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리의 배제
미리(우찬)의 시간(소설연재 8)
미리를 만났던 시간들은 온통 채휘彩輝의 계절이었다.
가을이 아니었어도 가을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붉은 계절이었을 것이다.
우찬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가을은 조금 달랐다.
여전한 초록 속에 가끔 노란 은행나무가 조금 보였고 우찬이 살던 남쪽엔 가로수조차 겨울 내내 초록빛 잎에 빨간 열매들이 아른아른 달리는 먼나무나 녹나무, 심지어 야자수들이었다.
북쪽 도시로나 가야 짧은 봄의 화사한 벚꽃길과 가을의 갈색 낙엽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오름을 뒤덮은 억새물결 말고는 여름과 많이 다르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저 조금 색 바랜 여름이었다.
해발 오백 미터가 넘는 산의 중턱에 가면 비로소 강렬하고 맑은 채도의 단풍들을 아주 귀하게 볼까 말까 했다.
중산간 아래로부터 해안으로는 빙 둘러 눈 씻고 찾아봐야 새싹부터 적갈색으로 올라오는 일본단풍 말고는 초록으로 싹이 올라와 가을이 되면 붉게 물드는 단풍이 드물었다.
겨울조차, 무겁게 내리누르는 하얀 눈 더미 밑으로 언제나 초록한 풀들이 기죽지 않고 하루이틀만 버티면 아무리 두껍게 내렸던 눈도 바로 녹았고 곧이어 나보라는 듯 뻣뻣이 살아나는 초록들의 세상이었다.
사계절이 초록한 곳에서 가을은 봄보다 훨씬 짧았고 갈색 낙엽의 시간은 금방 사라졌었다.
미리를 만나기 전까지 우찬에게 가을은 늘 클릭만 하면 휘리릭 넘어가는 모바일 광고 같은 그런 계절이었다.
우찬은 색보다는 빛에 매료되는 편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가을 교정을 수놓은 노랑과 빨강 그 사이에 열 단계쯤 그러데이션 되는 다채로운 주황과 주홍에 놀랐었다.
하지만 거리의 가로수에서도, 쌈지공원에서도, 그리고 불쑥불쑥 솟아있는 크고 작은 산에도 울긋불긋한 주황과 주홍의 숲에서 비로소 가을이라는 색의 계절을 체감했을 때도 감동보다는 ‘오!’ 하는 감탄 정도였다.
그보다는 늘 미세먼지 속에서 희미하게 올라온 먼 빌딩들의 윤곽 뒤로 비치는 세기말적 햇빛의 빛 내림에 더 매료되었었다.
또, 밤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빛들이나 반딧불이들, 호수나 강물의 윤슬 같은 빛나는 아주 작은 움직임들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런데 미리가 공인중개사 사무실 앞에서 딸꾹질을 하다 우찬의 머리에서 은행잎을 떼어낸 그 순간 우찬에게 세상의 모든 빛 보다 더 다채로운 색의 세상이 열렸다.
하늘은 파랬고 하얗고 깃털 같은 구름들이 꼬리를 뿌려올리며 느리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로수들은 노랬고 한 블록 뒤에 높이 솟은 대학의 높은 담장 위로 아주 붉고 노란 단풍들이 꽃 더미처럼 우찬과 미리가 있는 공간의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맑고 환한 가을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조금 파리한 미리의 얼굴에 작은 점 몇 개가 콧등과 광대 사이를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어지러웠는지도 몰랐지만 귀여웠다.
미리는 중간 길이의 다양한 문양이 섞인 면 퀼팅 카디건 속에 브이넥의 빨간 스웨터를 입었었다.
생각보다 훨씬 얇은 빨간 스웨터는 그녀의 피부색마저 투명하게 느껴지게 했다.
흑갈색의 짧은 미리의 머리는 햇살과, 은행잎을 자꾸만 떨어뜨리는 바람에 의해 밝은 갈색처럼 나풀거렸다.
억새들이 햇빛과 바람을 받으며 밝게 나풀거리는 것 같았다.
보도블록의 밝은 회색과 상가입구에 설치된 좁지만 긴 데크는 오일스텐을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진하고 촉촉한 갈색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배색이었는지 새삼스러웠었다.
카페에는 샛노란 어닝이 데크 절반까지만 내려와 있었다.
‘가을......’
‘가을이 이런 색과 빛이구나.’
우찬의 이전 가을은 적록색맹이 보는 세상 같았다면 그 순간부터는 색각 보정 안경을 처음 쓰고 바라보는 가을 같았다.
우찬은 마치 미리와 연애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공간을 비워놨던 사람처럼 온전히 미리에게 몰두했다.
미리가 교대근무를 하러 나갈 때조차도 우찬은 미리의 집에 있고 싶어 했다.
마치 미리를 위해 모든 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자신의 모든 문을 열어젖히고자 했고 미리가 기꺼이 그 열린 문으로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우찬은 이미 미리의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미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몸이 들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딸꾹질을 하던 미리를 부축하다시피 해서 노란 어닝이 있던 카페에 들어가서 따듯한 얼 그레이 티를 같이 마시고 테두리가 일그러진 그녀의 카메라 망원렌즈를 살펴보다 작은 천문관측 돔을 갖춘 망원경 전문점으로 같이 갔던 날 이후 미리의 몸은 생각보다 빨리 열렸었다.
미리의 피부는 서늘했지만 몸 안의 작은 동굴들은 뜨거웠고 몸짓은 소극적이었지만 그녀의 모든 표면적들은 그의 모든 표면적들과 젤리처럼 달라붙을 수 있었다.
어설프기만 하던 우찬의 이전 경험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미리의 몸 안에서 완벽한 하나를 느낄 수 있을 때 우찬은 온몸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다 살아나 외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지만 우찬의 사랑이 미리를 향해 점점 더 깊어지는 것과 달리 미리는 여전히 ‘바로 지금’ 이외의 미리의 시간 속으로 우찬이 들어오려는 것을 싫어했다.
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리의 시간을 우찬이 서둘러 상상하려는 것 역시 싫어했다.
싫어하는 건지 두려워하는 건지 애매했지만 늘 그런 말을 꺼내기만 하면 미리는 어느새 조금 멀어지고 또 조금 멀어져서 우찬을 당황하게 하곤 했다.
꾹 닫혀있었던 미리의 지나간 시간들의 문을 열 재간이 없었지만 우찬은 아쉽지 않았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때문에 미리에게 속상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미리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우찬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
적어도 한 동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