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라! 부엔 까미노 -
전공이었던 스페인어를 직장생활 수십 년 하는 동안 잊고 살았다.
업무에서 사용하던 때도 있었지만 크게 많지 않았고, 그렇게 스페인어는 녹슬어 잊혀갔다.
가끔씩 영화나 노래에서 스페인어가 나올 때 낯설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스페인어 특유의 그 경음 (까, 께, 끼, 꼬, 꾸)이 시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40대 즈음이었나?
퇴근길 전철에서, 옆 좌석에 앉은 백발이 성성하신 할머니가 "입에 딱 붙는 스페인어"라는 책을 보고 계셨다.
처음엔, 손녀 책 사다 주시는 거겠지 했는데, 정말 본인이 탐독하고 계셨다. 입으로 중얼대시면서....
궁금해서 자꾸 쳐다보니, 스페인어를 아냐고 물으신다.
- 네. 조금요. 그런데, 왜 스페인어를 공부하세요? -
- 친구들과 스페인 산티아고로 도보여행 갈려고요 -
그러시면서, 접속법이 너무 어렵다고 하셔서 당혹스러웠다.
외국인으로 바글거릴 산티아고에 가셔서 스페인어를 크게 쓰실 일도 없을 거 같았고, 오히려 간략한 영어가 훨씬 유용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보여행에 가서 접속법까지 쓰실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접속법은 스페인어 시제문법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챕터에 속하기 때문이다.
백발이 성성해 허리가 굽은 한국의 노인이 그 먼 스페인의 산티아고를 걸어보려고 스페인어를, 그것도 접속법 동사까지 외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당시 나는 너무 유난스러운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도보여행이란 길을 걸으며 자연을 즐기는 여행인데, 그 한적한 길을 찾아 그 먼 스페인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그 계획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한국에도, 아니 아파트 주변 지척에도 둘레길과 산책로가 즐비한 한국이 아닌가 말이다. 괜한 노욕, 괜한 사치, 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열면, 깊은 산에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는 법륜 스님 책의 한 구절처럼, 마음을 열고 동네 앞산 뒷마당 한 구간을 걸으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기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 할머니가 스페인어 책을 꼭 품고 내리시는 모습에서 아직도 "젊음의 과다한 짐"을 어깨에 잔뜩 지고 계신 듯 보였다. 하나도 아름답지가 않았다. 마치, 린위탕의 수필에 나오는 말처럼
낡고 중후한 축음기에서 경박한 재즈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언밸런스했다.
그러던 나도 50대 중후반을 넘어서고 있다. 몇 년 후면 나도 은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직장생활이 빠지면서 생길 시간의 공백 안에, 자연스럽게 스페인어 공부가 떠올랐다.
스페인어 책을 열심히 읽던 그날의 할머니 모습이 생각났고, 그 마음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노인이 세상에 호기심을 여전히 가지는 게 부질없는 욕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여전히 펄펄 살아 뛰는 생명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노인이 되면 이미 그의 마음에는 수없이 많은 경험이 있을 테지만, 오늘 이 시간에 다시 살아 뛰는 경험은
과거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일 테니까. 새로움이라는 마술은 이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떡볶이가 무슨 맛인지 잘 알고 있지만, 오늘 오후에 다시 만들어 먹어보는 떡볶이는 '맛을 안다'는 경험과는 또 다른 '현재의 새로움'이다. 그 할머니 마음속 설렘은 바로 이 새로움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화했고, 오십 대 중반의 나는 AI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앱 하나만 켜면 웬만한 외국어의 통번역이 순식간에 되는 세상.
그런 멋진 기술을 외면하고 사는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빅테크에 관한 책을 많이 본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 나올 때마다 도서관이든 서점이든 '책으로' 읽어 둔다.
하지만, 손으로 직접 쓰는 즐거움, 내가 직접 찾고 외우며 말해보는 힘으로 나의 뇌를 녹슬지 않게 잘 관리하며 살 예정이다. 중년이 되면 제일 좋은 취미 중 하나가 외국어 공부라고 생각한다.
스페인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에세이처럼 재미있게 연재해 볼 생각이다.
스페인의 언어, 스페인의 집밥 요리책, 스페인의 예술가들, 스페인의 노래들.
그 첫 스타트는 단연 언어, Spanish.
시험이나 승진시험용이 아닌, 에세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문법이야기에서부터, 핵심 동사, 재미있
는 문장들, 표현들을 판소리 한편처럼 잘 연결해서 그려볼 생각이다.
자, Repitan conmigo, viva la vida tan bonita! (저와 함께 외쳐봐요, "멋진 인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