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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빚은 위스키, 요이치 닛카 위스키, 세 번째

요이치에서의 삶

by 늘 담담하게

1933년 마사타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마사타카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힘들어하고 있었고 리타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즈시의 집은 늘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런 와중에 그해 11월에 고토부키야에서 츠루미공장 매각을 발표하게 된다. 고토부키야 측에서는 원래 매입가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게 되었으므로 이득이었지만 이 매각과정에서 마사타카와는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았고 이때부터 마사타카는 회사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의 일들을 지금은 오사카 상인들의 술수에 마사타카가 놀아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마사타카는 기술자로서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그의 분노를 지켜보던 리타는 당신의 꿈은 역시 위스키제조에 있다고 말하면서 제조 공장을 세우는 돈은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마사타카를 위로했다.


1934년 3월 마사타카는 고토부키야를 나오게 된다. 처음 약속한 10년 근무의 기한도 다 되었고, 무엇보다 위스키 제조의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마사타카가 고토부키야를 그만 둘 무렵, 리타는 일본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의 협조를 구하기 시작했다. 마사타카의 위스키 제조의 꿈에 동감하는 것도 있었지만 리타의 인간적인 매력에 도움을 손길을 내밀었다.


그때 도움을 내민 이들은 카가 증권의 카가 쇼타로(加賀 正太郎1888-1954), 리타가 일본에 와서 처음 살던 집의 주인이었던 시바카와 마다시로등이었다. 카가 쇼타로의 경우, 그의 아내(치요코)가 리타에게서 영어를 배웠던 인연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987e85d8555bd422913054ceac67f765f214bc60.jpg 카가 쇼타로 , 오사카 출신 사업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스위스 융프라우 등반에 성공했다.

카가 쇼타로가 건축한 야마자키 산장은 현재 아사히맥주가 소유하고 있으며 오야마자키 산장 미술관으로 소개되고 있다.

Abovm01_2048.jpg 오야마자키 미술관 입구


*오야마자키 산장 미술관 アサヒグループ大山崎山荘美術館

아사히맥주 오야마자키 산장 미술관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초(1932년 완공)에 걸쳐 지어진 본관과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地中館「地中の宝石箱땅속의 보석상자(남관)와 山手館「夢の箱」 꿈의 상자(북관) 2채의 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에는 일본 민예운동에서 탄생한 민속 공예품뿐만 아니라 가와이 간지로와 베르나르 리흐의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수련 시리즈를 포함한 클로드 모네의 작품이 지중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미술관은 귀중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아름다운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Abovm04_2048.jpg 오야마자키 산장 미술관 본관 내부


Claude_Monet_045.jpg 오야마자키 미술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네의 수련

카가 쇼타로는 증권업을 시작으로 다방면에서 활약한 사업가인 한편, 오야마자키 산장에서 난의 재배를 다루고 식물도보 <난화보>를 간행하는 등 취미인으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카가는, 닛카 위스키의 창업에도 참가해, 만년에는 동사의 주식을 깊은 친교가 있던 아사히 맥주 주식회사(현 아사히 그룹 홀딩스 주식회사) 초대 사장·야마모토 다메사부로에게 맡겼다. 이때의 인연이 지금의 미술관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야마.jpg 야마테관
야마1.jpg 미술관 내부

1954년에 카가 쇼타로가 죽고 이어 카가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1967년에 오야마자키 산장은 카가 가문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몇 번의 전매 후, 건물의 노후화가 진행되기도 해, 1989년에는 산장을 헐고 대규모 맨션을 건설하는 계획이 세워졌으나. 그러나 지역 유지 쪽을 중심으로 보존 운동이 전개되어 교토부와 오야마자키초로부터 요청을 받은 아사히 맥주 주식회사가 산장을 복원하고 1996년 미술관으로 공개하게 된다.



1934년 4월, 홋카이도 요이치에 증류소를 세우기로 하고, 자본을 모아 그해 7월에 대일본 과즙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마사타카가 홋카이도의 요이치로 떠난 뒤, 리타는 즈시의 집에서 홀로 마사타카의 소식을 기다렸다. 1935년 9월 마침내 마사타카의 연락이 왔고, 리타는 열차를 바꿔 타며 홋카이도를 향해 떠났다.


장거리 여행 끝에 요이치에 도착했을 때는 홋카이도의 가을이 한창이었다.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마사타카와 공장 사람들, 그리고 요이치 주민들이 역으로 나왔다. 그들 앞에 선 리타는 여러분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때 리타의 말은 요이치 사람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오사카 사투리였기 때문에 더욱더 열렬히 그녀를 환영하게 되었다. 요이치는 리타와 마사 타카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공장의 부지 내에 있는 집은 목조이지만 서양식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흰색 페인트 벽, 나무 색상으로 조합한 삼각 지붕의 멋진 집의 모습은 지역 주민들은 물론 직원들에게도 동경이었다.

800px-130823Nikka_Wisky_Yoichi_Distillery_Hokkaido_Japan08s3.jpg?type=w2 (현재의 요이치 닛카 위스키 부지 내에 있는 리타와 마사타카의 집)

그 집에 리타는 직원들을 때때로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그때 나오는 요리는 일본요리였지만 때로는 스코틀랜드 요리와 홍차 · 커피가 곁들여 나오기도 했다. 그것은 그녀가 일본에 와서 다양한 일본요리를 배운 결과였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직원들을 초대하여 맛있는 음식을 내왔다. "와우! 이것은 맛있어!"라고 직원 한 사람 이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요이치 앞바다에서 잡힌 오징어 젓갈이었다. 오징어 젓갈은 보통 근육을 따라 세로로 칼자국을 넣는 것이지만, 리타는 그것에 추가해서 옆에서 잘게 다진 것이다. 리타는 일본의 전통을 소중히 하면서도 서양의 합리적 정신을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


이쯤에서 리타와 마사타카의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리타는 1924년에 임신을 했지만 유산을 해버렸고, 이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1930년에 후사코라는 여자 아이를 입양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리마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지만 후사코는 리타와 사이가 나빠져 리타가 죽기까지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다. 1943년에 조카를 입양했는데 그가 훗날 닛카 위스키의 사장과 마스터 블렌드였던 타케츠루 타케시(竹鶴 威 1924-2014)였다.

b0271789_10400387.jpg 타케츠루 타케시

홋카이도의 삶도 만만치 않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1940년 마사타카는 첫 번째 위스키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맥아 향기가 가득한 위스키 원액을 듬뿍 사용한 위스키였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적이 없는 양질의 향기로운 위스키가 탄생한 것이다. 스카치와 같은 제법으로 만들어진 중후하고 기품 있는 품질이었다.

Nikka_Yoichi_distillery_-_Rare_Old.jpg 닛카 위스키의 1호 위스키

그 위스키는 스코틀랜드 유학에서 리타와 함께 귀국해 20 년동안 힘써온 그 세월의 결정체였다.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위스키의 이름을 마사타카는 닛카 위스키로 정했다. 닛카는 회사 이름이었던 대일본과즙 大日本果汁 에서 日 과果를 따서 가타카나로 쓴 것이다. 1940 년 10 월 "닛카 위스키의 상품을 실은 마차가 공장 정면 돌 아치형의 문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800px-130823Nikka_Wisky_Yoichi_Distillery_Hokkaido_Japan01s3.jpg?type=w2 닛카 위스키 공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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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지켜보던 리타카 마사타카에게 말했다. "맛상 축하해요"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머나먼 일본에서 온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를 따라, 대서양을 건너고 미국을 횡단한 뒤, 다시 태평양을 건너온 리타, 그녀는 한결같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마사타카 또한 이국에서 만난 아내를 데리고 와서 늘 사랑으로 대했다. 그 두 사람의 사랑과 열정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일본에서의 위스키 생산이 성공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리타와 마사타카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는 바로 태평양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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