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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풍가도 Nov 11. 2024

따뜻한 봄날엔 낮잠을 자고 싶다.(1)

#1. TV만화 할 시간이었다고!

   나는 어릴 때부터 땀이 많았다.

그래서 항상 여름이 되면 빨리 겨울이 오길 바라곤 했었다.

땀이 흘러 눈에 들어와 깜빡이는 게 싫었고,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는 건 더 싫었다. 게다가 땀이 마르면서 나는 냄새란...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여름에는 최대한 집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나간다면 최대한 옷을 가볍게 입으려고 애썼다.

그 어느 순간이 언제였냐면...     



국민학교 3학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같은 반, 내 뒷자리에 앉은 여자아이 중 J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물론 내가 혼자 마음에 두고 있던 친구였다.

내가 그 친구를 왜 좋아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딱 하나 기억나는 건 내가 기지개를 켜면서 뒤로 팔을 뻗을 때면 항상 장난스럽게 내 손을 잡어 주곤 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손 잡는 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냐마는, 나 같은 촌뜨기 남학생에겐 아주 행복한 고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아이는 학급 반장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게 생겼었다. 하얀 피부에 단정하게 묶은 머리, 까맣고 얇은 테의 안경.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당연하게도 학급에서 인기도 많았다.

그 친구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 친구를 두고 다른 남자아이와 학교 옥상에서 그녀를 건 운명의 결투도 벌였던 기억이 있다. 누가 이겼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당시에 나는 나름 진지했었던 걸로 기억된다.     

하루는 그 친구가 나에게 와서 자기 생일파티를 할 건데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하지만 그 설렘과는 별개로 옷은 뭘 입고 갈지, 선물은 뭘 해야 할지 등 걱정도 부담도 한 가득이었다.

생일이 된 그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근사한 옷을 선택했고 집 근처 새로 생긴 백화점에서 여러 반짝임을 입고 있는 하얀색 브로치를 샀다. 당시 나에게 천 원이란 거금은 거의 2~3주 치 용돈에 맞먹는 돈이었지만, 분명 그 친구의 생일파티에는 다른 늑대 같은 남자애들도 많이 올 것이기에 기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브로치가 아니었다. 그 해 설 즈음해서 부모님이 특별히 명절이라고 백화점에 날 데리고 가셨다. 이것저것 입어보다 마음에 딱 드는 정장을 입어보게 되었다. 회색 스프라이트에 골덴은 아니지만 약간 비슷한 느낌의 옷이었다. 거기다 흰 셔츠와 빨간색 넥타이까지 매고 거울을 보니 신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그 가격은 우리 집에서 살 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뛰었다... 뛰어서 곧장 집으로 와버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엄마는 그 당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옷가게 주인분은 이렇게 옷 입어보다 입고 도망가는 손님은 처음 본다고 해서 그냥 헛웃음으로 계산하고 오셨다고 했다. 다행히 부모님께 혼나지는 않았지만 당시 집에 오신 엄마가 나에게 그렇게 옷이 마음에 들었냐고 물어보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나약하고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던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TV 만화 할 시간이었다고~~~!"     




옷을 입고 집을 나설 때는 몰랐다. 그 옷이 문제가 될 줄은.

옷을 입고 나왔는데 너무 더웠다. 그날은 여름이었고 나의 근사한 그 옷은 겨울옷이었던 것이었다. 말했지만 안 그래도 땀이 많았던 나는 그 여름에 겨울 정장을 입고 마음에 두고 있던 친구의 생일파티에 갔던 것이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적절한 것 같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이, 그 옛날 나는 그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앞서 다른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문득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또 다르게 살고 있는가? 삶이라는 게 배우고 익혀도 항상 그 순간이 되면 '과유'를 참지 못하는 게 우리 모습인 것 같다. 그 옛날의 나처럼 오늘도 한여름에 의욕만 앞서 겨울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본다. 

당시 그 땀에 절어 찝찝했던 기억과 곤혹스러움, 생일파티 공간을 차지한 내 땀 냄새와 친구들의 뒤집어지는 웃음소리. 아직도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웠던 흑역사지만 그래도 나에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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