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이별.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던 1950년대가 서서히 끝나갈 무렵인 1959년 한 통의 편지가 리타에게 도착했다. 그 편지는 낯익은 영어로 써진 글씨가 쓰여 있었다. 놀랍게도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보내져 온 것이었다.
발신자는 동생 루시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루시가 아득히 먼 스코틀랜드로부터 일본에 온다는 것이었다. 리타의 가슴은 요동쳤다. 24세에 스코틀랜드를 떠나온 이후 39년이 지났고 리타는 이제 63세가 되었다.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루시는 6살 아래였기 때문에 당시 57세였다.
"어린 시절 말괄량이였던 루시가 이제 할머니가 되었네요"라고 리타는 10대 시절의 루시를 떠올렸다. 리타의 세 자매는 각각 성격이 달랐지만 밝고 총명해서 인근에서도 유명한 자매들이었다.
리타가 마사 타카와 결혼을 결정했을 때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루시만은 리타의 편을 들어주었다. 당시 리타의 난처한 입장에서 여동생 루시의 존재는 든든했다. 가족의 반대는 오히려 리타와 마사 타카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묶게 했지만 사실 루시의 응원이 없었다면 두 사람의 마음은 약해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 루시가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다. 마침내 장거리 여행 끝에 홋카이도의 요이치에 여동생 루시가 왔다.
머나먼 나라, 일본으로 떠난 언니. 전화도, 편지도 쉽지 않을 수밖에 없던 시대였고 전쟁으로 인해서 생사마저 확인할 수 없었던 그 언니를 만나러 온 루시, 두 사람의 재회는 눈물바다, 그것이었다.
리타는 자신의 품에 안긴 루시를 보며 말했다.
"루시 잘 왔어, 이 먼 곳을..."
잠시 후 마주 보는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리는 두 자매의 얼굴에는 긴 인생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루시는 리타의 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마사타카를 보고 말했다.
"맛상?"
루시는 마사타카의 애칭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사타카가 고개를 끄덕이고 루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루시 고마워요.. 이 먼 곳을 와주었네요, 정말 기뻐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39년 전의 서로 젊었던 그 시절들이 스쳐 지나갔다. 리타도 같은 생각이었다.
"루시가 없었다면 우리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했을 거예요 " 마사타카는 그렇게 말했다.
그날밤 세 사람은 마사타카의 유학 시절과 두 사람의 결혼을 둘러싼 소동, 스코틀랜드의 가족이야기 등의 추억을 함께 나눴다. 웃음과 눈물로 밤은 깊어 갔다.
리타가 손자들과 지내는 것을 본 루시는 리타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사타카가 위스키 제조의 꿈을 이룬 것을 축하했다.
"맛상이라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루시가 그렇게 말하자 마사타카가 대답했다.
"루시 덕분이에요"
"왜요?"
"리타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일본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꿈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리타의 격려와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위스키 제조의 꿈을 포기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리타는 문득 스코틀랜드의 흰꽃들이 피어 있던 언덕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립고 또 그리운 풍경들이었다. 루시에게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의 근황을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아직까지 살아계셨다. 루시 이외의 가족들이 그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얼마뒤 어머니와 화해를 했고 어머니와의 편지는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동생 엘라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사실 마사타카를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은 여동생 엘라였다. 동생 램지에게 유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엘라와 마사타카는 글래스고우 대학 동창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리타가 루시에게 말했다.
"엘라가 맛상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루시가 웃으면 대답했다.
"설마?"
그렇게 리타의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원할 수는 없는 일, 루시가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난 언니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도 네가 그때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것이 좋았어"
꽃같이 아름 다던 시절에 헤어진 두 자매는 이제 인생의 황혼기를 넘기고 있었다. 그때 마사타카가 리타에게 속삭였다.
"리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루시와 함께 가는 게 어때?"
사실 마사타카는 리타에게 스코틀랜드에 귀향을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맛상, 내가 비행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죠"
사실 그것은 핑계였다. 이제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마음은 없어졌고 그저 일본에서 느긋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마침내 요이치역에서 헤어지게 되었을 때 리타는 루시가 탄 기차가 선로의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 만남일 것이라고 리타는 생각하고 있었다. 살아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할 동생, 리타는 그렇게 작별을 하고 있었다.
루시가 귀국한 지 몇 주일이 지난 뒤, 스코틀랜드에서 한 개의 소포가 도착했다. 리타 타케츠루 앞이라고 쓰인 우편물이었다. 보낸 이를 살펴보자 놀랍게도 여동생 엘라였다. 엘라는 리타의 결혼을 가장 반대했었고 그 이후 말을 나누지 않은 채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엘라는 일본을 다녀온 루시로부터, 리타의 근황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소포로 전해져 온 것이다.
리타는 그 순간 40여 년 전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있었다.
"타케츠루 마사타카라는 일본인이 우리 대학에 들어왔어"
그렇게 새로운 뉴스라며 집으로 돌아와서 말했던 엘라, 그리고 얼마뒤에 동생 램지에게 유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집으로 마사타카를 데리 온 것..
혹시나, 마사타카에게 마음을 두었던 것이 엘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결혼에 그토록 반대를 했던 것은 아닐까. 리타는 조심스럽게 소포를 열었다. 소포 안에는 3장의 하얀색 대마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손수건의 모서리에는 R과 리타의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편지 한 통..
편지를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이 편지를 언니에게 쓰기까지 40년이 흘렀네요, 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어요..."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언니의 결혼에는 찬성할 수 없었어요.. 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계속하며 살아왔어요 하지만 루시 언니의 말을 듣고 용서하지 못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는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난 언니의 용기가 부러웠던 거예요 아니면 그 행복이 부러웠을지도 몰라요.."
리타의 가슴에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리타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는 리타의 초상화와 유품들)
그렇게 스코틀랜드와의 화해를 이루는 사이 1960년이 되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들과 이어진 것이 어쩌면 그녀의 삶에 있어 마지막 축복이었다. 1960년, 리타는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의 지병이었던 간경변이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병은 195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간과 폐가 나빠져서 겨울에는 혹독한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와서 전에 살던 가나가와현 즈시에서 지냈고 여름이면 홋카이도 요이치로 돌아가 머무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64세의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녀의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어 갔다. 마사타카는 시간이 되는대로 그녀의 곁에서 간호를 했지만 서서히 슬픈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리타 또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1960년 가을 요이치로 거처를 옮겼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사타카와 함께 꿈을 이루었던 요이치에서 보내고 싶었던 리타의 바람이었다. 또한 요이치는 일본에서 고향 스코틀랜드와 가장 비슷한 기후를 가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 그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했던 그리운 한 시절들도, 일본으로 떠나오던 때의 설렘과 두려움도, 그리고 실패와 좌절의 순간까지 이제는 모두 다 그립기만 했다. 1961년 1월 17일, 혼수상태에 있던 리타는 맛상이라고 남편을 힘없이 불렀다.
그리고는 한없이 깊은 침묵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급히 집으로 돌아온 마사타카는 잠든 것처럼 보이는 아내의 하얀 손을 잡고 울기만 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리타는 마치 어린아이가 잠들어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사 타카는 양손으로 리타의 얼굴을 안아 차가 워진 리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꽉 눌렀다. 슬픔이 한꺼번에 복받쳐왔다. 외로움이 마사 타카의 가슴에 밀물처럼 가득 몰려왔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사타카는 그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나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지냈어?···일본에 와서 행복하게 지냈어? ···" 마사 타카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리타에게 물었다. 리타가 천천히 눈을 뜨고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리타의 죽음은 마사타카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었다.
이때의 일을 훗날 손자 타케츠루 코타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날 어르신이 그렇게 슬퍼하는 것을 처음 보았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안에서 울고 아우성을 치실 정도였어요.."
시간이 흐른 뒤 마사타카는 리타의 죽음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1961년 1월 17일 리타가 눈을 감고 말았다. 영국 유학 중에 나와 결혼하고 아득하게 먼 미지의 나라 일본까지 왔고, 나보다 어린데도 앞장서서 가버린 아내의 운명이 애처로울 뿐이다. 만일 내가 아니었다면.. 영국인과 결혼해서 영국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면.. 리타의 자매들처럼 살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나의 가슴을 죄어 왔다. 전쟁 중에 리타가 영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쿄에 가기 위해서 하코다테로 나오면 영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감시당한 적도 있었다."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진행되었고 리타는 요이치의 공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묻혔다. 그 언덕에서 마사타카는 자신의 꿈인 위스키 공장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리타 또한 그러했다.
묘비에는 타케츠루 마사타카, 타케츠루 리타라고 새겼다. 아직 살아 있는 마사타카의 이름을 묘비에 넣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언젠가 마사타카는 리타의 곁으로 오게 될 것이라며 그대로 강행했다.
그리고 그 옆에 영문으로 문장을 새겼다.
IN LOVING MEMORY RITA TAKETSURU BORN 14th DEC 1896 DIED 17th JAN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