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의 작은 새어린 시절 가을 들판은 끝도 없이 펼쳐진 황금빛 바다였다. 콩밭 사이로 옥수수와 수수가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논에서는 노란 물결이 햇빛을 따라 찰랑거렸다. 들판 한가운데에는 내 해진 옷을 걸친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비틀거리며 마치 나를 보고 웃는 듯했다.
그때 나는 들판의 작은 새였다. 바람을 쫓아 달리고, 햇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논둑 위를 마음껏 걸으며 바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흙냄새와 풀잎 소리에 취해 하루를 보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게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자유롭고 따뜻한,세상에서 가장 넓은 놀이터였다.
그 들판을 마음껏 뛰놀던 날들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대신 나는 책 속의 허수아비가 되어 문학이라는 또 다른 들판에 서 있다. 바람 대신 단어들이 나를 흔들고, 수많은 문장이 내 주위를 맴돈다. 때로는 그 단어들 속에서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도, 문득 웃음이 터지곤 한다. 들판의 작은 새였던 내가 이제는 허수아비가 되어 내 앞을 스쳐 가는 이야기들을 지켜보는 듯하다.
그때의 들판은 이제 내 곁에 없지만,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허수아비의 느릿한 웃음소리와 바람의 속삭임, 발밑에서 풀들이 바스락거리던 감촉이 기억 저편에서 조용히 날아오른다. 그 시절의 바람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불고 있다.
나는 여전히 그 들판을 품고 살아간다. 어릴 적 가을 들판은 이제 추억이라는 이름의 풍경이 되었고, 글을 쓰는 내 안에서 또 다른 들판을 만들어 준다. 바람을 쫓던 작은 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쓰는 순간마다, 그 들판으로 나는 돌아간다. 지금도 그곳에서 나는 여전히 바람과 함께 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