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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의 성, 구마모토성(7)

구마모토성, 그 뒷 이야기

by 늘 담담하게


1. 가토 기요마사는 호랑이 가토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 별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호랑이를 마구 잡아들여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겸창을 즐겨 사용했는데, 한쪽 낫의 길이가 짧은 것이 호랑이에게 물려서 부러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의 겸창은 원래부터 편겸창으로, 한쪽 낫이 없다시피 할 뿐, 부러진 흔적은 없다. (현재 이 창은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불임을 치료하기 위해, 불임에 좋다는 호랑이 고기를 모으기 위해 임진왜란 기간 동안 틈만 나면 호랑이 사냥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가토 기요마사의 노력 덕분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늦은 나이에 도요토미 히데요리라는 친아들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평생을 비참하게 살았으며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토벌당했다.


(가토의 호랑이 사냥을 묘사한 병풍)


2. 그는 입이 매우 커서 주먹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후세의 신선조 국장 곤도 아사미가 곧잘 이 흉내를 내보였다고 한다. 또한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항상 쌀과 된장을 넣은 군량주머니, 은전 3백 문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이를 본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왜 허리 무겁게 그러고 다니냐고 묻자 기요마사는 "내가 이렇게 모범을 보여야 부하들이 보고 배워 전투 대비를 철저히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하며, 군량을 허리에 안 찬 부하를 면직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설화가 전해진다. 가토가 함경도까지 진군했다가 정문부 등의 의병에 의해 후방이 차단당할 위기에 처하자 보급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북방의 여진족들의 위협도 있어서 퇴각하는데 보급이 되지 않아 계속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학을 뗀 가토가 그 뒤로는 요대에 항상 비상식량과 돈을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


3. 북한의 통일신보는 대표적 경상도 민요 중 하나인 쾌지나 칭칭 나네의 유래가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패퇴하는 왜적을 보고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환호한 말에서 변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임동권이 지은 <<한국민요집 1>>에서도 진주지방에서 가등청정을 몰아내는 내용을 담은 쾌지나 칭칭 나네의 수록본이 있다


4. 그 정도는 약하지만 결벽증이 있어서 화장실에는 굽이 매우 높은 게다를 구비해 놓고 볼일을 보러 갈 때마다 갈아 신었다고 한다. 또한 덩치가 매우 컸다고 하는데(190cm), 다른 기록에는 사실 왜소한 체구로, 더 커 보이려고 뾰족 투구를 썼다고 한다.


5. 원래 구마모토의 한자는 隈本이었으나 그가 구마모토성을 완공한 후 熊本으로 개명하였다.


6. 구마모토 성을 쌓는 데는 가토 기요마사가 납치한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구마모토 성의 기와는 조선식에 가깝다. 그가 일본으로 철군할 때 울산왜성을 쌓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으로 따라갈 것이냐를 물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의 상당수는 왜성을 쌓는데 부역한 것 때문에 나중에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따라갔다. 이들이 구마모토에 정착하여 모여 살았던 곳이 우루산마치라고 전해진다.

구마모토시의 홈페이지에 보면 조선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신마치와 우루산마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마치(新町)의 옛날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대를 이어가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성(熊本城)을 중심으로 사이쿠마치(細工町)나 도진마치(唐人町), 신마치(新町)는 옛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내 번화가로부터 걷거나 전철을 이용해서 올 수 있으며 구마모토시의 옛 역사를 알고 싶은 분에게는 더욱 추천하는 지역입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울산(蔚山)」이라고 하는 한국의 울산시(蔚山市)에 관련된 도시가 있고 울산 간장이라고 하는 간장이 지금도 변함없이 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


(울산정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표지판)



울산 간장


우루산 마치역, 정거장의 한글 표기는 울산마치라고 되어 있다


울산과 구마모토의 관계에 대해서 2014년 9월 25일 자 경남일보의 기사를 찾아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성으로 들어가면 먼저 피라미드형 석축에 올려진 중심건물 천수각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좌우로 높고 길게 이어진 일본 특유의 화려한 성곽이다. 이 성은 1607년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가 쌓았다. 혁신적인 방어설계가 뛰어나 난공불락(難攻不落), 철옹성의 상징물이 될 정도로 명성이 높다. 성내에 은행나무를 심어 ‘은행나무성’이라고도 한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한 오사카성, 161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쌓은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성 중 하나로 꼽힌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 성을 쌓기 14년 전인 1593년 진주성 2차 전투 때 진주성을 함락한 사람이다. 당시 가토는 진주성을 사수하던 군사, 의병, 주민 등 6만여 명을 무차별 살육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정교한 성을 쌓은 최고 권력자로 꼽히지만 우리에겐, 특히 진주사람에겐 최악의 인물인 것이다.


본격적으로 성안에 들면 드넓은 광장에 사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물을 만날 수 있다. 다가가 보면 금세 우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우물은 중심건물인 천수각 아래에도 있고 천수각 내부에도 있다. 가토가 이 성을 쌓을 때 무려 120개의 우물을 팠다. 그는 왜 이 성에다 이토록 많은 우물을 팠을까. 이유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일어난 울산성전투에서 찾을 수 있다.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승리한 가토는 4년 만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울산으로 쳐들어와 점령한다. 그리고 조선인을 대거 동원해 울산왜성을 축조한다. 이 성을 기반으로 북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계략이었다. 하지만 조선·명원 군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조선·명원 군은 1597년 12월 23일부터 13일 동안 울산왜성에 총공세를 펼쳐 왜군을 성안으로 몰아넣는다. 고립무원이 된 그들은 마실 물과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자 막장에는 군마의 목을 찔러 피를 마시거나 오줌까지 먹었다. 심지어 건물의 종이나 흙벽까지 뜯어먹었다는 얘기도 있다. 버티던 왜군은 전멸 직전 구원군이 와 간신히 목숨만을 건지게 된다. 당시 왜군의 참상은 구원군으로 왔던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 가 그린 ‘울산왜성전투도’에 나타나 있다.



뒤이어 1598년 8월 조선·명군의 거듭된 공세에 지친 가토군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사기가 떨어지면서 울산성 동남쪽 성문 아래 선입지를 통해 야반도주했다. 울산과 경남일대에서 유행한 노래가 ‘쾌지나 칭칭 나네’였다. 가토가 쫓겨 도망간 것이 기뻐 불렀던 민초의 소리였다.


▲울산성전투에서 식겁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는 1601년부터 1607년까지 철옹성 구마모토성을 쌓는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물이었다. 이 성에 우물이 120개가 되는 이유다. 그는 성 안에 은행나무도 심고 군말도 사육했다. 건축물의 벽체와 다다미도 고구마줄기 말린 것을 사용했다. 비상시 은행을 따 먹거나 말을 잡아먹기 위함이었으며 벽체와 다다미도 뜯어먹으려는 치밀한 계산이었다. 구마모토에 말고기가 유명한 것도 이런 사연 때문이다.


은행나무 옆 ‘정호’라는 우물 안내판에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전투에서 말을 잡아먹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모두가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전투에서 겪은 참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획하고 만든 일들이다.


▲구마모토성을 나와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고장의 울산 혹은 울산왜성과 관련된 증거들이 많이 보인다.

가토는 일본 퇴각을 전후로 울산왜성, 서생포왜성을 쌓았던 조선인을 대거 끌고 갔다. 그 흔적이 구마모토성 주변에 많이 남아 있다. 먼저 구마모토성 바로 옆에 ‘울산정’(蔚山町)이라는 지명을 가진 버스정류소와 노면전차정류장이 있다. 한자까지 똑같다. 안내판에는 울산정이 조선의 울산에서 왔다고 기록돼 있다. 한 일본인은 울산정을 ‘울산 마치’라고 불렀다. 그는 “울산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으나 과거 어른들로부터 울산사람들이 이 일대에 살았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가토가 후퇴를 전후해 울산왜성 혹은 서생포왜성을 쌓았던 조선인을 대거 끌고 가 성 주변에 살게 한 뒤 성 축조 시 투입했음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울산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이 지역에 살았다는 증거도 있다.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울산지역의 도기 등 생활용품들이 발견된 것이다. 또한 가토 사망 직후의 일본지도에 ‘울산 마치’라는 지역명이 기록돼 있다. 가토가 조선 출병 당시 울산전투에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일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울산정’이라는 지명을 따서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구마모토성 울산정 바로 옆에는 간장을 판매하는 효고야 본점이 있다. 이 역시 울산의 흔적이 있다.



간장가게 효고야 본점 로비에 들어서면 울산과 관련된 사진을 비롯해 이순신 장군 물품까지 전시돼 있다. 이 지역 일대가 우리의 울산과 관련된 지역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효고야 본점 사장이 이런 물품을 하나둘씩 수집해 전시해 놓은 것이다. 울산 간장도 제조해 판매하고 있다. 본점 관계자는 ‘3∼4년 전 박맹우 울산시장 일행이 울산정과 간장가게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당시 선물로 받았던 은제 트윈잔(컵)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현재 울산시와 구마모토시는 불편했던 과거를 넘어 상호 우호협력 도시의 연을 맺고 교류하고 있는 것이다.



▲구마모토성 주변 울산정을 돌아가면 ‘경택판’(慶宅坂)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경택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경택’은 조선인 이경관의 아들 이름이다. 동행한 현지 전문안내인은 “이경관이라는 조선인이 이 주변에 와서 살았으며 성 축조 시 참여하게 됐다. 그래서 그 아들인 이경택의 이름을 땄을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딴 이유는 이경택이 이곳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의사가 돼 의료활동을 한 것이 확인됐다.


이때 주변 일본인들에게 의료봉사를 했거나 도움을 많이 줘 그가 죽은 뒤 훗날 일본사람들이 그 이름을 따 ‘경택판’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말했다. 이 주변에는 울산 서생포와 같은 ‘서생’(西生)이라는 성을 가진 조선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마모토성의 형태는 울산왜성과 많이 닮아 있다. 공격자들이 쉽게 성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급경사의 성벽을 쌓은 것이 공통점이다. 아래에서 비스듬하게 오르다가 상부에는 거의 수직이어서 사다리로 진입이 쉽지 않은 형태다. 가토가 성을 쌓을 때 큰 바위와 큰 나무를 많이 사용했던 것은 진주성 2차전투에서 봤던 진주성을 본떴거나 전투경험에 따른 것이다는 설도 있다.


반대로 일본전통 성곽형태가 울산왜성에서도 보인다. 왜성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노보리이시가키’는 경사지를 따라 장성 형태의 성벽을 쌓는 형식인데, 이것이 울산왜성에 적용돼 있다. 울산왜성 혼마루 남쪽에서 선착장까지 능선을 따라 긴 경사형 성벽을 연결해 유사시 탈출할 통행로를 확보해 놓았다.



▲취재팀은 울산왜성과 진주성, 일본의 구마모토성과의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찾기 위해 전문가와 함께 일본의 구마모토성과 우리 고장 울산왜성을 취재했다. 울산사람들이 끌려와 살았던 울산정, 그곳에 살면서 강제노역으로 성 축조에 관여했던 흔적인 경택판, 서생이란 성을 가진 울산인, 가토가 울산왜성에서의 처절하고 참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역에 빈틈없이 쌓은 구마모토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울산왜성과 구마모토성의 불편한 인과관계를 살필 수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이국 땅 일본에까지 끌려와 피 맺히는 강제노역으로 이 거대한 성을 쌓았던 희생양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더욱이 이 성을 쌓게 된 배경과 발단이 가토가 조선에서 벌인 울산전투였다는 사실에는 소름까지 돋았다. 거기에는 진주성에서 희생된 6만여 명의 호국 영령들이 있지 않은가. 슬퍼서 울어야 할지, 눈시울 붉히도록 씁쓸한 마음 주체할 길이 없었다.


한·일 관계는 경색되고 있다. 아베 정권의 노골적인 우경화가 직접적인 요인이다. 군사력을 증강하고 전범의 야스쿠니를 밥 먹듯이 들락거리고 있다.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양심과 천심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제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 간단없이 흐르는 세계질서의 새로운 수레바퀴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야만 희망의 내일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는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고 만행을 저지른 인물이었지만 일본에서의 평가는 다르다. 오랜 내전으로 황폐했던 구마모토에 그가 영주로 부임한 뒤 대규모 개간과 치수 사업을 벌여 오늘날의 구마모토의 기반을 마련한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농한기에 했고 임금을 지불하였기에 부역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상반된 평가의 가토 기요마사와 오래전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 와서 엄청난 규모의 구마모토 성을 짓고 또 여기서 살아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이런 감정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끌려왔다가 원폭에 희생당한 한국인들도 있고, 임진왜란 때 끌려왔다가 가톨릭 신앙을 얻었고 그 때문에 에도 막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의 흔적을 수십, 수백 년이 지난 뒤 여행자로 돌아보는 것...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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