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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곳, 조명가게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조명가게> 리뷰

by 마리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곳엔 어떻게 오시게 된 겁니까, 여기 말고 이곳에

<조명가게>는 내게 묘한 인상을 남긴 드라마다. 초반부터 후킹한 소재와 사건들로 시청자를 몰아붙이는 요즈음의 드라마들과 달리, <조명가게>는 러닝타임 중반에 접어들 때까지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손톱이 안쪽에 박혀 있는 여자, 온몸에 눈이 잔뜩 얼어붙은 남자, 다리가 뒤로 꺾인 남고생, 거인처럼 몸이 쭉 늘어나는 하이힐 신은 여자…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어둡고 음습한 거리를 반복해서 배회하지만, 그 이유는 알려주지 않는다.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턱없이 부족해, 시청자는 그저 주어진 단서를 단편적이고 파편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한정된 정보 속에서 알 수 없는 기괴한 이미지들이 보이다 보니, 더욱 불쾌하면서 묘한 공포를 자아냈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불쾌하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드라마가 참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롱테이크 컷으로 드라마의 상황은 완전히 전환된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환자들을 한 명씩 부감샷으로 비춰주는데, 그들이 바로 골목길의 기이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공포가 이해와 공감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나의 컷으로 흩어져 있던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코마 상태에 빠진 이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빛을 찾아 삶을 선택해야 한다. 골목길을 떠도는 이들은 아직 빛을 찾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매는 중이다. 그리고 ‘조명 가게’는 그들에게 현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한다.


생과 사의 갈림길인 이곳에서 어둠을 비추는 작은 빛, 여기는 조명가게다.



지금부터는 환자분의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서 빨리 사랑하는 사람이 깨어나길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잔인하게 들릴 정도로 드라마 속 의사들은 환자의 의지를 강조한다. 인간이 한계를 벗어난 일이 발생할 때 초월적인 영역에 의존하듯이,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현실적인 방법이 다했다는 뜻처럼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실체 없는 듯한 이 ‘의지’를 아주 중요한 힘과 가치로 바라본다. 끝없이 반복되는 어둠의 골목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빛을 찾고 의식을 되찾는 과정에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의지’다. 그 의지는 단순히 살고자 하는 생의 욕망에 국한되지 않는다. 드라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의지로 묘사한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죽음 앞의 존재’ 실존 철학이 떠오른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고민하고 탐구한다. 조명가게의 인물들 역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실존을 고민하고 선택한다. 그 선택이 반드시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방향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는 ‘이곳’,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공간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선해가 조명가게에서 자신의 빛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조명을 깨 이곳에 남기로 결심한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이곳이 더 의미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어디가 되었든 다 사람 사는 곳이니까.



더 나아가 드라마는 때로 그 의지가 개인의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염원이, 기도가 의지로 변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조명가게>에서는 오로지 한 사람의 의지로만 해결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인간을 살리려는 안내 구조견의 의지, 자신으로 인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죄책감과 사명으로 남은 이들을 구하려는 버스 기사의 의지,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현실 세계로 돌려보내려는 의지, 현실 세계에서 사고를 추모하는 익명의 의지들까지… 타인을 헤아리는 이타적인 마음이 의지가 되어 서로 영향을 미친다.


조명가게 주인인 원영과 그의 딸 유희의 이야기는 이러한 메시지를 확장시킨다. 사회적 비극이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돕고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버지 원영은 아파트 붕괴 사고로, 딸 유희는 버스 추락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의 무책임과 이득이 초래한 사회적인 비극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억울한 희생자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의 연쇄 속에서 원영은 딸 유희를, 유희는 딸 현주를 지키고자 애쓰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낸다. 이처럼 과거가 현재를 돕고, 현재가 과거를 기억하며, 죽은 자가 산자를, 산자가 죽은 자를 돕고자 하는 의지는 결국 우리가 모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 의지 속에 우리 사회에서도 계속되는 이 비극의 연쇄고리를 끊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은 밝은 빛을 보았다고, 어두운 터널을 보았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났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빛들이 있다. 끝없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한 나만의 빛이기에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빛이 비추는 곳이 어디든, 빛을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하고 박수받아 마땅한 삶인 것 같다. 아주 다양한 빛들이 모인 ‘조명가게’의 모습이 드라마 속에서 유난히 아름다웠던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나만의 빛을 찾으려 얼마나 노력했는지. 언젠가 나도 내 빛을 손에 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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