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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소한 존재들의 눈부시게 빛나는 여행기

MR. 플랑크톤

by 마리온
먹이사슬의 맨 밑바닥. 바닷속의 가장 미천한 존재.
그런데 온몸으로 빛을 내며 산소를 뿜어내 지구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존재

종종 내가 하찮은 존재 같다는 생각에 괴로웠던 순간들이 있다. 세상에 흔적 하나 남겨보려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지만, 멀리서 누군가 나를 바라본다면, 하등 쓸모없는 행위처럼 보이리라. 하염없이 작아 보이는 나 스스로의 모습이 싫어 자기혐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이 떠올라, 이 플랑크톤들의 여행기에 하염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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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플랑크톤’은 정자은행의 실수로 잘못 태어난 137번 정자 ‘해조’와 조기 폐경이 찾아온 종갓집 예비 며느리 ‘재미’의 로드무비 이야기다. 드라마 초반 내용은 마치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소설 감성을 떠올리게 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가정에 대한 상처가 있으며, 범죄 수준의 각종 기행을 서슴지 않는 ‘나쁜 남자’, ‘해조’.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인생의 꿈인, 어떤 상황에서도 굳세고 낙천적인 ‘캔디’ 같은 여주인공 ‘재미’. 근래 드라마에서 이토록 전형적이고 직설적인 캐릭터가 나온 경우가 드물어서 그런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면 과거 푹 빠져 봤던 몇몇의 인터넷 소설들이 떠올라 향수와 함께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다.


다만 이 드라마가 기존 ‘인소 감성’의 로코 드라마와 차별점을 가지는 부분은 이 캐릭터성을 단순히 로맨스적 장치로만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불행서사로 점철된 캐릭터들을 ‘정상 사회’에 속하지 못한 소외된 이들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늘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척 하지만 사실은 너무 외롭고 아픈 삶이다. 사회의 첫 집단이 되는 ‘가족’, 혈연 가족의 삶조차 온전히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 시작부터 어긋나 자연스럽게 사회에 배제되는 것이 익숙한 이들. 해조와 재미의 삶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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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사슬의 맨 밑바닥, 바닷속의 가장 미천한 존재. 그런데 온몸으로 빛을 내며 산소를 뿜어내는, 지구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플랑크톤.


드라마는 해조와 재미를 이 플랑크톤으로 치환한다. 이 세상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그 존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네가 움직이는 모든 길은 방황이 아닌 방랑이라고, 그 무엇도 의미가 없지 않았다고. 두 인물의 로드무비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작더라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내는 것, 이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반짝이고 귀한 일인지. 드라마를 보고 다시금 생각한다.


내 인생 마지막 장면은 너구나, 그렇다면 뭐 내 인생도 꽤 괜찮았네.

처음엔 납치로 시작했던 불편했던 강제 동행이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여행기가 되었다. 기나긴 여정을 통해, 이들은 사회에서 일컫는 ‘정상성’에서 기꺼이 벗어날 용기를 얻는다. 비록 나를 버렸던 가족을 다시 마주해도, 진짜 친부를 찾지 못하더라도, 아무렴 상관없다. 내 옆에 함께하는 이 소중한 사람과 새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나의 새로운 집이자 가족이자 안식처이니까.


방황과 방랑.

하나의 글자만 다를 뿐인데 어감이 참 다르게 다가온다. 사실 방황과 방랑은 마음의 차이일지 모른다. 내가 길을 잃었다 생각한다면 방황이 되겠고, 어디로 흐르든 여행을 하고 있다 생각한다면 방랑이 되겠지. 방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 원래 계획되로 되는 일 하나 없는 인생이니까. 순간에 기꺼이 행복하고 순간에 가장 충실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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