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질풍가도 Nov 15. 2024

따뜻한 봄날엔 낮잠을 자고 싶다.(3)

#3. 도를 아십니까?

1999년 1월 어느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솜사탕 같은 눈발이 날리던 어느 한 날에 나는 처음으로 서울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내 고향 포항을 벗어나 드디어 서울을 가 보게 되다니. 무언가 가슴에 호연지기가 솟아오르는 느낌과 동시에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라는 말이 내 가슴을 간지럽혔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설레는 마음으로 신나게 통감자와 핫바로 든든하게 속도 채웠다. 

속이 든든하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가 아닌가...?




청운의 꿈을 품고 대학 입시를 치르기 위해 처음으로 밟아본 서울 땅.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지만, 일단 서울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너무 친절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 생각은 1시간 남짓밖에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다음날 K대학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일단 그쪽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문제는, 포항에는 지하철이 없었다. 맞다. 지하철을 타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지하철 앱이 있거나 여러 정보들을 네이 X에 물어볼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기에 그냥 택시 정류장으로 가서 줄을 서려고 했다. 근데 웬걸... 택시를 타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역시 서울은 서울인가...? 


줄이 길어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근처에 새까맣고 미끈한 택시 한 대가 그냥 서 있는 게 보였다. 

‘오호라, 아직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쾌재를 부르며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한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택시로 다가갔다. 시골에서 상경해 2박 정도 할 준비를 하고 올라왔던 나는 짐가방을 뒷자리에 실으려 낑낑거리던 중

“손님, 제가 들어 드릴게요.”

무언가 아랫지방에서는 듣지 못한 경쾌하고 가벼움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말끔한 정복을 입고 계신 기사님이 차에서 내려 내 짐을 손수 트렁크에 실어 주시는 게 아닌가. 솔직히 포항에서도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었기에 난 그저 좋기만 했다. 서울 사람들은 자상하고 친절하다는 말이 진짜 실감이 되었다.

택시기사님은 출발하면서 이런저런 친근한 어투로 대화를 이끌어 주셨고, 순간 소개팅 나온 남자마냥 수줍게 답을 하곤 했다. 물론 최대한 말의 끝은 올려보려고 애를 썼던 기억도 있다. 대학 입시를 위해 올라온 나에게 잘 될 거라는 말씀과 조언을 아낌없이 해 주시니 연인 아니라 약간 아버지 느낌도 났다. 택시 기사님에게 이런 감정까지 느껴볼 줄이야.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가던 중 앞을 보다 갑자기 뭔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에 피가 쏠리기 시작하며 위험이 감지되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택시 미터기 화면에는 말이 같이 달리고 있었다. 미터기 올라가는 게 말이 뛰는 모양과 같이 표현이 되는데 뭔가 이상하게 말이 너무 빨리 뛰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택시 요금도 정말 빨리, 그리고 가파르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등골에 땀이 촉촉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추운 1월에 말이다.



그렇게 나는 K대학 정문에 무사히 도착을 했고, 

심장 박동과 같이 덜덜 떨리는 고사리같이 여린 손으로 기사님께 돈을 내밀었다. 기사님은 예의 그 친절함으로 짐까지 내려주시고 그 외딴곳에 나를 내려주고 휑하니 가셨다. 멀어지는 택시를 보니 마침 택시 지붕 위 ‘모범’이라는 등에 불이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사람들이 안 타더라니, 또 어쩐지 기사님이 친절하시더라니, 또또 어쩐지 기사님이 정복을 입고 계시더라니...

그렇게 내 서울의 따뜻했던 첫인상은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한 긍정의 아이콘이 아니었던가? 지나간 일은 잊고 일단 그날 묵을 숙소부터 잡기로 했다. 혼자 잘 예정이었기에 근처에서 가장 저렴한 곳에 묵을 곳을 정하고, 혹시나 다닐 수도 있을 학교니 근처를 한번 탐방해 보기로 했다. 대학가 근처다 보니 각종 즐길거리들이 많았고, 포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사람도 많았다. 포항에 있는 술집을 다 모아도 이보다 적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경을 하던 중, 마주 오던 여성 두 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살짝 나이가 있어 보이기도 한 분들이었다. 자기네들은 근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라고 소개를 했고, 나는 ‘아, 학교 선배님들 되실 분들이군. 미리 알아두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나다 보니 등 뒤에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게 보여서요.”

“조상님께서 든든하게 지켜 주시는 게 보이네요. 부러워요”

때마침 당시 나는 역사를 비롯한 민간신앙 등 약간은 비주류 학문에 관심이 생겨 혼자 책도 찾아보며 이것저것 섭렬하고 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이지만 그 상황을 처음 접해 본 나로서는 뭔가 흥미가 동하고 묘하게 믿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단연코 말하건대 여성분들이 말을 걸어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평소에 덕을 많이 쌓으셨는가 봐요. 조상님들이 지켜 주시는 걸 보니”

“아, 그래요? 어... 전 특별히 한 게 없는데...”

민망한 듯 말하는 나를 두고 갑자기 두 사람은 자기네들끼리 조용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런데 조상님께서 살짝 서운한 게 있으신가 봐요.”

“네, 맞아요. 좀 불편한 안색이 보여요.”

응? 경주 이 씨 익제공파 42대손 종손인 나한테? 대학 입시를 보려고 서울을 올라온 후손한테 서운한 게 뭐가 있으시다고 그러실까. 참 조상님도 너무하시네. 그래도 명색이 조상님이라면 후손들한테 복을 내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등 온갖 생각이 들었다.

“저희가 공부하는 곳에 가서 조상님께 정성을 들이면 조상님 화를 좀 풀어드릴 수 있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난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서울 땅을 처음 밟아본 상태였고, 표준어의 그 친절하고 진실된 느낌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 네 알았어요.”

그렇게 나는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소위 ‘도를 아십니까?’를 따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을 따라 학교 근처 어두운 뒷골목을 부지런히 걸었다. 

슬슬 저녁이 되면서 어둑어둑해질 시간이었고 골목길을 비추는 몽글몽글한 가로등 빛이 왠지 드라마에서 보는 장면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살짝 설렜다는 느낌이 더 강했을 것이다. 허름하고 작은 한 상가건물에 도착했고, 더 어두운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했다. 짙은 향 냄새가 뭔가 이상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라 소개받은 몇 명이 더 있었고, 입구에서 보니 중간에 조그마한 단이 있었고 무언 지는 모를 한자 같은 그림들이 적힌 위폐와 과일, 포 등 제사상 같은 느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먼저 몸을 정결케 하셔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묵직한 목소리로 한복을 나에게 건넸다. 

그 분위기가 있다. 내키지는 않지만 뭔가 거절하기 힘든. 입고 보니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그때는 웃을 상황은 아니었기에 일단 진지하게 임했었다.

시키는 대로 손을 먼저 씻고, 몇 번인지는 모를 절을 시키는 대로 또 했다. 속으로 조상님에게 대학 꼭 붙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렇게 진지한 듯 아닌 듯한 조상님의 화풀이를 끝냈다. 이 행사를 주관한 묵직한 목소리의 남자도 같이 절을 하며 법문도 읽는 등 많이 고생을 했는지 땀에 많이 젖어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조상님께서 후손의 정성을 받으시고 이제는 노여움을 푸신 것 같네요.”

그렇게 약간은 연극 같은, 놀이 같은 조상님 화풀이 행사가 끝난 나는 한복을 벗고 함께 해준 이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아... 진짜 감사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마무리가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나의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가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걸까? 갑자기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던 여자분들 중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이 정호님을 위해 고생 많이 하셨어요.”

그건 맞다. 옆에서 그때까지 땀을 흘리고 있던 남자를 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그마한 성의 표시라도 좀 해주셔야 더 좋은 일들도 생기고 그럴 거예요”

성의표시라니...? 어떤 걸 말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그 당시의 나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믿어주시라. 그때의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잘 믿었다. 한 번은 포항 버스터미널 근처의 어떤 분이 차비를 잃어버려 집에 못 간다고 해서 엄마아빠가 운영하는 식당에 차비를 꾸러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터미널 근처에는 저런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성의 표시란게 어떤 건가요?”

“뭐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보통 다른 분들은 돈으로 많이 하세요”

정말 예상치 못했다. 어쩐지 남의 일을 너무 열심히 한다 싶었다. 그런데 이게 좀 그렇다. 성의 표시는 좋은데 돈으로 치르기가 뭔가 느낌이 걸쩍지근하다. 물건을 사고파는 느낌이 들었고, 당시의 나는 이런 행위가 그때까지도 뭔가 성스럽고 진지했기 때문이다.

“저 그럼 잠시 나갔다 올게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들을 뒤로하고 일단 나왔다. 당연히 짐은 거기 그냥 놔둔 상태로 말이다. 나오니 길 끝에 노점에서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따뜻함을 뿜어내며 어묵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찾았다. 저거면 되겠다 싶었다. 종종걸음으로 가 떡볶이 10인분, 순대 10인분, 튀김 10인분을 포장했다. 힘차게 돌아가며 느낀 양손의 묵직함은 내 정성이 하늘에도 닿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기요, 잠시만요. 지금 바쁘세요?”

여자분 한 명이 지나가는 나를 보고 조심스레 말을 건다. 대꾸도 안 하고 지나친다.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알고 있다 이제는. 어느덧 수도권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예전처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도를 아십니까’도 잘 피해 가고 이젠 모범택시와 일반택시를 구별도 할 줄 알며, 스팸 전화면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냥 끊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내 모습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약간은 헷갈리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한 건지 아니면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이병헌 주연의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병헌의 담담한 목소리와 잔잔한 음악이 어우러져 상당히 울림 있게 다가왔던 장면이다. 


모범택시나 ‘도를 아십니까’, 버스비를 잃어버렸다는 사람들은 그때도, 지금도 그대로다. 단지 내가 자라면서 세상을 알아가고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된 것뿐이다. 손해를 덜 보고 사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 아닐까? 그래야 볼륨감 있는 인생을 살아낼 수 있지 아닐까? 시간이 흘러도 어릴 적 그 순수하면서도 어리바리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싶다. 비록 조금 아프고 조금은 더 돌아갈지라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따뜻한 봄날엔 낮잠을 자고 싶다.(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