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문제 바로 보기
"아빠, 이제 그만 가셔도 돼요. “
병실을 나서며 딸이 남긴 이 한마디가,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로 들릴까요? 사랑하는 가족의 배려일까요, 아니면 더 이상 짐이 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라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한 채 의식 없이 시간만 연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아니,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요?
한쪽에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날 권리"를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명의 신성함을 지켜야 한다"라고 맞섭니다.
PART 1. 들어가며
혼란스러운 용어들
'안락사(Euthanasia)'는 통증과 고통을 없애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명을 끝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치사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치료를 중단하여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입니다.
그리고 의사가 치사 약물을 처방해 주되, 그 약물을 투여하거나 복용하는 최종 행위는 환자 스스로 하는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 있는데, 의사가 직접 행위의 주체가 되는 적극적 안락사와는 명백히 다른 개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존엄사(Death with Dignity)'는 주로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유사한 의미로 쓰입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조력존엄사'는 다릅니다. 이는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에 쓰인 용어로,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것", 즉 실질적으로는 '의사조력자살'을 뜻합니다.
한국은 지금 어디까지 왔나
우리나라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은 허용하지 않지만, 억지로 붙잡아두는 무의미한 행위를 멈추는 것은 허용하고 있습니다.
현행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은 '안락사'나 '존엄사'라는 민감한 단어 대신 '연명의료 중단'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고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임종과정'의 환자에 한해 적용됩니다. 담당 의사와 전문의 1명이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고, 환자 본인의 의사가 있을 때(혹은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없을 경우 가족 전원의 합의가 있을 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적극적 조력존엄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PART 2. 치열한 논쟁: 고통 없는 죽음인가, 생명의 수호인가
지금 한국 사회는 '조력존엄사(의사조력자살)' 도입을 두고 찬반 논쟁 중에 있습니다.
실제로 21대,22대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된 바 있늡니다.
찬성하는 입장
찬성하는 이들은 개인의 자기결정권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합니다. "현대의학으로도 잡히지 않는 끔찍한 통증을 견디며 사는 것은 고문과 같다"는 환자들의 절규는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실제로 뼈와 장기까지 암이 전이된 말기 암 환자들은 존엄한 마무리를 위해 막대한 비용과 법적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스위스로 '죽음을 위한 원정'을 떠나기도 합니다. 장시간의 비행, 고액의 비용, 동행하는 가족이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법적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이 현실은, 제도의 공백이 오히려 비인간적인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반대하는 입장
반면 반대하는 이들은 생명의 절대적 가치와 '미끄러운 경사길(Slippery Slope)' 이론을 들어 경고합니다. 한번 문을 열면, 걷잡을 수 없이 빗장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성인 말기 환자로 시작했지만, 점차 미성년자와 신생아로 대상을 확대했습니다. 허용 사유 또한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 고통으로 넓어졌습니다.
캐나다 역시 '죽음에 대한 의료지원(MAiD)' 대상을 말기 환자에서 만성질환자와 장애인으로 확대했습니다.
또한 환자의 생명을 구해야 할 의사가 죽음을 돕는 행위에 참여하게 되면서, 의료인의 양심의 자유를 훼손하고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안락사 합법화가 자칫 사회적 약자에게 죽음을 종용하거나, 고통을 덜어주는 완화의료 시스템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PART 3. 종교를 넘어선 질문: 왜 우리는 끝까지 살아야 하는가
성경적 근거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와 실제 사례를 통해 생명의 무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살아야 할 이유'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스티븐 호킹 박사의 사례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그의 삶은 생명이 인간의 예측을 얼마나 초월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는 21세에 루게릭병(ALS)을 진단받으며 "2년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만약 그가 의사의 과학적 판단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다가올 극심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존엄사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는 그의 과학적 업적을 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시한부 선고 후에도 55년을 더 생존하며 76세까지 살았습니다. 의학적 통계와 예후는 평균일 뿐,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절대적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리 슈워츠의 '마지막 수업'
베스트셀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인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교수는 루게릭병으로 서서히 몸이 굳어가면서도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과정을 제자 미치 앨봄에게 보여주며 이를 '마지막 강의'로 승화시켰습니다.
그에게 죽음의 과정은 단순한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고, 삶의 지혜를 완성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는 소중한 '관계의 시간'이었습니다.
폴 칼라니티의 고백
미국의 천재 신경외과의사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4기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의사였던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수술을 집도하고, 책을 쓰고, 딸을 낳고 키우며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투병 중에 쓴 회고록 『숨결이 바람 될 때(When Breath Becomes Air)』에서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삶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죽을 권리'가 '죽을 의무'가 되는 사회
윤리적으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선택'이 '강요'로 변질될 가능성입니다. 안락사가 합법화되고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가난하고 늙고 병든 환자들이 가족에게 경제적, 심리적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나 하나만 사라지면 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안락사가 허용된 일부 국가에서는 간병에 지친 가족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선택'하는 노인들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생명에 경제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많은 경우 경제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비용과 효율을 계산합니다.
사용하던 물건의 수리비용이 새 제품값보다 비싸면 망설임 없이 폐품으로 처리합니다. 기업은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 부문을 과감히 구조조정하고, 제조업에서는 불량품이 나오면 즉시 폐기합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합리적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생명도 같은 논리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말기 암 환자의 치료비가 수억 원에 달할 때, 중환자실에서 하루 병실료가 수백만 원씩 나갈 때,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환자에게 계속 의료자원을 투입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계산이 나올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서 늘어나는 의료비 부담은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경제성이나 효율성의 논리로 판단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에게는 과학이나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도덕'이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 때로는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며 타인을 구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소방관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이것은 경제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만약 생명을 비용 대비 효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요? 장애인, 노인, 중증 환자는 '비효율적 존재'로 분류되고, 돌봄과 희생은 '비합리적 선택'이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PART 4. 기독교적 관점: 고통은 절대악인가?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주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기독교는 의학적으로 소생 불가능한 상태에서 기계장치에 의존해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에는 자연사에 반하는 조치이기 때문에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생명이 붙어 있는 환자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끊는 행위에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고통 속에서도 '자연사'를 고수하라 말하는 것일까요?
과연 고통은 제거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악인가?
조력존엄사를 찬성하는 입장에서 고통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악입니다. 따라서 빨리 제거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렌즈로 보면 고통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욥과 다윗: 고통 속에서 빚어지는 인내
욥, 극심한 피부병과 자녀를 잃은 고통 속에서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자살을 종용했습니다(욥기 2:9). 다윗 역시 사울 왕에게 쫓기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십수 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그들의 삶은 끝내는 게 나은 고통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새번역)
환난(고통)은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키고 그 인격은 구원의 소망을 더 든든하게 하므로, 고통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이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견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신 나라로 가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하고, 그 고통이 커질수록 하늘나라의 입성이 더 가까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죽음에 따른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과 므낫세: 죽음의 타이밍과 구원의 기회
여기 대조되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울 왕입니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적에게 모욕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스스로 칼에 엎드려 자살을 선택했습니다(사무엘상 31장). 그는 자신의 고통과 수치를 끝내기 위해 죽음의 시계를 스스로 앞당겼습니다. 그것은 자기 결정권의 행사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의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비극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므낫세 왕입니다. 그는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역대하 33:9)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었고, 결국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만약 므낫세가 사울처럼 그 치욕과 고통을 참지 못해 포로 생활 중에 자살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영원히 '악한 왕'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의 시간, 즉 '자연적인 생명이 유지되는 시간'을 통과하며 극적인 반전을 맞이합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사...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역대하 33:12-13)
사울은 고통을 피하려다 회개의 기회를 잃었지만, 므낫세는 고통을 직면하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PART 5. 삶의 마침표를 누가 찍을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통도 선택할 수 있고, 죽음의 시점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정반대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조종하지 못한다는 것도,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예레미야 10:23, 새 번역)
참된 존엄은 고통 없는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할 기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당신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페이지에 조기에 마침표를 찍을 것입니까, 아니면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쓰시는 마지막 페이지를 끝까지 기다릴 것입니까?
[점검하기]
1) 나는 죽을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2)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3) 나의 마지막 순간 가족에게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