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화려한데 나 혼자만 초라하게 느껴질 때
지난 화에서는 우울감이 어떤 식으로 현실 감각을 왜곡해 놓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앞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우울감의 지속 기간이 늘어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를 밝혀보려 합니다.
관련된 경험들을 떠올려가며 읽어보시면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한층 수월해질 것입니다.
이제 잠시 멈춰 서서 이런 식의 설명이 경험을 과연 제대로 반영하는 것인지 돌이켜보기로 하자. 그러면 우울감을 겪는 상황이라고 해서 모든 대상이 다 황폐하게 인식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울감과 직접 연관성을 맺는 대상들은 오직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그저 기분이 좀 침체된 상태에서 인식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평소 모습과 별 다를 바 없는 현실적 대상들이다. 특정 대상이 우울감과 밀접하게 연결되려면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 현재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 줄지 모른다는 식의 막연한 기대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이 기대는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욕망에 떠밀려 품게 된 맹목적 기대로서, 제대로 의식되지는 않지만 우울감이 대상 위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항상 발견되는 필수 조건이다. 우울감 특유의 인식 작용이 일어난 시점 직전의 심리 상태를 점검해 보면 이 사실을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울감과 연계되는 이 대상은 단순히 우울감이라는 정감이 자리 잡을 지점을 마련해 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약화되어 가던 우울감에 새로운 자양분, 부정적 의미의 자양분을 공급함으로써 우울감의 지속 기간을 연장하는 역할까지 더불어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연한 기대의 형태로 대상 인식에 선행하는 회복 의지가 현실과 접촉하는 순간 붕괴되면서 우울감을 재활성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 의지란 것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일종의 욕망인 만큼 어떤 절박성을 띠기 쉽고, 따라서 비현실적 기대의 형태로 부풀어 오르기도 쉽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현실에 대한 의지의 취약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최초의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우울감이 빗나간 회복 의지 또는 성급한 회복 의지를 매개로 해서 다른 대상 위에서 그 발생 과정을 반복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해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같은 반복이 인식과 의지의 순서를 뒤바꿔놓음으로써 결국 주체의 현실 지각을 왜곡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누군가가 기대했던 일이 좌절되어 우울감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는 우울감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현실적 좌절임을 잘 안다. 하지만 우울감이 지속됨에 따라 이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망각하고 만다. 우울감에 동반되기 쉬운 비현실적 회복 의지에 떠밀려, 평소 같았더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대상을 황폐하게 인식하고는 그 인식 때문에 우울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우울하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최초의 좌절로 인해 우울해지지 않았더라면 대상을 향한 절박한 기대를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인식으로 인해 우울감에 다시 힘이 실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식으로 인식하도록 조건을 형성한 것은 소멸 과정을 거치던 기존의 우울감이므로, 이 선행된 우울감을 인식과 느낌 모두의 본질적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비현실적 회복 의지가 대상 인식에 미치는 이 같은 영향은 우울감에 빠진 주체의 자기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울감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주변 세상이 평소보다 도리어 더 화려해 보이고 자신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얼핏 보면 지금까지의 설명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원리 자체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이 경우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서 회복 의지라 표현한 일종의 욕구가 당사자의 의식으로부터 더 심하게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욕구가 추구하는 대상과 주체가 인식하는 현실 사이의 간극도 그만큼 더 넓다는 사실이다.
즉 외부 대상의 황폐화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대상에 대한 공상적 기대가 실제 대상 인식에 충돌하여 흩어지면서 현실적 대상 인식을 흐려놓지만, 이 경우에는 심하게 괴리된 욕망이 만족의 대상을 찾아 자아 영역을 한정 짓는 의식의 통제 범위 밖으로까지 뻗어 나가기 때문에,* 그 욕구의 포기에서 비롯된 의지의 잔해가 주체의 자아 인식을 흐려놓게 되는 것이다.
* 기분을 낫게 해주는 대상 인식은 자아의 반영으로서 자아를 고양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 괴리가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욕망이 이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아 영역 내부에서 대상을 찾는다.
하지만 괴리가 심화되어 욕망이 맹목적 성질을 띠게 되면, 그 욕망은 자신의 소속마저 잊어버린 채 자아의 영역 밖으로, 즉 다른 자아의 영역으로까지 치고 나가게 된다.
따라서 자기 인식이 저하되는 이 같은 과정은, 대상에 대한 공상적 인식과 현실적 인식 간의 대립이, 욕구의 영향을 받아 화려해진 외부 현실과 이에 대한 대비 효과로 초라하게 인식되는 자신의 모습 간의 대립으로까지 확대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우울감이란 감정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혔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이제 우울감과 밀접하게 연관된 감정인 슬픔에 관심을 기울여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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