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듣는 클래식 18
볼레로는 1928년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해 작곡한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또한 질병으로 인해 작곡 능력이 감소하기 전 완성한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무용가인 루빈스타인의 의뢰로 시작된 이 작품은 C장조, 4분의 3박자로 작곡되었으며, 피아니시모(매우 약하게)로 시작하여 연속적인 크레셴도(소리가 점점 커짐)를 통해 포르티시모(매우 강하게)까지 상승하는 구조를 가진다. 이 작품은 곡 전체에 걸쳐 불변하는 스네어 드럼의 오스티나토(반복되는) 리듬 위에 두 개의 멜로디가 번갈아 반복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평균적인 공연 시간은 약 15분 정도로, 라벨은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볼레로란 스페인과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에서 유래한 춤이자 춤곡을 말한다. 다만 스페인 볼레로와 쿠바 볼레로는 리듬과 박자가 아예 달라 별개로 취급한다. 원조 스페인식 볼레로는 18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캐스터 넛츠로 반주하는 춤곡을 말한다. 3/4박자에 8분 음표와 셋잇단 16분 음표를 더한 리듬형으로 구성되며 템포는 왈츠에 비하면 훨씬 느리고 같은 박자의 마주르카(폴란드 춤곡) 보다도 더 느리다. 쿠바식 볼레로는 홀수 박인 스페인 볼레로와 달리 2/4 혹은 4/4박자를 취하며, 장단도 판이하여 오히려 손(Son)에 가깝다. 쿠바 볼레로는 이후 카리브해의 주변 섬들과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으로 퍼져 수많은 변종과 영향을 받은 곡을 낳았고, 쿠바 내에서도 이후 쿠바 대중음악의 뿌리를 이루는 트로바의 밑바탕이 되었다.
모리스 라벨은 1875년 프라스 피레네 지방의 시브르에서 태어난 작곡가이다. 드뷔시와 함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전통적인 형식과 화성에 의존하지 않고 유연성 있는 작곡 기법과 형식을 시도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프랑스 고전음악의 명확하고 간결한 형식으로 회귀하는 신고전주의 작품 성향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물의 장난',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 피아노곡 '밤의 가스파르', '쿠프랭의 무덤'과 관현악으로 '스레인 랩소디', '볼레로' 등이 있다.
라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이미 저명한 예술가 반열에 속한 데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 징병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굳이 자원입대를 고집한다. 의무부대원으로 입대한 그는 끔찍한 전장의 풍경에 예민한 영혼에 상처를 받고, 거기에다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하던 어머니의 임종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이한다. 그렇게 정신적 피로로 인해 한동안 창작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며, 전쟁 후 미국으로 피아노 연주 투어를 다니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그 후유증으로 뇌 수술을 받게 되어 5년 동안 거의 말도 못 하고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 곡은 연주자에게 연주하기 매운 힘든 곡이라고 한다. 특히 곡이 끝날 때까지 스네어(작은북) 연주자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같은 리듬을 반복해야 하는데 한 20번쯤 치고 나면 헷갈리기 시작해서 엄청난 집중력을 요한다고 한다. 볼레로는 라벨의 음악적 매력이 응축된 걸작이다. 지적이면서도 야성적인, 현대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느낌이 넘실거리는 신비롭고 매력적인 곡이다. 구성은 단순하지만 치밀하게 계산되어 완성된 구조이다. 똑같은 리듬의 두 멜로디가 다양한 악기로 계속 반복되어 듣다 보면 지겨워질 것 같지만 지겨움이 아닌 중독이 되어버리는 음악이다. 여러 가지 악기의 음색이 더해지며 점점 고조되며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딴 따따따따 딴 따다딴'하는 대표적인 리듬이 플루트의 독주를 시작으로 단조로운 반복이 진행되다가 새로운 악기의 추가로 점차 장대하게 연주되는데, 커지는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팽창이 묘한 긴장감을 만들며 대미를 장식한다.
볼레로는 영화 '남과 여'를 연출한 클로드 를루슈의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Les Uns Et Les Autres, 1981)에 삽입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서 에펠탑 맞은편 트로카데로 정원에 설치된 야외무대에서 '루도프 누레예프'가 연기하는 발레는 영화의 명장면으로 유명하다. 프란시스 레이가 음악을 맡았으며 프, 미, 독, 소 등을 무대로 4개 나라 유명 음악가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며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밀정'과 JTBC 드라마 'SKY 캐슬'의 차민혁 테마곡으로도 삽입되었다. 이외에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 및 은하영웅전설 등에 BGM으로 삽입되기도 하였다.
특히 영화 '밀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친일파들의 파티에서 시작된 스네어의 반복적인 울림은 폭탄을 설치하는 내내 영화의 긴장감을 지속시키며 극의 흐름을 클라이맥스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멜로디 자체는 의외로 밝아서 긴장감 넘치는 거사의 과정과는 오히려 역설적으로도 보이지만 파티에 참석한 여러 친일파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척결하고자 하는 의열단들의 심정과 암살당하는 밀정의 모습이 매우 잘 어우러지며 역대 최고의 명장면을 낳았다. 일본인 장교가 독립군이 보낸 사망이라는 글자가 써진 편지를 보며 얼굴이 굳어지는 순간 미소, 동시에 마지막 술잔을 치켜들고 떠나가는 송강호의 뒷모습과 함께 화려하게 터지는 폭발의 단말마가 화면 가득 카타르시스를 전달한다.
볼레로를 처음 들었을 때는 사실 '뭐지?'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3~4분을 들어도 같은 박자의 같은 리듬 그리고 집요한 반복, 뭔가 묘하게 신경을 긁는 듯한 선율, 전체에 깔려있는 관현악의 출렁이는 선율과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슬며시 동화되어 버리는 묘한 스네어의 울림. 심심한 반찬을 먹는 듯한 느낌, 혹은 아무런 양념도 조리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기본 반찬 같은 느낌이 곡 전반에 흘러넘친다. 솔직히 '내가 클래식에 문외한이라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에 절망하게 만드는 곡이었다.
선율의 단순함, 스네어의 반복적 집착, 지독히도 변화 없이 꾸준히 연주되는 꾸준한 박자의 집요함. 그러면서도 다양한 악기를 차례로 참여시키며 하나하나 확인하는 세심함 아니 편집증이 반복에 반복에 다시 반복을 거듭하여 연주된다. 화려한 변화도 없다. 관현악의 웅대함도 없다. 눈곱만큼의 장엄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엔 듣자마자 듣기를 중단하고 모차르트나 차이코프스키를 들었다. 가슴 떨리는 슬픔이 녹아내린 쇼 스타코비치를 찾아다녔다. 다양한 클래식을 접하다가 지나가는 List에서 간혹 보이는 '라벨의 볼레로' 영상에 손이 갈까 말까 고민하다 '에이 한번 더 들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눌러본다. 처음에 3분 듣다 말고, 그다음에는 5분, 그러다가 14분짜리를 들어 보고 마침내 17분짜리 풀버전은 어떨까 하는 궁금함에 손가락을 눌러 멍하니 다 듣고 말게 된다.
이 곡을 듣다 보면 솔직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스타코 비치의 '두 번째 왈츠'에 흐르는 허무한 낭만도,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에 울려 퍼지는 평안한 쓸쓸함도 없다. 단순 반복적인 리듬과 지겨움을 견뎌내는 신음 한마디 없이 지속적으로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스네어의 분절음. 탁탁 끊어진 듯한 리듬임에도 불구하고 빈틈없는 연속성으로 꽉 차있는 선율들의 흐름. 분절된 사이사이를 반복될 때마다 반복이 아닌 척 하나씩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새로운 관악기의 등장이 분자의 틈을 메꾸는 원자가 되어 17분을 오롯이 꽉 채운다. 멀리 흐릿한 몽환 속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자의식을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울리는 스네어가 발목을 붙들어 현실에 머물게 만든다.
볼레로는 우리의 인생이다. 매일 의미 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 그러나 묘하게 조금씩 다른 하루하루. 화려하기도, 불안정하기도 때로는 고음으로, 때로는 저음으로 단순하면서도 다채롭게 변화하는 그런 음악이다. 나의 하루하루는 매번 다르게 등장하는 관악기처럼 변화가 펼쳐지지만 타인의 하루는 반복만을 고수하는 스네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만일 스네어가 없다면 이 곡이 어떻게 들렸을까? 화려했을까? 관악기의 씩씩함으로 행진곡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아니면 부드러운 무용곡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마도 밋밋하고 기교만 있는 그냥 그런 곡으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다채롭다고 생각하는 내 삶의 하루는 남에게는 단순한 스네어의 울림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로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연약하고 초라한 하루라는 일상들이 삶 속에 묘하게 스며들어 주요한 순간순간을 나라는 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고 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의 인생도 홀로 만들어 나가지 못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건물의 바탕이 되는 기초석처럼 타인의 삶들은 뭉치고 흩어지고 연결되고 융합되어 나의 삶의 버팀목으로 나를 살게 해 준다.
중독이란 말은 본래 몸에 무해한 술, 담배, 도박, 마약 등 부정적인 의미를 가득 내포하고 있지만 이곡에 대한 중독은 매우 유익하고 행복을 불러온다. 마치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는 명상의 시간과 같은 여유를 제공한다. 힘들고 복잡한 하루를 마치고 지쳐 집으로 돌아온 당신! 17분의 몽환적인 명상 속에서 병들어가는 자신의 영혼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선물하여 주는 것은 어떨까요? 꼭 한번 들어보세요.
https://youtu.be/pRf2nuP95Sc?si=3Z_0vI9tlxALM2o4 밀정: (라벨 ~ 볼레로) - Boléro, Op.81) [출처 :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