격으로 사상자는 369명에 이르렀고 무로란은 폐허가 돼버렸다.


(당시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네무로 시가지)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불타고 있는 구시로 시가지)



당시 홋카이도 공습 피해상황 지도. 빨간 점들이 당시 공격을 당한 시정촌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고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곳은 네무로, 구시로, 무로란, 하코다테연락선이었다.




공습으로 파괴된 하코다테역





하코다테 공습 시, 미군기의 기총소사 공격을 받고 있는 화물선


네무로 공습 시, 폭격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과 군인들

더욱더 큰 걱정은 공장이 폭격으로 불타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공장 안에는 리타와 마사타카의 오랜 노력의 결정체인 위스키가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요이치의 파란 하늘을 보며 두 사람은 새로운 날들이 시작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위스키의 판매는 순조로웠다. 첫 번째 위스키의 원액이 저장된 지도 어느덧 9년이 흘렀고 그 원액을 듬뿍 사용한 위스키를 계속 출하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기간 동안 망가져만 갔던 리타의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사타카는 오랜만에 도쿄와 요코하마를 방문했다. 주주들에게 요이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마사타카는 요코하마역 앞을 둘러보았는데 거대한 암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장 일부에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곳에는 술, 소주, 위스키라는 벽보가 적힌 포장마차가 있었고 마사타카는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 사이에서 위스키 한잔이라고 주문했다.


포장마차의 주인은 말없이 황갈색의 액체가 담긴 더러운 컵을 내밀었다. 마사타카는 받은 컵을 코로 냄새를 맡았다.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합성색소로 착색한 에틸알코올이었다. 품질을 중요시하는 마사타카에게는 이런 것들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전후 일본의 현실은 그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리타와 마사타카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1943년에 양자를 들이게 되는데 그 아이는 마사타카 누이동생의 셋째 아들인 타케시였다. 타케시는 1949년에 닛카 위스키에 입사했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으며 1953년에 첫 아이를 낳았다. 리타와 마사타카에게 손자가 생긴 것이다.




그때 리타는 스코틀랜드의 어머니와 여동생들 그리고 남동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와 두 명의 여동생들과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몹시도 그리운 날들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일본에 시집온 것으로, 당연히 그 가족에 큰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내 행복을 우선해서, 맛상과 결혼해 일본에 왔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던 걸까..."


리타의 마음은 잠시 흔들렸다.


1952년 4월 마사타카는 과감하게 본사를 도쿄로 옮겼다. 8월에는 회사명을 대일본과즙주식회사에서 닛카 위스키로 변경했다. 그것은 위스키 제조에 있어 새로운 도전이자 위스키 제조 메이커로서 시작이었다.


(홋카이도 요이치 닛카 위스키 공장 내에 있는 리타하우스의 내부, 옛 모습 그래도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상태는 좋지 않았다. 선행 투자 때문에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회사명을 변경한 다음 해인 1953년에 개정주세법이 시행되었고, 기존의 구분(1급-3급)이 각각 특급, 1급, 2급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 당시 일본 국내 위스키의 소비는 2급이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2급이라고 하지만 2급의 원액혼합비율은 종전과 다름없는 5% 이하였다. 다시 말해 0%라고 해도 위스키로 판매할 수 있었다. 이런 위스키를 판매하게 되면 그건 위스키 가게의 수치이다라고 마사타카는 말했다. 하지만 닛카의 대주주들은 현실에 맞춰서 2급을 판매해야 한다고 마사타카를 압박하고 있었다.

요이치 공장을 세울 때, 주주는 3명이었다. 마사타카가 스코틀랜드 유학 생활에 도움을 준 야나기사와 야스백작, 시바카와 마다시로, 카가 신타로이었다. 결국 수많은 논쟁 끝에 저급 위스키를 판매하게 되었다. 그나마 마사타카는 원액을 최대 5%까지 집어넣어 저항했다.

당시 닛카 위스키의 최대 주주였던 카가 신타로는 그즈음에 자신의 몸에 이상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 후두암이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카가 신타로는 마사타카가 걱정이 되었다. 좀처럼 타협하지 않은 마사타카를 그대로 놔둬서는 닛카 위스키의 미래가 어두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다른 주주였던 시바카와 마다사로에게 자신의 지분과 합쳐서 매각할 것을 요청했다. 매각의 대상자는 아사히 맥주의 야마모토 다메사부로山本為三郎(1893-1966)였다. 앞편에 잠깐 언급한 야마모토 다메사부로는 자신이 아니라 아사히맥주의 법인 명의로 카가 신타로와 시바카와 마다 시로의 지분 60%를 인수했다. 이제 닛카 위스키는 아사히 맥주의 자회사가 된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은행에 사정을 해야 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사히맥주로 회사를 넘겨준 카가 신타로는 1953년에 죽었다.


(야마모토 다메사부로)



사실 야마모토 다메사부로와는 셋츠 주조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다. 마사타카의 열정과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다메사부로는 마사타카가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날 때에도 환송을 해주었고 그가 리타와 결혼을 해서 요코하마로 귀국할 때에도 항구까지 나가 마중했다. 그는 마사타카를 회사로 부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닛카의 회사 경영은 당신에게 맡깁니다. 나는 당신의 일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테니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 일해주세요"


경영상의 위기를 넘기게 해 준 야마모토 다메사부로는 그 후 마사타카의 꿈에 동참하여 한결같이 후원해 주었다. 그렇게 1950년대가 흘러가고 있었고 리타와 마사타카는 평온한 삶을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타카에게 가장 큰 슬픔의 시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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