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 다는 것은 무거운 납으로 된 옷을 입는 것!
집 앞 패스트푸드점(fast food店)에서 간단히 치킨 세트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섰다. 점원에게 메뉴를 주문하려 말을 걸었더니 입구의 「키오스크(Kiosk)」에서 직접 주문하라는 짤막한 답변이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키오스크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다. 키오스크와 처음 마주한 순간의 어색함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자잘한 글씨와 사진, 네모난 버튼 모양이 화면에 가득하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이다.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메뉴가 무엇인지, 어떤 순서로 선택해야 하는지가 대략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난감한 것은 내 뒤에 이미 5~6명의 손님이 줄을 서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순간부터 난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마치 걸그룹의 안무 동작처럼 좌우로 펼쳐져 나에게 눈총을 쏘아댔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불평 어린 마음의 소리가 고스란히 등으로 전해졌다.
그래도 어찌어찌 참아가며 원하는 메뉴를 선택하고, 대견하게도 사이드 메뉴인 음료까지 주문을 마쳤다. 그런데 두 번째의 장벽이 날 가로막았다. 신용카드를 넣어야 하는데 동네 산책을 나온지라 현금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힘들게 이뤄왔던 주문이 모두 수포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뒷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했고 치킨은 결국 먹지 못했다.
치킨을 살 때면 점원에게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하고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돌려받고, 아울러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건네면서 점원과 눈을 마주치던 일이 생각났다.
‘아! 어쩌면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모두 없어지고 저 기계(키오스크)와 내 손가락을 통해서 음식을 주문해야 할지 모르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 당시, 키오스크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내 기억처럼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기사의 핵심은 ‘앞으로의 미래에는 키오스크가 점원을 대신할 것이며 음식 주문은 매우 간편해질 것이라는 점과 키오스크로 인해 노인과 장애인들이 차별 아닌 차별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전문가의 날카로운 예측이었다. 이 예측이 실제 사회현상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최근, 커피 전문점이나 식당, 패스트푸드점(fast food店) 할 것 없이 대부분 키오스크로 주문한다.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못하면 음식도 사서 먹지 못한다.’고 표현하면 과장된 것일까? 예전의 손님을 맞이하고 주문을 받던 미소 띤 점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래전, 안내양이 사라지고 버스요금 박스에 직접 돈을 넣고 버스를 처음 탔을 때의 기분과 흡사하다.
한 가지 일이 더 떠올랐다. 3년 전쯤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다. 어머니가 계시던 수원에서 김포공항까지 이동해야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어머니 댁 주변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있었다.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버스카드를 사용하던 때라 특별히 걱정되거나 준비해야 할 일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 시간에 맞춰 어머니 댁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버스카드를 대려는데 버스 기사가 나에게 예약 여부를 물어보았다. 고속버스도 아니고 시외버스에 무슨 예약이냐고 물었더니, 이 버스는 휴대폰 앱으로 좌석을 예약하고 결재까지 해야지 탑승할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당혹스러웠다. 얼마 남지 않은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도 빠듯했다. 버스에서 쫓겨나다시피 내려 인근 커피숍에 들어가 버스 앱에 회원가입을 하고 다음 버스를 급히 예약, 결재까지 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김포공항까지 엄청난 요금을 내고 택시를 이용했어야 했다.
생각해 보았다. ‘연세 드신 분들은 앞으로는 버스도 탈 수가 없겠구나!’ 버스라는 교통수단은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교통수단일 터인데,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만들어 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증과 함께 그날의 당혹스러움으로 생긴 약간의 분노를 담아 해당 버스 회사와 경기도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노인, 장애인 등의 이동권 보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버스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항의 섞인 부탁의 글이었다.
키오스크와 관련된 나의 경험은 결국, 디지털 도구에 익숙하지 못한 세대가 겪게 되는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4차 산업 시대, 인공지능의 시대를 거스를 순 없다. 시대는 변하기 나름이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또한 수시로 변화한다. 그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표현하고 그 사람이 자신의 신세를 ‘~라떼’라고 표현하면서 한탄하거나 젊은 세대에게 훈육하려 하는 것을 ‘꼰대’라고 표현한다.
5~60대의 우리 세대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가 아무리 불편하고 어쩌고 해도 결국 세상은 키오스크 판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인공지능과 키오스크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예전 우리가 젊었을 때 겪었던 대면의 문화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좋은 점도 많다. 물건을 살 때 구태여 직원에게 말을 건넬 필요가 없다. 너무 편리하다.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피곤함을 겪지 않아도 되고 대화가 오가면서 생기는 불필요한 감정의 대립, 다툼이 발생할 여지가 아예 사라진다.
그렇다면 결국 키오스크로 물건을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관건이 되는데, 문제는 키오스크 자체가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 무언가를 배워도 금방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키오스크로 물건 사는 법이 당장은 익숙하지 않겠지만 여러 번 시도하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막말로 ‘안 되면 안 먹으면’ 그만이다. 행여나 이 문제로 우리 세대들 자신이 스스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히지 말지어다. 우리가 젊었을 때 들어왔던 페이저(삐삐)를 당시에 우리보다 나이가 많던 분들은 잘 사용하지 못했었다. 우리에게는 버튼 몇 번만 누르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 분들께서는 매번 그 방법을 물어오셨고, 알려드리고 난 다음날에는 또 같은 질문을 해오셨다. 지금은 우리가 바로 그 세대가 된 것뿐이다. 키오스크를 통해 인생사에 대하여 잠시 회한에 빠져들었다.
저마다 자신의 인생 사이 사이에 그간 살아왔던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수학 문제집의 단원 정리 문제처럼 그간 행했던 일들에 대하여 중간평가를 하는 것, 그러고는 채점을 한 후 틀린 문제는 다시 고치고 왜 틀렸는지 풀이를 보며 확인하고.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진 이후 차디찬 바닥에서 목 놓아 훌쩍이며 행여나 다시 그 사람이 돌아올 것이라는, 어차피 그럴지도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기대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의 그 시간을 부여잡고 싶어 밤을 지새웠던 날들.
‘밥벌이의 엄정함’이라는 진리에 발목 잡혀 관심도 없는 문서를 수없이 생산하곤 했다. 단 1분도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참아가며, 내 정신을 갉아먹는 사람들의 불평 어린 시선을 견뎌 내 가며 그렇게 처음의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문서를 만들 때도 있었다. 이 문서가 다른 이에게는 중요한 가이드가 될 것이라는 약간의 확신은 그 문서에 각자의 경험과 판단의 기준이 덧붙여지며 마지막에는 내가 원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론의 소설이 되어버렸다. 갖가지 어이없는 평가와 별점이 달리면서…
이러면 이래서 싫고 저러면 저래서 싫고. 하지 않아야 할 트집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이슈로 만들어 낸다. 참 똑똑한 사람들이다.
헤어지고 난 후 절친한 친구가 따라주는 쓰디쓴 소주 한 잔과 함께 격려하는 “다 잊어버려!”라는 뻔한 말에 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친구의 말이 맞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억을, 고통을, 아픔을 잊으려고도 했다. 그런데 기억을 걷어낸다고 해서 가슴속에 이미 화석처럼 새겨진 추억은 어찌할까. 이미 그 화석을 여러 겹으로 눌러 찌그러뜨려 버렸는데. 꺼낼 수도, 도려낼 수도 없을 정도로 가슴 제일 아래부터 겹겹이 눌어붙어 버렸는데. 가슴을 통째 덜어내 버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진단과 처방이라는 허울로 정신적 어려움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말, 그리고 현란한 글솜씨로 행복할 것과 열심히 살기를 강요하는 수많은 에세이……
얼핏 보면 행복, 삶에 대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들. 하지만 보고 듣고 읽을 때뿐이다. 잠시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 있다. 삶에서 행복과 용기는 그리 쉽사리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두 개로 쪼개면 시간, 시간이 되어 더 많은 인생의 여유를 잘게 나눌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간과 시간 사이사이의 조그만 틈이라도 그 여유를 느끼고 슬픔을 그 틈에 끼워 넣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긴다고 해서, 한 단원이 정리된 후 새로운 다음 단원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틀린 문제는 또 틀리게 되고 왜 틀렸는지 분명히 보완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한 문제들이 다른 단원에서 나오면 또 틀린다. 정답지를 보아야 비로소 왜 틀렸는지 알게 된다.
그렇게 하고도 다음 시험에서 또 틀리는 일이 반복된다. 인생이 그렇다. 지나가 봐야 정답을 알게 된다. 물론, 이미 늦었다. 채점은 끝났고 점수는 빨간 색연필로 쓰여 버렸다.
누가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던가. 그 말을 했던 사람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았었나? 가치 있게 사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진데 앞뒤 없이 열심히만 살 것을 강요하며 ‘열심히 산다는 것’의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설정해 버린다. 하물며 서울역 앞의 노숙자도 나름 자신은 열심히 살았다고 여기는데 말이다.
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알아서 열심히 살 테니 참견이나 어쭙잖은 훈계 말고 당신이나 잘 살아라! 당신 인생만 인생이냐 내 인생도 인생이다. 내 인생이다! 누가 누구보고 인생에 대해 훈계 하냐! 그 시간에 당신 인생이나 신경 써라.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요컨대, 키오스크를 우리 세대가 넘지 못할 거대한 벽(壁)으로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키오스크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돈키호테가 풍차를 악당으로 착각하고 달려드는 것과 같은 허황한 일이 절대 아니다.
돈키호테가 위험한 일을 할 때마다 조언해 주던 산초 판자(Panza)와 같은 젊은이들의 도움을 받길 바란다.
사진: choon
#키오스크 #라떼 #돈키호테 #꼰대