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시대 속에서 성장한다
미조의 시대
엉킨 소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연희동의 밤
나의 방광 나의 지구
재활하고 사랑하는
그는 매미를 먹었다
현서의 그림자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
오늘날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 또 받으며 살아간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유효하고 OO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밈이 있는 시대. 즉 우리는, 누군가의 작은 행동이 타인의 행동으로 이어지기 쉬운 시대 속에, 연쇄적인 상호작용 속에 존재한다.
소설 속에는 2025년 현재, 지금의 시대가 다양하게 묘사된다. “사람들이 좋은 웹툰보다 나쁜 웹툰에 더 많은 돈을 쓰는 시대(<미조의 시대>)”, “누구나 유명해질 수 있는 시대(<젊은 근희의 행진>)”, “일은 줄어들지 않고, 업무 처리 속도는 절대로 빨라지지 않으며, 업무의 난도는 점점 높아지기만" 하는 시대(<재활하고 사랑하는>).
그리고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은 비난받기도, 자책하기도 한다. 가학적인 웹툰이 돈이 되는 사회에서 주인공은 “(수영) 언니가 하는 일은 세상을 조금 더 나쁘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35쪽)"고 생각하고, 매력 자본이 중요해진 지금 근희의 유튜브 영상에는 “노출 관종이네. 가족들이 모르나? 알면 좀 말리지(149쪽)”라는 악플이 있다. 그리고 번아웃을 앓을 시간이 없어 번아웃 증상을 무시하던 라미는 어느 것도 잃고 싶지 않아 했던 자신의 마음을 후회한다.
하지만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한 시대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감히 개인을 단정 짓거나 비난해도 괜찮을까. 타인을 혹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해도 괜찮을까. 그러기보다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러니까 이 사회를 돌아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이 소설집은 독자로 하여금 이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던 수영 언니는 시대가 요구하는 걸 만들어야 돈을 주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가면서도 그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미조의 시대>). 3,000만 원도 모으지 못해 어디에도 내려앉아 쉬지 못하는 기진은 집 하나 구하기 쉽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 돈이 되지 않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었을 뿐이다(<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꿈을 제대로 이루거나 완전히 버려야만 돈을 벌 수 있(98쪽)"는 시대에, 경희는 바라는 세상이 있어서 글을 쓰다가 청춘과 슬픔과 기쁨을 희생했을 뿐이다(<연희동의 밤>). 그리고 한 부부는 아껴 쓰고 저축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라, 투자에 뛰어든 시기가 늦었을 뿐이다(<나의 방광 나의 지구>).
좋아하는 게 있어 그것을 좇았을 뿐인데 이 사회는 그들을 벼랑 끝으로, 흔들리는 지반 위로 몰았다. 불안정한 시대 위에서 불안함을 느꼈을 뿐인데 누군가는 그들이 멍청하다고, 혹은 얄밉다고 욕한다. 하지만 우리는, 감히 한 개인을 단정 짓거나 비난할 수 없다.
"충조는 완전히 돌았다. 낙성대 반지하방 창문에 머리통을 내밀게 한 뒤 지나가는 행인의 발길에 차이게 하면 정신을 좀 차릴까. 나는 충조에게 말했다. 이런 공단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좋아하라고. 그런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힘들 거 아니야. 오빠보다 훨씬 힘들게 일할 거 아니야. 멋지다니. 그냥 멋져서 구경만 하고 온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오빠는 그런 말도 못 들어봤어? 그 쇳물 쓰지 마라.
충조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지성을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남성이다. 충조는." - <미조의 시대>
"새벽에 올라온 글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들이 쓴 글이다. 생명을 죽인다는 죄책감,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 나도 그걸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삶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죄책감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다. 죄책감을 극복하든 못하든 계속 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온전한 결정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될 수 있게 나를 좀 내버려 두면 안 될까?" - <엉킨 소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잘 모르는데 마주 앉아서 파스타를 먹고 있는 이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시간에 너는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나는 문장을 한 줄이라도 더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너는 정말로 환자를 살리겠지만, 나는 내 글을 살리지 못할 것이다." -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언니, 어쩌면 이 세계에선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의미 없는지도 몰라. 순간만 존재하고, 모두가 비트(bit) 위를 가볍게 흘러 다니는 건지도 몰라. 그게 좋은 걸까? 나도 종이 신문을 보던 시절에는 내가 신문 한 면을 차지하는 유명인이 될 거란 상상은 안 했어. 나는 누구나 유명해질 수 있는 시대에 나도 같이 유명해지고 싶었던 것뿐이야." - <젊은 근희의 행진>
"선생님, 청춘이 아름다운 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세상을 시시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 시기가 지나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이 공포로 다가와요." - <연희동의 밤>
"나의 오류는 그 어느 것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 기정은 나를 용서해 줄까. 너의 오류는 나의 오류를 지적하지 못하는 용기 부족에서 비롯된 거라고 말하면 기정은 나의 등짝을 또 때리겠지." - <재활하고 사랑하는>
"기다리는 그의 행위는 올곧이 지속되고 있다. 오로지 기다리기 위해 기다리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 <그는 매미를 먹었다>
"안락한 현실 속에서 현서는 계속 저렇게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면발을 건져 먹고 있는 현서를 바라보다가 시기 섞인 마음이 들었고, 그런 나를 발견하고선 부끄러움을 느꼈다." - <현서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