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성 전투의 처절한 기억은 결국.
구마모토성 이야기 2부는 이 성을 건축한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清正 ) 그는 누구인가?
가토 기요마사(1562년 7월 25일-1611년 8월 2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가신으로 다른 6명의 무사들과 함께 '시즈가타케(賤ケ岳)의 일곱 자루 창[七本槍]'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장수이다. 나카무라 출생(中村) 출생(지금의 나고야시)이며 아명(兒名)은 가토 도라노스케(加藤虎之助)이다.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모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6촌 여동생이었다.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에는 하시바 히데요시) 밑으로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가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얻게 되는 결정적인 시기였던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즈가타케의 7자루 창' 중 한 명으로서 적장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3,000석 영지를 하사 받는다.
(시즈가타케 전투 賤ヶ岳の戦- 1583년 오미국 이카군 (지금의 시가현) 시즈가타케 부근에서 벌어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오다 가문의 수석 가신) 간의 전투이다. 오다 세력을 양분한 격렬한 전투로,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쌓아 올린 권력과 체제의 계승자가 되었다.)
(시즈카타케의 7 자루창(칠본창)-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1561년 - 1624년)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1562년 - 1611년),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1563년 - 1631년) 와키자카 야스히루(脇坂安治)(1554년 - 1626년),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1559년 - 1628년), 가스야 다케노리(糟屋武則)(1562년 - 1607년),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1556년 - 1615년)를 일컫는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좌하는 시동들로서 그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에 자식이 없었던 히데요시의 본처 오네의 보살핌을 받으며 컸고 그녀를 어머니로 여겼다. 이들 중에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는 히데요시와는 인척관계였다.
이 일곱 자루 창 혹은 칠본창이라는 부르는 이들 중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처음부터 리더였다..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가 2군 대장,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5군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는 수군장수로 참전한다. 이들은 나중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문치파와 대립하는 무단파가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에 돌아온 이들 젊은 과격파 장수들인 무단파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회유하는데, 리더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주 타깃으로 삼았다. 결국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설득에 성공하자 다른 장수들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붙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게 되고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 연구에 따르면 이 칠본창이라는 것 자체가 히데요시가 자기 시동을 띄워주려고 만든 게 아니냐는 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칠본창 멤버 중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등은 그 뒤로도 무공을 세워 중용되었고, 와키자카 역시 나름대로 다이묘가 되지만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595년에야 다이묘 대열에 합류할뿐더러 히데요리 시대에 행정관으로나 활약했다. 나머지 두 명은 그 그 뒤 기록이 별로 없고 이들 대신에 임진왜란 때 3군대장인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합류하여 무단파를 이루었다.
여담에 의하면 후쿠시마 마사노리가「와키자카 따위와 같은 취급을 받다니 불쾌하다 말하곤 했고, 가토 기요마사도 생전에 칠본창을 화제로 삼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였다는 등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 당시에는 칠본창이 허명에 가깝다고 하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들 대부분은 훗날 도요토미가문을 배반하여 도쿠가와 가문에 줄을 섰지만 나중에 다 도쿠가와일가에 배반당하고 만다.(와키자카 야스하루만 빼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순신장군의 맞상대로 계속 등장했고, 명량에서도 등장했다. 일본에서도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중소영주를 한국에서는 너무 띄워 주었다고 봐야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이 되자 주요 신하로 기용되어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1587년에는 규슈의 히고(肥後 오늘날의 구마모토현) 남부 지역을 관할하는 25만 석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애용했던 무기는 가타가마야리(片鎌槍,가지극)이고 일생 자신의 상징으로서 기다란 모양의 특이한 투구를 애용했는데 장신인 몸을 더 돋보이기 위해서라고도, 혹은 작은 키에 콤플렉스가 있어 커 보이고자 모자를 애용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2군 장수로서 휘하에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를 이끌고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의 동북쪽인 함경도로 진격로를 선택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한 가토 기요마사는 점령지인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자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가토 기요마사를 호랑이 가토라고 불렀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을 거듭하게 되는데 사실 한양에 가장 처음 입성한 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는 문서를 교묘하게 꾸며서 누가 먼저 입성했는지에 대한 부분은 교묘하게 빼고 자신의 사자를 먼저 보내서 공적을 위조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토 기요마사의 부정을 탄핵하자, 이후 미츠나리를 미워하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초기의 승승장구와는 달리 이후 참전한 명군과 조선 의병, 그리고 관군의 반격에 밀려 남으로 후퇴하여 서생포 인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593년에는 서생포 왜성을 완성하고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을 명령받고 왜로 돌아가지만, 1596년 지진이 났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공이 인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제1군 사령관으로 왜선 150여 척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게끔 명령받았다. 정유재란 시에는 전라도 지역을 주로 공격하였다.
(전선이 교착상태가 되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화친을 맺고자 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사사건건 반대를 했기 때문에 그의 전횡과 독단이 있다는 보고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올렸고 전쟁이 길어지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고니시 유키나가를 지지하자 일본으로 소환되어 교토에 근신하게 된다. )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뒤인 1593년 3월 20일에 한성에 일본군이 재집결하여 인원수를 파악했을 때 주요 침공군의 병력이 개전당시 77000명이었던 것이 390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기록별로 차이가 나지만 당시 일본군이 침공할 때의 병력은 약 16만에서 20만으로 추정하는데 여기에는 보급등을 담당하는 비군사인원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제 전투를 담당하는 병력은 이 숫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를 근거로 일본군 손실률을 계산하면 45%로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일본 측 사료에 의하면 약 7만 명 정도가 손실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수군의 경우는 전투가 거듭될 때마다 손실률이 7-80%에 이를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참전한 주요 일본군 장수들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재차 침공한 가토 기요마사이지만 사실상 더 이상의 전쟁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 지구전을 벌일 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울산성이고, 이 울산성을 무대로 한 정유재란 후반부의 치열한 전투가 바로 울산성 전투였다.
구마모토성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먼저 언급해야 하는 울산성 전투, 이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그의 삶에서 처음으로 서늘한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한마디로 저승 바로 앞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울산성의 축성이 시작된 것은 1597년 10월에서 11월로 추측되며, 오타 가즈요시의 감독 아래, 모리 히데토모와 아사노 요시나가 등 주고쿠 지방의 다이묘들과 가토 기요마사의 병사 일부가 공사를 맡았다. 물론 축성 작업의 대부분은 조선인들이 해야 했다.(동원 인력은 약 1만 6천 명 정도로 추정)
성벽의 자재 중 일부는 병영성과 울산읍성을 허물어 조달하였다. 공사가 마무리된 후, 같은 해 12월 4일에 서생포 왜성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지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일본군의 방어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동여지도의 울산 부근. 물길이 갈라지는 부근에 울산왜성의 위치한 도산島山이 있다. 당시 조선군과 명군은 성이 위치한 산을 보고 도산성(島山城이라고 불렀다 )
울산왜성은 평야 한가운데에 솟아있는 해발 50m의 낮은 산에 위치하고 있다. 산의 북서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낮으며, 동쪽은 경사가 급하고 높다. 축성 당시에는 태화강의 하구가 성의 남쪽에 맞닿아 있었으며, 만조 때에는 성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이를 이용하여 강가에는 보급과 연락을 위한 정박지가 있었다. 이를 나타내는 선입지(船立址) 석표의 유구가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오랜 퇴적작용으로 인하여 하구가 훨씬 동쪽으로 이동하여 있고, 성 아래를 흐르던 강줄기도 간척되어 주택가가 되어 있다.
성이 위치한 산은 다른 산줄기와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사면 어디에서든 공격로를 찾기에 쉽지 않은 구조를 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울산성 전투 초반, 돌격전을 감행하였던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고 성을 점령할 수 없었다. 반면에 산이 고립되어 있는 만큼, 공격 측이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성을 포위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기 쉬웠다. 또한 성내에 우물이 없는 점으로 인하여 식수수급이 매우 곤란한 약점이 있었다. 실제로 울산성 전투에서 연합군에 의하여 포위된 일본군은, 군량보급과 식수수급이 차단되어 큰 피해를 보았다.
당시 울산왜성을 설명하는 글이다.
"성벽이 산 정상부를 3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일본의 성곽 형태를 가진다. 산 정상과 강가의 해발 45m 지점에 동서로 100m, 남북으로 60m 정도의 혼마루를 두고, 1차 성벽을 둘렀다. 혼마루 북쪽의 해발 35m 지점에 동서로 100m, 남북으로 40m 정도의 니노마루를 두어, 2차 성벽을 둘렀다. 3차 성벽이 두르고 있는 산노마루는 혼마루 북서쪽으로 해발 25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동서로 40m, 남북으로 100m 정도의 크기였다. 성벽의 높이는 10~15m였으며, 세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300m 정도였다.
성벽은 산의 경사에 의지하여 외부를 큰 돌로 쌓고 내부를 적심석(積心石)으로 가득 채우는 산탁(山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외벽은 일본의 성벽과 같이 비스듬한 각도를 유지하며, 다듬어진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반듯하게 축조되었다. 성벽의 내부 적심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의 잡석을 이용하였다. 이때 성벽에 가까운 적심석은 등석원(登石垣)의 길이대로 열을 맞추어 계단 형태로 쌓았기 때문에, 외벽이 무너져도 내부 적심석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조선 전기의 평지성에서 흔히 나타나는 축성방식으로, 왜성의 건조에 일본의 축성기술은 물론 조선의 축성기술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성에는 12개의 성로(城櫓)가 있어 망루의 역할을 하였다. 남쪽을 제외한 3면의 성벽 아래에는 흙벽을 쌓고 목책을 둘렀으며, 여기에 철포를 설치하여 방어선으로 삼았다. 이외에도 성의 동쪽, 현재의 울산 중앙여고부근을 지나 동천(東川)까지 약 500m에 이르는 평지에, 길게 토성(土城)을 쌓은 흔적이 있다. 토성은 기단부가 8m 정도의 넓이에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며, 주변의 논과 인가의 흙을 퍼올려 급히 건축되었다. 토성 위에는 150cm 간격으로 목책을 세운 흔적이 있다. 그러나 이 주변은 택지개발이 이루어져, 현재 규모나 특징은 거의 파악할 수 없다."
울산성 전투는 총 2회에 걸쳐 진행되었고 그중 가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 1차 울산성 전투이다.
울산 왜성을 공격 목표로 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도산성은 일본의 조선침략 본거지가 되어버린 부산에 매우 가까워 함락만 시킨다면 부산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었고, 일본의 조선침략을 사실상 좌절시킬 수 있었다. 단,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부산의 일본 증원군이 빠른 시일 내에 쏟아져 쇄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에 이들을 저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둘째, 도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가토 기요마사 때문이었다. 전쟁 첫 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군의 선봉에 선 그는 대명협상을 주도하여 유화적으로 보인 고니시와 달리, 가토는 임화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조선 입장에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장본인이어서 가토를 반드시 쳐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실제 조선 조정은 고니시가 자리 잡은 순천성과 가토가 있는 도산성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다 최종적으로 도산성을 결정했다.
직접적인 공성에 투입되는 병력만 해도, 부총병 양호가 이끄는 명군이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최소 3만에 최대 4만 4천에 이르렀다. 여기에 전쟁 첫 해를 제외하면 대규모 지상군을 동원하지 못한 조선군도 도원수 권율을 최고지휘관으로 하여 약 1만여 명을 투입했다. 조명연합군이 단일전투에 이 정도로 병력을 집중투입한 것은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의 제4차 평양성 전투 이후 처음이었다.
연합군 본영은 경주에 설치되었으며, 예상되는 일본군의 원병을 차단할 길목들이 선정되었고, 정예병력과 군량, 화포 등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명군은 호남 지방으로 별동을 보내어 순천성 등 호남지방 왜성들을 공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동작전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성을 증축하고 주변 성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조명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특히 도산성은 명량해전 패배와 그 이후의 후퇴 직후 급히 축조에 들어간 가토의 새 본거지로 방어력이 높았으며 전투를 얼마 남기지 않고 완공되었다. 당시 그의 병력은 약 1만 6천여 명이었다.
음력 12월 23일, 마침내 조명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공세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성 바깥의 병영성, 언양성이 함락되었으며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 왜성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도산성은 조명연합군의 그물 같은 포위를 당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성전에서 조명연합군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왜성 공성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존의 공성전은 일본군이 점령한 조선의 성에 대한 탈환전이었다면, 이 전투는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에 대한 공성전이었다.
방어력에 있어서만큼은 최고였던 일본성을 공격하기란 쉽지 않았고 목재 구조물에서의 조총사격등으로 인하여 조명 연합군은 공세를 중지했다. 물론 일본군도 조명연합군의 화포 공격에 수많은 전부상자가 발생했다.
생각지 못한 고전과 피해에, 연합군 총사령관 양호는 전략을 변경하여 철두철미한 고사작전을 개시했다. 연합군은 성 주변의 우물을 모조리 묻어버리고 태화강의 물줄기를 빈틈없이 봉쇄했다.
가토와 일본군에게는 악조건이었던 것은 도산성이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 안에 군수물자의 비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성 안에 2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먹을 식량과 물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우물이 성내에 한 개도 없다는 것은 도산성 최대의 약점이었다. 더군다나 공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까지 상당수 남아있어서 밥만 축내고 있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말을 죽여 말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그나마 초반의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아예 피와 오줌을 먹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가토 본인마저 천에 고인 물을 짜내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리 막강한 군대라 해도 굶주림과 갈증 앞에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가토도 이를 알고 결사적으로 반격하여 태화강으로 식수조달에 나섰으나 조명연합군은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결사대는 출격하는 즉시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 번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기병 중심의 부대를 내보냈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 이후로 가토는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고 농성으로 전환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일본군의 식량사정은 최악을 달려서, 농성전의 핵심인 조총수에 한정하여 하루에 생쌀 한 홉을 지급했다. 그나마도 물이 없어서 생쌀을 먹어야 했다.
한편, 조명연합군은 포위망 유지와는 별개로 공세를 강화했다. 가까운 일본군이 언제든지 구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시간만 보낼 수는 없었다. 결국 28일을 기점으로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고, 가토의 일본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결사항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토는 할복을 준비했다.
일본군의 제1차 구원시도는 비교적 초기에 이루어졌으나 이를 예견한 연합군에 의해 태화강과 양산 방면에서 일본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서생포왜성에서 출발한 원군은 태화강에서 말 그대로 전멸당했다.
하지만 가토를 구원하려는 병력은 계속 모여들었고 6만에서 8만 명의 구원군이 도착하는 바람에 조명연합군은 철수를 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양군은 각각 약 1만 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특히 가토 군의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다.
울산성 전투의 처절함은 전투 당시 성내에 고립되어 있던 종군승 케이넨이 일기에 기록하면서 아주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기록하는 무사나 다이묘들과 달리 케이넨은 승려였고 덕분에 일본군이 불리했던 울산성의 처절함이 고스란히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구원군의 울산 구원을 보여주는 울산성 전투도가 나베시마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기사회생한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으로 간신히 철군을 했고, 울산성에서의 끔찍한 기억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가 일본으로 돌아와 1601년 구마모토성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울산성전투에서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했다. 처절했던 울산성 전투 당시 식량과 식수 부족에 고생한 경험을 살려,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든 다다미를 짜고 성의 마당 땅 속에는 온통 감자와 고구마로 가득 채웠고 성 안에 우물을 120개나 만들었다.
또한 앞편에서 설명한 구마모토성의 또 다른 이름인 은행 성의 유래는 성내에 심어진 은행나무에서 비롯되었다. 농성전을 대비해 식량확보를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은행을 심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귀환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문치파와 계속 대립관계였고 결국 1599년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가택을 습격하였으나 살해에는 실패했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에야스의 편에 가담하여 승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와 혼인하여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여생을 보냈다.
161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친을 알선하고 돌아오던 중 병이 나 1611년 6월 24일 구마모토에서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50세.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면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쓰와의 권력 앞에 자기 가문을 보존하려 애쓴 이중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일설에 의거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중재하려고 한 기요마사의 노력이 평소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멸문시키려고 계획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미움을 사 독살되었다고도 한다.
조선통신사의 기행문에는 대놓고 '이에야스가 독살했다'라고 쓰여있기도 하다.
징비록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다. 철군 과정에서 고니시를 가토가 지원했는데,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우리 장수를 버리고 가는 것은 국가의 수치"라는 이유에서 고니시를 지원했고, 이에 고니시가 "이후로는 공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라고 했으나, 가토가 "공과 나는 길이 달라 친해질 수 없다"라고 대답하며 씁쓸해했다고 한다.
다음 편에서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못다 한 이야기와 울산마치역에 대한 설명을 하고 세이난 전쟁 편으로 옮겨가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