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날 기분이나 관심사에 따라 달라진다고 솔직하게 말하겠다.
내가 기분이 좋은 날에는 상대방의 실수에도 그냥 웃고 지나가는 것도 많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때 에는 무관심하거나 나아가 짜증을 내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나 사건이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라면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여 좀 더 사근사근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설마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데 목적성이 있던 아니면 천성이던 친절함이 보이는 사람을 만날 때가 간혹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물론이고 나중에 돌아서면 대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목적성 없이 천성이 친절한 것은 정말 축복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목정성이 있는 친절함은 그 나름대로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 것이라 더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여하튼 둘 다 정말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겨울 제철 음식 중 굴을 특히 좋아한다.
탱글탱글한 속살에 비릿한 바다향, 레몬을 살짝 뿌려 비린내를 살짝 잡아 초장에 살짝 찍어 먹으면 웬만한 고급요리 부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나 흔한 음식이지 외국 나가면 진짜 고급요리에 속하기도 한다.
얼마 전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여행하며 식도락을 즐기는 TV 프로그램에서도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굴을 마음껏 먹는 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을 본 적도 있다.
충남 보령시 천북면에는 굴을 파는 식당이 몰려있는 단지가 하나 조성되어 있다. 이름하여 '천북 굴단지'
날씨가 추워져 굴 생각이 날 때면 한 해 걸러 한번은 내가 가는 곳이다.
물론 요즘에는 근처에서도 싱싱한 굴을 맛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해의 첫 굴은 왠지 직접 가서 먹어야 할 것 같아 하루 날을 잡고 내려갔다.
도착하니 곧 있을 굴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고 족히 백여 곳은 됨 직한 가게들이 손님맞이에 분주했다.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한 나는 슬슬 돌아다니며 어는 곳에 들어가 먹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들 알겠지만 동종업계가 모여있는 곳을 지나간다는 것은 무수한 호객행위와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서로 자기네가 '원조'다, 자기네가 제일 맛이 좋다. 자기네가 진짜 어민후계자 출신이다 등의 온갖 영업멘트에 죄송하다를 연발하며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거절하기도 일인지라 나도 이게 두려워 일단 멀찌감치 떨어져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입구에서 한 칸 들어간 식당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키가 크시고 덩치가 있으신, 덩달아 얼굴도 크시고, 서글서글한 인상이셨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희 가게는 푸짐한 양이 일품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얼굴이 크지 않습니까? 제 얼굴이 왜 크겠습니까? 바로 양이 많아서 사장 얼굴도 큽니다.
감사합니다!"
라며 큰 소리로, 그리고 아주 푸근한 미소를 지으시며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셨다.
혹여 내 말이 안 믿긴다면 나중에 천북 굴단지에 가서 '서광수산'을 찾아보기 바란다. 찾기 전에 아마 알 것이다. 거기서 그렇게 인사하시는 분은 그분밖에 없다. (뒷광고 아니다. 광고란 걸 한번 받아보고 싶다...)
홍보인 듯 인사인 듯, 개그인듯한 오묘한 멘트다. 뭔가 끌린다. 친절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나는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다 말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굴단지의 끝까지 돌아보고 이번엔 반대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그리고 길 끝에서 다시 만난 그 사장님.
"안녕하세요 사장님, 많이 둘러보고 계신가요?
편하게 둘러보시고 혹여 제 얼굴이 잊혀지지 않으신다면 들어오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또 이런 멘트와 함께 90도 인사를 아주 공손히 하시는 것이다. 얼굴에는 정말 서글서글한 미소를 띤 채로 말이다.
손님이 뭔 대수라고. 인사 두 번 받았으면 염치가 있지. 그냥 먹어야겠다, 그래서 난 그 집을 선택했다.
들어가니 그 사장님의 인사에 끌려(?) 들어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앉아서 제철 굴 음식들을 이것저것 시키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과연 사장님의 친절한 인사와 이 집 음식의 퀄리티가 일치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을 뿐, 일하시는 분들 또한 상당히 친절하셨다. 이것저것 달라는 귀찮을 법도 한 내 요구에 항상 웃으면서 응해 주셨고 맛 또한 상당히 괜찮았다.
먹는 중간에 갑자기 사장님이 들어와 마이크를 잡으시더니
"잠시 드시는데 안내방송 드리겠습니다. 드시다 부족한 게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더 채워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에 손님들은 박수로 호응했고 그중 가장 큰 박수를 쳐준 테이블에는 서비스까지 제공되었다. 비록 내 돈 내고 먹고 있지만 먹는 내내 뭔가 흐뭇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나도 '장사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날 감동시킨 건 다음날이었다.
그날 근처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해변 산책을 하려고 나왔다. 해변길을 나와 걷다 아침장사를 하려고 나오신 어제 그 사장님과 또 마주쳤다.
또 우렁차고 활기찬 목소리로 90도 인사로 나를 배웅해 주셨다. 아침식사 호객을 한 번 할 법도 한데 말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 집의 굴 맛은 그저 그랬던 것 같다.
굴 맛이 거기서 거기지 뭐 그 집이라고 특별했을 리가 있겠는가.
근처 집들도 같은 굴을 쓸 테고 메뉴도 다 비슷했으며 굴 요리가 특별한 레시피가 없는 음식이다 보니 뭔가의 특별함은 사장님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맞다. 나를 만족시켜 주었던 것은 굴보다는 사장님의 친절함이었을 것이다. 사장님의 친절함이 내 입맛을 자극했고 내 기분을 들뜨게 했고 내 마음을 충족시켜 주었던 것 같다.
세상살이하는 모든 이들은 다들 친절함을 갖추려고 생각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친절해야지라고 생각한다고 그 친절이 행동으로 바로 나올리는 없을 것이다. 천성이거나 아니면 부단한 노력을 했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이다. 그게 무어든 간 대단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목적성이 있던 없던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장님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마치 바다의 제철 음식인 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