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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거래처와 결혼합니다.

아롱다롱 오피스텔링_회사생활 추억한다.

by 은수자

그녀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무역학과를 졸업했다는 그녀는 이제 5년 차쯤 되는 사회생활, 적당한 직급에 적당한 급여를 받는 무척 안정된 직원이었다. 한국 여자치고는 매우 서양적인 골격을 갖고 있었고, 미인은 아니었지만 매력적인 여자였다. 남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어서, 여직원 회식 때에도 그녀는 거의 듣는 쪽에 가까웠고, 업무로도 그게 나와는 연결고리가 없어서 크게 친하지는 않았다.


어느 해 여름, 경기도 여주인가로 직원 워크숍을 가게 되었고, 그녀와 같은 룸을 쓰게 되었다.

겨우 1박이었는데 커다란 트렁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룸에서 보니, 편안한 평상복과 잠옷, 여분의 옷 몇 벌에 속옷 및 온갖 세안제품과 샤워제품, 각종 화장품, 개인 수건과 빗, 고데기와 구루프, 상비약과 식염수까지 다 챙겨 온 걸 보고 놀랐다. 잠시라도, 본인의 일상 디테일이 흐트러지는 게 매우 싫다고 했다. 그래서 여행을 크게 즐기지 않는데, 이런 회사 워크숍은 어쩔 수 없으니 왔다는 것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지운 그녀의 모습은 훨씬 덩치가 크고 글래머러스했다. 한국 여자치고는 뚱뚱한 편에 속하는. 흰 얼굴의 그녀가 얼굴에 팩을 하며, 잔잔하게 본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딸이 네 명이에요, 내가 둘째고요. 고등학교 때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빠가 바로 재혼을 하시는 바람에, 새엄마의 세 아이들까지 정말 졸지에 아홉 식구 대가족으로 살았어요 (웃음)
새엄마와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닌데, 그쪽은 셋 다 아들이어서, 사춘기 즈음의 일곱 아이들이 북적대며 사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엄마 아빠 두 분 다 일을 하셨으니, 우리는 거의 맏이가 각자 자기 동생들을 케어하며 살았죠. 그래서였는지, 늘 빨리 커서 독립하고 싶다. 가족과 동생들에게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취업하고 나면 금방 돈 모아서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안되네요. 엄마도 좀 도와주고 동생도 좀 지원해주고 하다 보니.

우리는 맥주 한 캔을 먹으며 자못 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잠옷을 곱게 입은 모습으로 이야기도 무척 단정하게 이어 나가던 그녀. 중간중간 그 미소가 옅은 파스텔 칼라처럼 고왔는데, 그 뒷 느낌은 쓸쓸했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나는 부끄러워요. 재혼 가정에서 사는 게요.
누가 부모님 얘기 물어보면 주눅이 들고, 남자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남자를 만나고, 서로 호감이 생겨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상견례 같은 자리를 상상만 해도 난감하고. 빨리 집을 떠나 결혼이든 독립이든 하고 싶은데, 막상 그런 기회가 오면 관계가 진전이 안되네요.
내가 이러니까.....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를 찾는 국제전화가 있었고, 그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

우리는 업무상 국제전화가 많으니 그러려니 했었고, 외국 손님들의 잦은 방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결혼한다며 회사에 사표를 썼고, 캐나다로 간다고 했다.

상대는 우리 회사에 자주 출장 오던 캐나다 바이어였다.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이혼남.

13..jpg 출처 : 핀터레스트

우리는 모두 놀랐지만, 무엇보다 놀란 건 회사 임원들이었다. 그는 임원들과도 수십 년 거래를 한 오랜 친구였는데, 회사의 직원이 그와 파격적인 결혼을 한다니 얼마나 놀라운 뉴스인가.

여기까지 들으면, 돈 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흔한 사랑거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생각만큼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다. 우리 회사 바이어 레벨로 따지자면, 군소 마이너 바이어 그룹에 속하는 소상(小商)에 불과했다.

게다가 50을 바라보는 이혼남, 그녀는 이제 29살 초혼의 아시안 여자.

13. 3.jpg 출처 : 핀터레스트


지금도 기억이 나는 일은,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에 한번 오신 적이 있었다.

이렇게 놀라운 결혼을 감행하겠다는 딸을 아무리 설득해도 안되니, 회사 상사께 한번 타일러 달라고 부탁을 하러 오신 것이었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놀라셨으면 그런 부탁을 하러 오셨을까 싶다.

회사 임원분은 아버지를 따뜻하게 위로해 드리고, 이후 그녀도 여러 번 설득해 보신 걸로 안다.

하지만, 이미 불타오른 남녀 간의 사랑을, 회사 상사나 부모가 말릴 수 있었을까?

미팅을 하고 가시면서, 우리에게 오셔서 혹시 우리 딸의 동료들이냐고 물으시며, 우리 딸 회사에서 어땠냐고 물어보셨다. 이미 눈가가 빨갛게 눈물이 촉촉하셨고, 너무 쓸쓸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가셨다.



얼마 뒤, 그녀는 부모님, 회사, 친구들,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떠났고, 결혼했다고 이메일이 왔다.

부모님은 캐나다로 오시지 않았고, 신랑 가족분들만 참석한 채로 결혼식을 하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13.4.jpg 출처 : 핀터레스트

모 여배우와 감독의 열정적인 불륜 스토리가 뉴스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최근에 그녀는 임신을 했다고 한다. 세간에는 남자의 유산이 엄청나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뉴스도 나왔다. 어찌 되었든, 둘은 10년이 넘는 시간을 서로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가끔 그녀를 추억한다.

그 용기가, 그 눈물이 참 대단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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