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바로 보기
한국 시간으로 2018년 1월 1일, 미국 유학 중이던 저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놀라지 마라, 새벽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작은형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평소처럼 아침에 샤워를 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70대 중반, 복용하시는 약도 없으셨던 어머니. 불과 6개월 전 "네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있겠나"라는 어머니의 농담 같던 말씀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어머니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어머니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유학을 오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바뀌지 않았을까'라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황급히 귀국해 장례를 치렀습니다. 입관 전 싸늘하게 누워계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뵙는 순간,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그야말로 예고 없는 불청객이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었다는 겁니다.
최대한 신앙의 힘을 빌려서 슬픔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일을 하는 중에도, 거리를 걷다가도, 문득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슬픔을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무언가에 집중했습니다. 공부에, 연구에, 모든 것에 몰두했습니다. 여유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울 때면 저를 괴롭히는 질문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었지만, 의외로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없었습니다.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생각.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 죽음의 순간에 겪게 될 고통...
잠들기 전마다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 번은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담임목사님께서 시를 낭송하였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줄만
한밤 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낭송되는 시를 듣는 순간 어머니의 삶이 시의 구절구절마다 중첩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술만 취하면 가정을 살얼음판으로 만드는 가장, 늦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만취한 채 귀가하는 가장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신 어머니...
자식 낳은 무렵이면 몸조리를 제대로 못해 여기저기 쑤신다던 어머니...
장사하시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방바닥에 누우면 곧바로 잠이 드신 어머니...
생계 때문에 친정에 제대로 가보지 못한 채 전보로 갑작스러운 외할머니의 사망소식을 받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통곡하시던 어머니...
아들들 잘 되기만 바라며 걱정을 이고 사신 어머니,..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저의 가슴을 짓누르는 날들이 이어져 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하던 중 이전에 전혀 하지 못했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처럼......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으로 태어나는 과정..."
그 순간, 죽음에 대한 모든 것이 새로운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태아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머니의 자궁 속, 태아에게 그곳은 세상의 전부입니다. 따뜻하고 안전한 그 공간이 태아가 아는 유일한 세계입니다.
만약 태아에게 의식이 있어서 자신이 곧 그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어떨까요?
태아는 공포에 떨 것입니다. 바깥의 세상이 궁극적인 세상이지만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편안하던 세상이 요동칩니다.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고 있던 성수가 사라집니다. 세상이 갑자기 좁아집니다. 강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익숙했던 세계가 무너지고, 자신의 몸을 압박해 옵니다. 온몸, 특히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픕니다. 설상가상으로 알 수 없는 힘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온몸을 밀어냅니다.
우리는 이때의 기억을 모두 잊었지만 당시를 기억할 수 있다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입니다.
태아는 좁고 어두운 세계를 떠나 넓고 밝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출산의 고통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 고통이 끝나면, 태아는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부모의 품에 안깁니다. 배 속에서 궁극적인 목적지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본질이 아닐까요?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두 번째 탄생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이라는 자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태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탄생: 어머니의 뱃속 → 이 세상
두 번째 탄생: 이 세상 → 천국
첫 번째 탄생 때 우리가 출산의 고통을 겪었듯이, 두 번째 탄생 때도 우리는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과정입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2,23 새번역)
해산의 고통은 유대교의 은유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세상에 닥칠 고난과 혼돈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은유를 사용하여 피조물과 신자들의 고난이 궁극적인 구원을 향한 희망적인 기다림임을 설명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고난은 우리가 천국으로 태어나기 위한 산고와 같습니다.
태아가 출산의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이 심할수록 탄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고통이 클수록,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태아가 어머니 뱃속의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듯이, 우리도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태아가 상상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세상이 자궁 밖에 존재했듯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천국이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8 새번역)
사도 바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이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였습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너무 반가워서 어머니께 달려가 꼭 안았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저를 뒤에서 당겼습니다. 어머니와 점점 멀어졌습니다.
"엄마, 다음에 꼭 만나요! 꼭 다시 만나요!"
저는 눈물을 흐리면서 소리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잠에서 깼습니다. 실제로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밝은 느낌의 그곳이 천국인지, 저를 당긴 사람이 누군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잠에서 깬 후에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지만 입관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머니의 싸늘한 모습이 아니라 생기 넘치고 따스한 어머니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소중한 누군가를 갑자기 잃었을 때 그리움은 커집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단순히 고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대한 소망을 더욱 생생하게 만듭니다. 어머니가 먼저 가신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의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진실을 모른다면?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끝으로 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절망만이 남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의미 없는 고난으로만 느껴질 것입니다.
나아가 인생 자체가 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저의 기쁨이자 축복입니다.
아버지로서 아들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다양하겠지만, 영원한 삶을 위한 믿음의 유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들은 이 세상에 한정된, 유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먼저 가진 아버지로서 삶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 해야 하 듯, 죽음에 대해서도 올바른 관점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에서 소개한 영감으로 이미지를 제작하여 세 아들이 가장이 될 때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그 이미지는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인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제 죽음의 고통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슬픔이나 두려움 대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빠는 너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이별이 아니라 재회의 시작이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 뱃속을 떠나 이 세상에서 부모를 만나듯이,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너희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 고통이 너무 커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것을 기억하렴. 출산의 고통이 심할수록 탄생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너희가 겪는 고통이 클수록 천국이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들들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아빠는 지금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얼마 뒤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이별도, 슬픔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아빠를 보내주고, 너희도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반드시 다시 천국에서 만나자꾸나."
이것이 제가 아들들에게 남기고 싶은 유언입니다. 슬픔의 유언이 아니라 기쁨의 유언입니다. 이별의 유언이 아니라 재회의 약속입니다.
돌이켜 보면 유학 전에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의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유학을 결정한 뒤 1년 남짓 준비 시간 동안 지방에 출장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어머니를 모시고 출장을 갔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담소를 나누고 업무를 처리한 뒤 그곳의 음식도 먹고 볼거리도 구경했습니다.
유학을 결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저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소중한 깨달음도 주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천국에 대한 생생한 소망, 그리고 영원에 대한 사모함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압니다. 어머니는 이 광활한 우주에 먼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먼저 천국에 가셨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저도, 제 아들들도, 우리 모두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날까지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자궁 속에서 성장하고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견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신 나라로 가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커질수록 하늘나라의 입성이 더 가까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따른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저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