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들어보는 클래식 16
'발퀴레의 기행'(말달리기)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중 제2부 오페라인 발퀴레 제3막에 등장된다. 이 곡은 3막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곡으로 주신 보탄의 딸인 9명의 발퀴레들이 천마를 타고 부상 전사를 방패로 나르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발퀴레들의 용감하게 하늘을 나는 모습이 거침없고 자유로운 선율로 장엄하고 경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곡은 바그너의 작품 중 '로엔그린'의 결혼 행진곡과 함께 가장 유명한 곡으로 장쾌하고도 행진곡풍의 시원한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발퀴레'는 전쟁터를 날아다미며 싸우는 호전적 여신이다. 발퀴레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발할라'성으로 옮기는 신으로 게르만 최고의 신 '보탄(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의 딸들이다. 제대로 된 전사들만 선별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종의 용사 전용 저승사자라고 할 수 있겠다.
현악성부와 금관성부가 '발퀴레의 모티브'를 연주하면서 발퀴레의 용맹함을 영웅적으로 묘사한다. 펼침화음과 옥타브 도약으로 진행하는 '호요토! 하야하!'라는 발퀴레들의 외침과 '발퀴레의 모티브'가 함께 제시되면서 전쟁 여신의 면모를 과시한다. 이 곡의 우리말 제목이 말을 타고 다닌다는 의미의 기행이지만 때로 발퀴레의 비행이라고 제목을 쓰는 경우도 간혹 있다. 치열한 전쟁 틈바구니에서 죽은 용사를 발할라로 옮기기 위해 말을 타고 날아다니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금빛 광채 빛나는 금관악기의 팡파르로 표현하여 마치 이 지상에 존재
하지 않는 미지 세계의 소리인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 니벨룽겐의 반지라는 신화 속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바그너이기에 가능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곡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곡의 위대한 음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곡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 없는 신화적 공간에 인적, 음악적 물량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관객을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하려는 바그너의 허장성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곡은 콘서트에서 별개의 레퍼토리로서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바그너는 이 곡이 오페라 이외에서 연주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팡파레 스타일의 이 곡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화와 광고 등에서 다채롭게 차용되고 있다. 웅장하고도 비장한 군대음악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1979년 미국 영화인 '지옥의 묵시로'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제9 공정연대 군인들이 전투 헬리콥터를 타고 출격할 때 헬리콥터에 장착된 라우드 스피커로 통해 이 곡을 적들에게 들려주었다. 심리적으로 적에게 공포심을 주며 아군에게는 출전에 대한 모티브를 주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헬리콥터 편대로 적뿐만이 아니라 저항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에게도 무자비한 폭격을 벌인다. 마을 곳곳에 작열하는 포탄, 뿌연 연기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이 곡은 포탄보다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전쟁의 한복판을 지배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그 상황에 미쳐가는 인간의 광기가 극적으로 표현된 장면을 극단적인 광기의 음악으로 묘사함으로써 시각과 청각을 다차원 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현실에서 이 곡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히틀러이다. 나치 병사들의 대규모 집회에서 자주 이 음악을 연주하였다. 전선으로 나가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목적이었다. 히틀러는 바그너를 숭배했던 인물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서곡이나 '탄호이저' 또는 '로엔그린'의 서곡을 특히 선호하였다. 바그너의 음악은 독일의 민족 정체성과 신화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오페라와 음악은 독일의 고대 전설과 신화를 다루며 이러한 요소는 나치의 민족주의 이념과 잘 맞아떨어졌다. 바그너 자체도 개인적으로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저서와 글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기에 나치 정권은 이러한 바그너의 사상을 악용하여 반유대주의적 이념을 정당화하고 대중을 최면에 빠지게 하였다. 결국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 독일의 이념과 정권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전쟁과 대량 학살의 시대 속에서 비극적으로 악용된 것이다.
2008년에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히틀러 제거를 위해 작전인 '발키리'도 주인공이 히틀러 제거를 위해 고심하던 중 바그너의 곡을 듣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려 만든 작전이라고 한다. 원래 발키리 작전은 히틀러가 베를린이 비상사태에 빠질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작전인데 이를 역이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작전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 속에서 독재자 히틀러가 주인공에게 바그너를 평가한 내용이 있다.
"바그너를 잘 아나? 신화 속 발퀴리는 신들을 섬기면서 인간의 생사를 결정했네. 용맹스러운 전사들을 고통스러운 죽음에서 해방시켰지. 바그너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 국가사회주의도 이해하지 못하지"
바그너의 음악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사람을 죽였다고 폭탄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악용이 문제이다. 물론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라는 부분이 히틀러에게 있어서 대중을 세뇌시키기에 더 유용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음악은 죄가 없다. 음악은 누가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같은 곡도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광기를 주기도 하지만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한다.
이 곡을 듣자마자 숨 쉴틈도 없이 머리에 반짝하고 떠오른 것은 스타워즈의 한 장면이었다. 물론 원래 영화의 OST인 'The Imperial March'도 매우 잘 어울리고 장대한 곡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발퀴리의 기행이 그 장면에 연주되었다면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도열한 흰색의 제국군의 사열장면이 더 웅대하고 장엄하게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행성을 가릴 만큼 거대한 우주선. 전면에 펼쳐진 우주는 깊고 검은 어둠을 품고 있다. 엄청난 수의 클론 병사들이 흰색의 갑옷을 입고 도열하여 서 있다. 200명 이상으로 나누어진 연대 병력들이 들어오고 지나가고 힘차게 전진하며 절도 있는 분열과 사열을 보여준다. 나는 100m 높이의 지휘대에서 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나의 백색 병사들은 어둠만이 가득 찬 우주와 강렬하게 대비되어 눈부시게 빛난다. 이곳에 정의는 없다. 적과 전우만 존재한다. 국익, 정치적 이념, 더러운 음모 따위는 모른다. 그런 것은 국가의 수뇌라 불리는 인간들이 따지고 계산할 것들일 뿐...
병사들의 얼굴에는 생존의 욕망이 가득하다. 가족의 생존이, 자식의 희망찬 미래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심지어 정의도 진실도 의미 없다. 전쟁에는 정의를 위한 불의라는, 생존을 위한 살인이라는 인간의 가장 추악하고 가능스러운 변명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잔인한 폭력이 난무한다. 그럼에도 나는 100m 아래서 개인의 생존을, 전우의 안전을, 국가의 승리를, 그리하여 자신의 가족과 염원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들을 위해 손을 들어 올리며 크게 외친다.
"발할라~! 발할라~!"
진정한 용사만이 안식을 위해 갈 수 있다는 용사들의 천국. 지옥 같은 전쟁을 앞둔 병사들에게 적을 대적할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하여 나는 나의 두려움과 비겁함을 숨겨야 한다. 가장 앞장서 적을 향해 돌진하는 용기와 적의 힘에 맞부딪쳐 이겨내는 강인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주를 향해 들어 올려진 나의 작은 손에 수십만의 병사들이 오른손을 들어 가슴을 쿵쿵 치며 답례를 한다. 그리고는 나를 따라 외친다. 백만 대군의 입을 모아 외친다.
"발할라~! 발할라~!"
나는 자랑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며 승리를 다짐한다. 이때 거대한 우주선의 천장에서 장쾌하고 웅장한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울려 퍼지며 도열한 백의의 병사들 머리 위를 맴돌다 검은 우주를 넘어 적들의 심장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우리에게 폐배는 없다. 오직 승리뿐....
힘들고 맥 빠지는 날, 너무 힘들고 지쳤을 때, 이 곡은 당신의 의식 깊은 곳에서 포기와 나태 그리고 절망이라는 적들을 단숨에 반으로 가르며 돌진하는 진정한 용사의 용기와 힘을 부여해 줄 것이다.
가자 발할라로!
우리를 패배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라!
싸우자 이기자 부숴버리자!
당신의 뒤에는 당신을 지지하는 수만의 병사와 도끼를 하늘로 쳐들고 당신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발퀴레들이 친구의, 동료의, 부모형제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https://youtu.be/aCk5q5Ovb4A?si=UIaLAa14Tw-ahDpQ 바그너 발퀴레의 기행 Ride of the Valkyries by Wagner [출처 : 유튜브]
http://blog.naver.com/qkrdmsghd/40139524934 영화 지옥의 묵시록 중 미군의 제9 공정연대 군인들이 전투 헬리콥터를 타고 출격하는 장면 [출처 :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